2013년 9월 29일 일요일

반증 불가한 예술상의 딜레마 - 올해의 작가상2013과 에르메스 미술상2013의 결과를 듣고(문화공간 10월)

* 최종 수상자가 같은날 결정된 '올해의 작가상2013'과  '에르메스 미술상2013'의 발표 결과를 듣고나서 집필을 결정한 원고. 세종문화회관에서 간행되는 <문화공간>10월호에 실렸다.

** 예술상과 관련해서 그간 서너번 이상 글을 썼었다.
=> 예술상의 의미(경향신문 칼럼 2011년), 김기덕 황금사자상에 대해(씨네21 2012년), 예술상 딜레마(씨네21 2013년) 

*** 원고에 프로필 그림이 삽입될 거라며 사진을 요청해와서 왼쪽 사진을 보내줬더니 오른쪽처럼 내 얼굴을 '디스'한 캐릭터 그림이 나옴. 무서운 예술의 힘  :-0 




반증 불가한 예술상의 딜레마




반이정 미술평론가
“누가 선정 될 거 같으세요?”
한국에서 거행되는 유력 미술상을 두개 정도 좁힌다면, 국가가 주관하는 ‘올해의 작가상’과 해외 사기업이 주관하는 ‘에르메스 미술상’을 고를 수 있을게다. 두 미술상은 후보자들의 그룹전시를 연 후 수상자를 발표한다. 한데 두 미술상의 수상자가 우연히 같은 날 발표되었다. 발표 4시간 전 ‘에르메스 미술상 2013’ 후보작들이 전시중인 신사동 아뜰리에 에르메스를 둘러보는데 누군가로부터 받은 질문이 위와 같다.

“작품 완성도와 수상자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는 A가 수상할 거 같아요. 왜냐하면....이러쿵저러쿵.” A의 당선을 예상한 이유를 간추려 답해줬다. 몇 시간 후 발표된 당선자는 내가 짐작한 A가 아니었다.
같은 날 오후 ‘올해의 작가 2013’의 후보작들이 전시중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동했다. 이미 당선자 발표가 난 상태. 거기서 우연히 만난 미술인사에게 “혹시 B가 선정되었나요?”라고 물었다. 전시를 둘러보고 당선 유력자로 내가 고려한 B의 이름을 지명한 거다. “아뇨. C가 되었어요. 좀 너무했죠? 이래서야 상의 권위가 살겠어요?” 그는 투정하고 있었다. 아무튼 국내 유력 미술상들의 수상자로 내가 예측한 후보들이 모조리 선택되지 않은 셈이다.

미술상 수상자 선정을 둘러싼 이견과 투정이 십시일반 모인들, 수상의 정당성까지 부정되는 건 아니다. 이견과 투정이란 어디까지나 미적 기호를 둘러싼 개인의 편차가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미술상 선정자에 관해 자신과 동일한 이견을 품은 사람을 외부에서 자주 만날수록 자신의 미적 판단에 더 큰 확신을 품게 되는 법이다.
게다가 구체성을 결여한 심사위원단의 선정 사유까지 접하면, 설득되긴 고사하고 어이없는 심정에 빠지기 마련이다. 미술상 수상자를 둘러싼 상반된 두 견해는 접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취향의 양립된 수평선을 긋는다. 그래서 세계에서 개최되는 무수한 예술상은 그 권위에 어울리지 않는 개운치 못한 논쟁을 늘 달고 다닌다. 아카데미상도 터너미술상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예술상은 유권자의 표로 승부를 가르는 선거전과는 다르다. 예술의 우열은 반증 가능한 영역 밖에 있다.

예술상의 공정성과 권위에 대해 나는 줄곧 회의를 품어왔지만, 그 정점은 ‘올해의 작가상 2012’와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에 선정된 작년 2012년이었다. 둘을 나란히 묶어 예술상의 의미에 관해 다루려 했지만, 김기덕의 수상에 관해서만 장문의 반론을 기고하고 말았다. 정작 내 전공분야인 미술상에 관해선 반론 사유를 논리적으로 펼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포기했다. 서사구조가 선명한 영화에 비하면, 작품의 허물을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내자니 미술의 평가는 주관적 기호에 훨씬 의존하고 있어서다.

객관적 평가 기준이 부재한들 예술상의 순기능까지 부재한 건 아니다. 창작을 고무하고, 작가의 노고에 격려를 보태며, 그의 성과에 오마주를 표하는 게 예술상의 순기능이다. 또 무수한 창작물 사이에서 우열을 가르려는 세간의 요구까지 충족시킨다. 더욱이 예술상은 공중의 주목을 이끌어 고립무원 상태인 순수예술에게 시민사회와 만날 기회를 준다. 단점 역시 많다. 앞서 기술한 선정 결과에 대한 이견이 잦으며 시기심과 논쟁의 표적이 된다. 무엇보다 너무 많이 제정된 예술상 때문에, 상의 위상과 신뢰가 모두 실추되었다. 항상 ‘되는 사람만 뽑히는’ 현상도 예술상의 취지인 창작 현장에 대한 격려보다 예술계의 양극화의 증거인양 보인다. 자신은 함양미달로 평한 작품에 예술상이 주어진다면, 비평가에겐 풀어야할 과제가 생긴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제는 객관적으로 반증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이 상은 내가 잘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에 받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정말 내가 잘 해서 상을 타는 줄 알았는데 이제는 아니라는 것을 안다." 2010년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조연상 수상자 윤여정이 밝힌 수상 소감은 겸손한 성정을 드러낸 것이기 보다, 예술상의 생리를 서늘하고 정직하게 짚은 것으로 이해해야할 것이다.

자신의 평가와 정반대인 예술상 선정자 발표에 허망한 기분에 빠질 때가 많을 것이다. 심사도 부족한 사람이 내놓는 불완전한 결과이다. 그러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실망스런 예술상 수상 소식에 주눅 들 일은 아니다. 한편 제 성에 차지 않은 들, 예술상 후보자들이 대개 일정 수위에 오른 작가들이 지목되기 마련인 점도 인정하자. 따라서 후보자/수상자의 숨은 미덕을 찾아, 자기 판단을 살찌우면 된다. 예술상은 그럴 때 의미가 있다.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0914 2013바다미술제(송도) 0916 (유진갤러리) 0925 양대원(사비나) 0926 공유된 고립(금호) 0927 이상뒤샹(한국현대문학관) 근성과 협동(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

0914(토)
'2013 바다미술제' (2013.0914~1013 송도해수욕장)

0916(월)
? (2013.0916 유진갤러리)   

0925(수)
양대원 '오래된 눈물' (2013.0925~1030 사비나미술관)

0926(목)
'공유된 고립-금호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전(2013.0926~1006 금호미술관)

0927(금)
'이상뒤샹' (2013.0909~1212 한국현대문학관)
'근성과 협동' (2013.0927~1019 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




2013바다미술제(송도)




친숙한 태권브이 조형물이 인기가 높은 바다미술제의 전경. 인상적인 비구름이 몰려오기도 했음.  



? (유진갤러리)



정수진 정직성 외 3명(이름을 봤는데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이 준비한 '어떤 발표'가 있는 자리. 행사명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관련 정보를 온라인에 올려지 않은 것 같다. 아는 분 덧글을 부탁. 발표가 1시간 늦게 시작하는 통에 나는 선약이 있어서 앞부분만 듣다가 왔다.  일행과 전시장 근처(청담동)의 술집에 들어갔다가 메뉴판에 적힌 소주 가격 7천원('청하'도 1만1천원했음)을 보고 대경실색하고 곧바로 나와 형편에 어울리는 강북 지역으로 넘어가 식사를 마침.  






양대원(사비나)






개인전 관련 글은 서문 참조




공유된 고립(금호)


금호미술관 출품작가가 한명도 포함되지 않은 '자체' 뒷풀이 직후 모습. 학생 4명이 연락없이 찾아온데다가 이 날 전시 전후에 만나서 얘기 나눌 작가 3명이 섞여 있어서, 전시장 촬영을 미처 못했다. 나는 볼 일 여럿을 한꺼번에 순차적으로 해결 하는 걸 선호함. 
=> 10월5일(토) 14시. 이번 전시 비평워크샵이 금호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날 전시장 내부를 촬영해 둘 생각.  




이상뒤샹(한국현대문학관)








전위 예술의 도상처럼 추앙되는, 국내 문학인 시인과 세계적 미술인 뒤샹은 손쉽게 결합하기 용이한 두 키워드일 것이다. 때문에 <이상뒤샹>은 관람 직전부터, 귀에 익은 두 전위 예술가의 인명을 통해, 헐렁한 농담이나 반체제성을 드러낸 전시이리라 기대하기 쉽다. 그 점에서 기획 의도는 대략 관철된 것도 같은데, 반미학의 대표선수를 내세워서 기획의 책임이나 기획의 쟁점을 방임하는 인상도 받는다. 보물찾기의 유희를 빌려서, 전시장 내외부에 작품들을 숨겨둔 전시 기획/공학은 <이상뒤샹>이 기획자+참여 작가의 높은 자기 유희성을 정당화해주는 것이리라.
상투적일지언정 순수예술의 두 진영, 문학과 미술을 각 진영의 전위적 스타 예술가 둘(이상 +뒤샹)을 매개 삼아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는 가산점이 될 수 있다. 또 발길이 뜸한 한국현대문학관 내외부를 전시장으로 전용한 것도 전시 제목에 포함된 두 예술가의 게릴라 정신을 계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방문객이 워낙 없어서 대개의 시간동안 전원을 꺼두는 이 전시장은 이 기획전이 기획자와 참여 작가의 자기유희성만 보장하는 혐의를 더욱 깊게 만든다. 물론 이 전시의 설계를 완성하려면, 제도권 전시장이나 그 밖의 장소를 공간으로 쓰긴 어려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국내 문인들의 사진과 작품을 유리진열장에 배열한 한국현대문학관의 자체 전시관에 ‘간섭’하고 ‘침투’하는 것이 이 전시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획안의 성격을 감안하더라도, 관객의 발길이 거의 들지 않는 고립된 전시장, 그리고 전원을 거의 꺼둔 상태의 전시장의 내외부의 여기저기에, 숨겨둔 작품들을 하나 둘 어렵사리 찾아낸들, 남다른 즐거움이나 감동으로 연결되는 체험은 못한다. 왜 그럴까?
“이상과 뒤샹을 잊거나”, “그 둘을 생각해도” 상관없다는 이 전시의 감상법(전시장 입구에 적힌 지문 일부 재편집)은, 전시의 품질을 반증하기 어려운 무수한 동시대 미술전 기획안의 현주소를 재확인시키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이도저도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식의 기획안과 보물찾기를 빼닮은 전시 공학은 이 전시가 지닌 장점이나 결함을 모두 정당화해주는 손쉬운 퇴로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나름 독창적인 기획안을 무성의하게 구성한 것 같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 내가 작성한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시각예술' 현장평가.    


* 한국현대문학관에 자전거를 몰고 다녀왔는데, 외부 주차장에 자전거를 묶어두고 전시를 둘러보고 나왔더니, 경비원으로 보이는 분이 "왜 임원 주차장에 세웠냐? 저기 세우면 안된다."고 내게 항의했다. "임원 주차장인 걸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냐? 리움미술관 같은데는 아무나 주차장에 자전거 세워도 상관 없다."고 답하자, "여긴 미술관이 아니다. 차를 보면 임원 주차장인 걸 알 수 있지 않냐?"고 다시 따졌다. "차를 보고 어떻게 임원 주차장인 걸 알죠? 그야 경비들은 알 수 있지만, 처음 방문한 사람이 어떻게 임원용 주차장인걸 알 수 있냐고." 따졌다. 자전거 좀 빼달라고 하면 될 일을, 왜 되도 않는 훈계를 하려 드냔 말이다. 




근성과 협동(홍은주 김형재 스튜디오)





김실비 이은우 니콜라스 펠처의 공동기획 전시란다.  김실비의 영상물에 출연자의 예명이 Don Alfonso로 되어 있는데, 이는 두 친구의 여자 애인들의 정조를 시험하자고 제안하는  모차르트 오페라 <코지 판 투테> 속 인물 이름이다. 왜 그 이름을 썼는지 이 작품만으론 알 수 없음. 




+ 부록 


0912(금). OCI 미술관에서 열린 '진경' 오프닝의 뒷풀이.  내 맞은 편 -- 서은애, 유근택.
늦게 도착해서 뒷풀이 따라가는 바람에 2층 전시를 보지 못하고 왔다. 또 가야함.  


0914(토) 바다미술제 참관 때 제공 받은 전형적인 숙소-러브호텔. 내가 묵은 객실 벽면 장식.  
'A secret makes a woman woman' 이런 말은 흔히 들어봤지만, 벽면에 적힌 'A secret woman makes a beautiful.'은 대체 어떻게 해석한담? 











0917(화) 덕소역. 개인전을 1주일 앞두고. 술 산대서 덕소역에 감. 작가의 요구로 2차까지 따라감(난 1차면 족한데). 




0926(목) 금호 전시 오프닝 직후 참여 작가가 한명도 포함되지 않은 우리끼리의 '자체 뒷풀이'. 내 맞은 편에 앉은 학생이 눈치를 전혀 채이지 않게 나와 학생들이 얘기 나누는 모습을 몰래 조용히 찍은 그룹 사진을 보내줬다.






0928(토) 강화도 최경태 작업실. 전어철 끝나기 전에 얼굴 보자는 취지의 사적 미팅. 나는 북유럽술 아콰비트를 챙겨 감. 
  

2013년 9월 26일 목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서울대(씨네21)

* <씨네21>(922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81회분.  '브랜드 시리즈 6탄'  서울대 로고/정문.



샤샤샤 오메르타



좌. 일가친척과 함께 정문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서울대 졸업식의 일반적 풍경
우상. 서울대 정문을 모방한 홍성고등학교 입구 조형물
우하. 서울대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들



흡사 자음 ㅅ과 모음 ㅑ를 닮은 도형 둘을 결합시킨 듯한 육중한 세모꼴 구축물. 공공조형물의 초상을 한 서울대 관악 캠퍼스 정문의 첫인상은 이렇다. 극성맞은 학벌 사회에서 서울대가 누리는 명성과 수혜의 절반 이상은 정문이 뿜어내는 압도적인 아우라에서 온다. 입시생 재학생 졸업생 급기야 학교 밖의 불특정 인사들이 두루 서울대 정문의 아우라의 영향권 아래에 놓인다. 입학식과 졸업식 날 당사자와 일가친척은 필히 정문을 배경 삼아 기념사진을 남긴다. 오만가지 이유로 관악산 입구에 도달했을 외부인들마저 유사한 포즈로 정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조건반사에 가깝다. 

매스미디어 사회에서 얼굴이 알려진 유명인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 보통 사람에게 가보처럼 여겨지듯, 학벌 중심사회에 서울대 정문 촬영 인증은 성지순례의 의식처럼 굳었다. 모든 대학들이 각기 상징물이 갖고 있건만 서울대의 그것이 높은 각인효과를 갖는 이유는 대학 안으로 들어가는/입학하는 입구라는 정문의 중의성 때문일 것이다. 국내 대학들 가운데 최상위 입학 커트라인처럼 서울대 정문은 세모꼴의 정점으로 드높게 치솟은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알쏭달쏭한 정문의 외형은 ‘국립+서울+대학교’의 앞머리 자음 셋 ‘ㄱ+ㅅ+ㄷ’을 조합한 것이다. 얼핏 ‘샤’처럼 보이지만 설마 ‘샤’를 정문으로 썼을 턱이 없으니, 외부인에게 정확히 풀이되지 않는 이 육중한 조형물은 미지의 기호처럼 인식될 법하다.
명품의 가치를 시늉하는 위조품의 난립은 명문대학도 비켜가지 않는다. 대학 입학이 우선 가치가 된 일선 고등학교 가운데 일부는 서울대 정문을 유사하게 재현해서 차라리 표절에 가까울 정도다. 그저 비슷하게 흉내 낸 몰개성한 교문은 스스로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면서 원본(서울대)에게 반사이익을 안긴다.

서울대의 상징 자산 때문에 ‘샤’는 관악산 입구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에 가맹점 개설로 출몰한다. 서울의대 출신자가 개원한 개인 병원은 대학 교표를 병원 유리창에 새겨 넣어, 전국에 산재한 개인 병원 유리창마다 서울대 로고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전국을 서울대 로고로 잇는 시각적인 네트워크는 서울의대 내부의 결사체가 고안한 게 아니라, ‘최고 학벌 = 최고 품질’로 믿어온 외부(환자)의 기대감이 만들어 낸 것이리라. 때문에 전국을 ‘샤’로 연결시키는 결사의 묵계는 마피아의 조직원을 결속시키는 내부 오메르타를 따르지 않고, 외부의 강한 신뢰감으로 유지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

2013년 9월 24일 화요일

0923 히든 카드 ★★☆

 나의 오해로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의 시사회가 금일 열리는 줄 알고- 지금 확인해보니 9월26일(목) 이었음- 건대입구까지 갔다가 허탕을 치고 되돌아왔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공상도 하고 큰소리로 '업무'를 보는 승객을 구경하면서 나름 보람있게 시간을 보냈으니 후회는 없음.  



9월23일(월) 10시30분. 롯데시네마 건대. 브래드 퍼맨 감독 <히든 카드 Runner Runner>(2013) 시사회.

별점: 





북미 개봉은 10월4일 예정인데 비해 국내 개봉은 9월26일로 선수치는 영화. 이런 마케팅은 무슨 전략이지?

올인으로 대박 또는 쪽박이 나거나, '카드 단 한장으로 모든 걸 잃는' 도박판이 영화의 무대여서 현찰 술 여자 반전의 기운 내내 지배한다. 속전속결의 긴박감을 즐긴다면 볼 만 할 거다. 이 영화는 보는 내내 극장 내부가 추워서 집중을 못했다. 아쉽지만 촌평이 이 정도만. 미안.  


* 원제 '러너 러너'는 포커 게임에서 막판에 상황이 역전되는 상황을 말한단다. 
** 긴장어린 삼각관계를 매개하는 여자 배우 젬마 아터튼을 어디서 봤나했더니, <헨젤과 그레텔: 마녀사냥꾼> 시사회로 봤었음. 그때 당시의 분장이 나아보임.   
*** 롯데 시네마 건대에게 부탁. 상영관 내부의 냉방 가동을 부디 자제해달라. 이젠 가을이다. 보는 내내 추워 혼났다 


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양대원 작가론(사비나미술관)

* 양대원 개인전(2013.0925~1030 사비나미술관) 서문으로 쓴 글. 네이버 캐스트 '한국미술 산책' 코너에 이번 개인전이 개최 되기 훨씬 전에 별도로 포스팅 되었다.  



양대원 - 신종 단색조 독백의 회귀


반이정 미술평론가 dogstylist.com



자화상-눈물   Self portrait-tears   148×102cm   2011




위장 무늬처럼
전투복이 취하는 위장 무늬 패턴은 양대원의 작업 전개 양상에 견줄 때 요긴하게 비유될 자격을 갖췄다. <난-벙커315020>(2002)나 <푸른 만찬(의심) 135060>(2006)처럼 그의 작품군 전체를 통틀어서 군복의 위장 무늬가 명시적으로 인용된 횟수는 지극히 적지만, 위장 무늬의 속성은 양대원의 미학과 근친성이 높다. 양대원 작업의 연대기를 추진시킨 일관된 동력으로 나는 크게 셋을 꼽는다. 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은 색을 혼합하지 않고 배색을 통해서 단색(들)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제시된다.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에는 작가의 내면과 분노가 직설법으로 노출되지 않은 채 어딘가 숨은 모양새로 제시되곤 한다(커튼이나 벽면 뒤에 숨은 무수한 동글인들을 떠올려보자).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은 고유한 모노톤 채색으로 각인되어 있다. 위장 무늬 전투복을 착용한 군인처럼, 무언가를 향한 분노 어린 공격성을 그의 그림들은 담고 있는 것 같다. 가면 차림으로 단검을 쥔 동글인의 분노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을까?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부조리한 동시대 정치 사회상을 향한 불평 같기도 하고, 작가가 속한 제도권 미술계의 무사안일에 대한 한탄 같기도 하다. 자객(刺客)을 닮은 동글인은 자연스레 작가가 고안한 자기 분신처럼 보이며, 세상과 작가 사이를 잇는 거의 유일한 대리인처럼 보인다.


2011-2013년 독해
2013년 공개하는 신작은 2011년부터 2012년 프랑스 노르망디 레지던시 체류 기간 그리고 2013년 초까지 햇수로 3년여 준비 기간 동안 완성된 작품으로 구성되었단다. 신작 역시 위장 무늬의 고유한 논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눈에 띠는 변화도 보인다. 대여섯 개의 원색으로 구성된 도안을 닮은 기존의 화면들이 검정 모노톤으로 차분하게 수렴 되었다. 또 분노의 지표였을 동글인의 눈에 고이거나 또는 흘러내리던 표현주의적 눈물 묘사도 완결된 물방울 모양으로 도식화 되어 한 화면에 가득 찼다. 거칠게 요약하면 눈물방울이 신예로 떠올라 전진 배치되면서 종래 작업 연대기에서 가장 활약상이 컸던 가면을 쓴 동글인(들)은 2선으로 물러난 형국이다. 끝으로 양식화된 모노톤 눈물방울 화면은 양대원의 작업 연보에서 시종일관 관찰되었던 자기완결성의 환원주의적 귀결처럼 보인다. 신작이 모노톤 기본 도형들의 변형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양대원 브랜드
양대원의 작품이 손쉽게 각인된 까닭은 그의 브랜드가 이목구비를 갖춘 캐릭터였던 데 있을 것이다. 동글인으로 명명된 캐릭터는 작업 동력의 3요인(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 가운데 분노의 메시지를 위장의 제스처로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그렇지만 이 분노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가면의 사내는 자기 완결성을 지향하는 양대원의 기질과 더러 충돌하는 것 같았다. 동글인 캐릭터의 강인한 인상 탓인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오히려 교란하는 역효과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여건을 따져보면 3가지 창작 동력 가운데 자기 완결성에 대한 작가의 강박은 다른 무엇보다 선행적이고 압도적이다. 자기완결성을 향한 결벽증을 살피기 위해 그림의 기초인 화면부터 보자. 한지와 천을 배접해서 만든 캔버스는 양대원의 자체 제작 시스템의 산물이다. 작업 연대기마다 황토색 질감이 살아있는 배접한 캔버스가 등장하는데, 캔버스를 흙물로 씻어내면서 요철이 있는 표면의 재질감이 생겨난다. 두께나 부피보다 표면의 질감에 강조점이 놓인 캔버스 위로, 불투명한 단색 안료가 그래픽 도안처럼 올라가는데, 은은한 황토색 재질감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과는 다른 변별력이 유지된다. 원형(circle)같은 도형들을 변형시킨 기본 단위들로 구성된 양대원의 화면은 기본 단위인 그리드(grid)를 무한히 변형시켜서 화면을 채워나간 몬드리안의 자기 완결적 화술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가 외계에서 차용하는 아이디어도 자기완결성에 대한 그의 편집증을 느끼게 한다. 그가 작업의 모티프로 화면 위로 불러오는 것은 성경의 구절, 고전 회화의 도상, 고증적 가치가 높은 한자(漢字) 따위다. 이미 검증받은 대상을 모티프로 불러온 것이다. 그의 그림은 선명한 의중을 담고 있지만, 작품 해설을 접하기 전까지 내용 파악이 더딘 까닭은 자기 완결성을 위해 화면 위로 조형적 긴장감이 내용을 압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기성 문자의 모양새를 따라서 만든 글자 조합이 판독하기에는 너무 도안에 가깝기 때문이다(작품 해설을 접한 후에조차 <가라사대Ⅰ613040>(2004)에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찾아내긴 간단하지 않으며, <Love>(2013)에서 알파벳 Love를 찾아내기도 매한가지로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자의식이 강한 자체 제작된 화면 위로, 분신에 가까운 인물 캐릭터가 출몰하는데 이들의 존재가 표면 위에 남겨지는 방식은 붓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결벽증적인 마감을 따른다. 가까이서 표면을 확인해도 기계적인 작도의 흔적만 관찰될 뿐이다. 구상 단계부터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양대원은 미학적 청교도주의에 지배된 듯이 보인다.

 애(愛)   Love   54×44cm   2012



합(合)   Combine   148×110cm   2013



삼위일체(분노, 위장, 자기완결성)
작업 연대기에 일관되게 관찰되는 세 가지 단서(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의 시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외부 세계를 향한 작가의 분노나 그것을 표출하는 과정에 위장을 개입시킨 건 자기 완결성의 파생적 결과로 보인다. 자기 완결성을 향한 강박은 이미 5회 공산미술제 공모에 당선되었던 1996년경 작업(당선작 발표는 1996년에, 수상작가의 개인전 개최는 1998년에 성사된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수상작가 양대원의 작업 과정을 ‘농사’에 비유한 김학량(당시 동아갤러리 큐레이터)은 “그(양대원)가 세상과 자기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거의 종교적...(중략)...조형적으로는 장인적 수공성이라는 전통적 미덕”이 그림 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집요한 수공적 가치를 고수하는 작가적 외골수는 자기애의 분신처럼 보이는 가면 캐릭터로 제시된다. 이 가면 캐릭터는 세상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고립된(마치 서울 중심지로부터 대략 40km 가량 떨어진 변방, 덕소에서 20여년을 살고 있는 작가의 거주 환경처럼) 그의 심신을 방어하고 대변하는 분신처럼 보인다. 그 때문일까, 뿌리 깊은 허무주의와 절대적 해법을 향한 무익한 소신이 뒤엉킨 양대원의 세계관은 조형적으로 빈틈없이 꽉 찬 화면과 그 위로 변검(變瞼)을 닮은 가면 캐릭터의 자객(刺客)들이 형성하는 긴장감과 등가를 이룬다. 세속을 향한 그의 불신이 자기 세계관과 자기애를 강화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때문인지 작품 연보를 통틀어 인식 불가한 형상이나 가면을 쓴 캐릭터에 ‘자화상’의 타이틀을 단 작품들은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 중 어떤 것은 숫제 자기애에 빠진 신화, 나르시스를 차용하기도 했다(<의심-자화상(나르시시즘)823090>(2009)).

 의심-나르시시즘, 2009

 의심-노란 계단501090_광목천에 한지, 아교, 아크릴 물감, 토분, 커피, 린시드유_150×149cm_2009

 푸른 운동회Ⅴ(가라사대) 034050_광목천에 한지, 아교, 토분, 커피, 올리브유, 아크릴채색_180×215cm_2005


 검은 눈물   Black tears   77×49cm   2011



신작(2011-2013) 해석
양대원의 오랜 브랜드, 동글인 캐릭터가 그간의 작업 연보에서 보여준 요란한 시위와 선명하고 원색적인 호소가 잠잠히 자제된 채, 검정 모노크롬으로 귀결한 이번 신작은 양대원의 내면을 깊이 지배하는 절대적 관념가치와 자기완결성을 향한 관성을 감안할 때 예상 가능한 결론처럼 보인다. 기본 도형을 무수히 변형시켜서 화면 위로 확장해온 그의 오랜 미학적 반복은, 그리드(grid)의 반복으로 회화 언어를 재구성한 몬드리안을 연상할 만하다. 결국 그의 신작은 검정 모노톤으로 마감된 절대주의(Suprematism)의 조형 문법과 근접거리에 놓였다. 원형(circle)의 변형으로 해석될 눈물방울의 전면 배치나, 화면의 전체 프레임을 정사각형(square)에 귀결시킨 여러 작품의 구성이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난 작업이 담아온 분노와 메시지가 사라졌을 턱은 없어서, 화면 위로 작은 단서처럼 남아 있다. 비록 순수 조형이라는 궁극 목표를 지향한 서구의 절대주의와 양대원의 출발선은 서로 달랐어도, 가면 캐릭터와 동글인이 화면에서 축소되고 분노가 눈물방울로 양식화된 것은 작가의 미적 비중이 자기완결성과 새로운 회화 존재론에 대한 고민에 놓여있어서 일 것이다.


모노크롬 모놀로그의 의미
새로운 회화론에 대한 고민은 지난 작업부터 일관된 창작의 추진 동력으로 보인다. 초기 작업에서 시도된 문자와 이미지를 통합시킨 작업들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근작에도 다시 발견되고 있다. <가라사대Ⅰ613040>(2004)에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구성하는 무수한 동글인의 조합처럼, 무수한 문자 실험을 한 <랭귀지 스터디>(2012) 연작이나 <아모르1 Amour1>(2013) <애(愛) Love>(2012) 등은 기하학적 도형의 조합으로 한자를 표상하지만 단번에 식별하기 어렵다. 의미를 내포하면서 장식적 가치도 병행하는 도안처럼 제시된 탓이다. 이전 작업이 그러했듯 메시지의 전달보다 도안의 자기완결성이 한결 중시된 작업인 것이다. 알파벳 문자의 의미 전달 기능을 조형 단위로 용도 변경한 파울 클레처럼. 첫 개인전을 발표한 1991년부터 2013년 사비나 미술관 개인전까지 양대원의 개인전 발표 주기는 해를 거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꾸준한 독백의 연대기는 금년 단색조 독백으로 한 차례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한국의 지난 화단사에는 서구 모노크롬을 흉내 낸 긴 계보가 있고 오랜 헤게모니를 쥐기도 했다. 그러나 미적 독창성은 줄곧 의심 받아온 권위였다. 반면 지난 시절 국내 모노크롬 화단의 계보와는 무관하게 양대원이 독자적인 회화 시험을 통해 일견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비슷한 조형적 귀결에 도달한 건 고유한 성과로 보인다. 그것이 단순한 형식 실험의 결과가 아니라 작가 내면의 분노와 자기완결성에 대한 강박이 착종된 귀결인 만큼 더더욱.



2013년 9월 18일 수요일

에코백 - 미술 전시 단골 기념품

본적이 서울이어서 나는 '민족 대이동'이 뭔지 모른 채 살아왔다. 심지어 긴 설연휴와 추석연휴 기간이 몹시 따분할 뿐 아니라, 매장들이 대개 영업을 안하기 때문에 성가시기 까지한데, 이틈을 타 거실 한켠에 무질서하게 쌓인 짐 정리를 하기로 했다.

올해 광주 디자인비엔날레와 부산 바다미술제 방문때 받아온, '행사 로고가 인쇄된' 에코백(통상 이렇게들 부르는 것 같다)을 포함해서, 대형 미술행사나 이름난 미술관 전시 개막 때 하객에게 나눠준 에코백들이 수두룩하게 쌓인 걸 확인했다. 연전에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냥 줘버린 에코백까지 치면 이제까지 받은 에코백의 양은 훨씬 많을 터이다. 

어느덧 큰 미술 행사나 미술관이 전시를 개막할 때 배부하는 단골 기념품은 '에코백' + 'USB' + '티셔츠'로 통일되고 있다. 
전달되는 형식은 '전시 출품작 이미지와 자료'를 저장한 'USB'와 두툼한 '도록'을 '에코백'에 담아 하객에게 선물하는 식. 


실상 내가 사용하는 기념품은 => 2010년 부산비엔날레 에코백 + 서교난장 에코백 + 리움 아트스펙트럼 티셔츠 


나머지 에코백들은 처분해야할 것 같다. 
미술전시의 통일된 기념품, 이제는 좀 새로운 걸로 바꿔주세요.


2013년 9월 17일 화요일

0916 애프터 루시아 ★★☆ 0917 블루 재스민 ★★★☆

* 몇달 전부터 시사회 일정을 받아보면서, 챙기는 나만의 버릇이 있다. 관람이 낭패로 느껴질 때가 속출하면서 시사 영화에 대한 해외 평가를 사전에 검색해서 고득점 순으로 관람 리스트를 짜는 거다. 금주 시사회 상영작 중 해외 비평사이트에서 고득점을 받은 영화는 <애프터 루시아>와 <블루 재스민> 두편이었다. 그래서 양일간 한편 씩 봤다. 멕시코 영화 <애프터 루시아>는 내 기대에서 벗어났고, 우디 앨런 신작 <블루 재스민>은 배우의 연기력과 기본적으로 코미디 드라마에 기초한 쉴틈없는 플롯 때문에 보는 재미는 솔솔해서 관람은 권할 만하지만, 나는 ★★★☆ 주련다. 




9월16일(월) 16시30분. 용산CGV. 미셸 프랑코 감독 <애프터 루시아 After Lucia>(2012) 시사회.

별점: 


 사건의 발단은 '전적으로 현대적 애정행각'(!)이 낳은 해프닝이지만, 약물 복용(마리화나)이 보편화된 멕시코 청소년 문화도 또 하나의 사건 전개의 빌미로 쓰인다. 영화에서 청소년들이 피는 마리화나가 연상시킨 점도 있지만, 나는 멕시코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멕시코 마약전쟁'이 떠올랐다. 멕시코 마약전쟁은 여전히 종결되지 않고 진행 중인 마약조직들 사이에서, 혹은 조직과 정부 사이에서 무력 충돌로 드러나는 멕시코의 긴급 사태다. 마약전쟁에서 조직들이 과시하는 보복의 결과는 너무 처참한데 그 얘긴 여기까지만.

<애프터 루시아>의 변별점을 두 개 들라 하면,  1. 영화의 이야기 전개를 모두 고정 카메라로 담고있다는 점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핸드 헬드나 크랭크 카메라가 한번도 없었던 거 같다. 고정 시점으로 무릇 분별없는 청소년기의 분방함을 담아내는데, 침잠된 화면에 담긴 청소년들의 집단 따돌림 행각은 훨씬 충격적으로 인지된다.   2. 한국과 남미 사이에 놓은 문화적 격차에 대한 간접 체험. 모든 영화가 국가간 문화 격차를 간접 체험시켜주겠지만, <애프터 루시아>가 포커스를 맞춘 주제가 하필 약물과 청소년들의 연애에 맞춰졌기에, 상이한 문화적 정서를 훨씬 실감하게 된다. 
수리 받은 차를 길에 버리고 주인공이 차를 떠나는 영화 도입부, 그 주인공이 일을 때려치는 상황에 대한 간접적인 설명도 없는 점, 그의 아내 루시아의 죽음 이후 전개되는 그와 딸의 생활이 이야기의 중심일 거라 믿으며 봤지만, 딸 알레한드라의 따돌림에 스토리의 거의 전부가 할애된 점, 모호하게 종결되는 마지막 장면은 영화의 쟁점을 오리무중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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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17일(화) 10시30분. 롯데시네마 에비뉴엘. 우디 앨런 감독 <블루 재스민 Blue Jasmine>(2013) 시사회.

별점: 






재즈(블루문), 우울증, 뉴욕. 우디 앨런의 신작. 
파국을 맞아 천국과 지옥 사이에 우울하게 낀 여성의 절망을 코미디가 뒤엉킨 허구적 이야기로 마무리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블루 재스민>의 마무리 장면은 아쉽고 싱겁다. 국외에서 쏟아진 이 영화에 대한 찬사는 거의 전적으로 상호 극단적인 캐릭터로 설정된 배우 서넛의 연기력의 덕일 것이다. 영화를 호의적으로 기억하게 만드는 가장 큰 공로는 언제나 배우(연기력)의 몫이니까. 영화가 전개 되면서 출연하는 능청맞은 캐릭터, 천박한 하류인생의 캐릭터, 허세에 찬 캐릭터를 연기력으로 섬세하게 구분시키는 연출은 계급 격차를 우습게 극명화시키기 때문에 관람의 만족도도 함께 높인다. 우디 앨런의 전작들의 가치가 (연출자 외에)연기자로서 우디 앨런이 영화에 기여하는 비중이 컸을 것이다. <블루 재스민>은 우디 앨런이 전적으로 연출자로 역할로 한정될 때의 영화 미감을 보여준다. 


* 억울하게 종결된 지난 과거사의 상처로 인해 혼잣말을 중얼대는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을 보면서 남모를 공감을 느꼈다.

* 영화에서 거짓 허세를 부리던 재스민이 새로 생긴 애인의 말에 응수하면서 한 대사.
    "뭔가 완벽할 땐 느낌으로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