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30일 수요일

“부탁이니, 과잉 친절 행정은 제발 멈춰주세요” (한겨레 HOOK)

* 한겨레 오피니언사이트 '훅 Hook'에 무려 지난 3월 올려진 원고.  왜 이렇게 늦게 포스팅 하냐면 원고를 보낸 후 HOOK에 원고가 올라오질 않기에 원고 담당자가 등록하는 까먹었다고 믿어서, 달리 항의하지 않고 나도 잊고 있었다. 그래서 최근 다른 매체에서 청탁이 들어와서 '묵혀둔' 원고를 보내려고 했는데, 검색을 해보니 원고가 덜컥 등록 되어있지 뭔가! 원고 주기로 한 매체를 위해 완전 새 원고를 열심히 구상해야할 판.



“부탁이니, 과잉 친절 행정은 제발 멈춰주세요”


 반이정 | 2013.03.15 



오늘 하루도 힘차고 즐겁게 SMILE~ ^-^ 파이팅하세요! – SKT 아무개 :) “

휴대전화 정비 받을 일이 생겨서 방문한 통신사 고객 센터에서 접수 업무를 맡은 직원 아무개가 그 날 저녁과 다음날 아침 총 2회 내게 보낸 문자다. 정비를 무사히 마치고 나설 때 그 직원은 고객평가 전화가 걸려오면 잘 부탁드린다는 부탁을 덧붙였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부탁을 애써 하지 않아도, 그리고 안부를 묻는 요식적인 문자를 2차례 발송하지 않았어도, 그 직원이 접수 과정에서 보인 친절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충분했다. 아마 고객 평가를 민감하게 수용하도록 조성한 사내 분위기 때문에 전 사원이 방문객 전원에게 유사한 부탁을 하거나 과잉 친절을 베푸는 것 같았다. 고객센터를 미소와 친절로 충만하게 하겠다는 사측의 의지를 탓할 순 없다. 그렇지만 정해진 업무 이상의 웃음 봉사를 추가로 강요하는 게, 서비스업 직종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일반 상식은 별개로 하더라도, 업무에 대한 정확한 수행 이상을 베푸는 게 관행이 되면, 방문객 가운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은 괜한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이른바 진상고객 행세까지 정당하다고 믿는다.

선한 의도를 표방하는 서비스는 효과야 어떻건 전파력을 타고 확산된다. KTX 객차 안에서도 과잉친절은 목격된다. 객차 사이를 오갈 때 통로를 이동하는 승무원들은 문을 여닫을 때마다 객실을 향해 몸을 돌려 허리 굽혀 인사를 한다. 이런 불필요한 요식이 왜 있어야할까? 무수한 승무원의 머리 숙인 인사는 받는 사람처지에서도 부담스럽다. 좌석에 앉아 자거나 떠들기 바쁘거나 생각에 잠겨 승무원의 인사를 의식할 틈조차 없는 승객이 태반인데, 왜 승무원에게 이런 예절 교육을 시킬까. 여승무원에게 뭔가 문의라도 하면, 여승무원은 예외 없이 무릎을 꿇어 낮은 자세로 고객의 말을 청취하는 ‘패밀리 레스토랑 굴종 모드’로 변신하더라. 더 황당했던 건 같은 상황에서 남자 직원은 선채로 답변하더라는 것. 듣자하니 일본의 기차에서도 유사한 직원 예절을 볼 수 있다던데, 이런 과잉 친절까지 일본을 벤치마킹했어야 할까. 의도가 선한 고약한 서비스는 폭넓게 감염되고, 이런 비정상을 공동체가 자연스런 정상으로 수용하고 만다. 맘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연출된 전시용 친절이다.

과잉친절의 민폐는 공기관도 둘째라면 서럽다. 내가 사는 관악구는 길가에 물을 살포하는 물청소 차량이 주택가에 들어서면서 ‘물청소 차량이 지나가니 양해해 달라’는 내용의 안내방송을 트는데, 다가오는 차량을 쳐다보기만 해도 뭘 하는지 명백히 알 수 있는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그 상황을 높은 데시벨의 안내 방송으로 반복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을 바보로 아는 건가? 봄철이 찾아왔으니 한동안 고요했던 이 동네에 또다시 불필요한 소음 립서비스가 시작될지도 모른다.

지하철역(5678 서울 도시철도) 승강장에 서있던 중, 지하철 안내 방송에서 ‘신청곡을 주문하면 틀어준다’는 내용이 나오는 걸 들었다. 이 과도한 친절 행위는 또 뭔가 싶어서 검색하니 서울도시철도가 운영하는 스마트보이스 방송이란 데가 있다는데, 아침 정오 저녁 무렵 각각 시간을 정해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단다. 대체 이런 기상천외한 발상은 또 누구 머리에서 나오는 걸까. 승강장 대합실, 통로 등에서 모든 승객에게 방송 청취를 강요하는 발상부터가, 요즘처럼 음악 청취나 정보 취득을 개인 미디어로 해결할 수 없었던 구시대 대중교통 문화에나 어울릴 발상이다. 아마도 서울도시철도의 무슨 회의석상에서 누군가가 묘안이라 굳게 믿고 내놓았을 것이고, 취지가 나쁘지 않으나 그 누구도 반대하지 못해서 시행된 게 아닐까. 취지만 선하면 효과야 유명무실해도 일단 세금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친절 행정’의 핵심이고 전염성이다.

서울도시철도의 스마트보이스 운영에 관해 공중파 방송이 취재한 내용을 보니, 신청곡을 들을 수 있고 지하철 민원을 처리해줘서 자주 듣는다는 어떤 승객의 인터뷰를 내보내더라. 목적지까지 이동하는 동안마저 승강장이 음악다방 같은 분위기로 탈바꿈 해주길 바라는 남다른 취향의 어떤 승객이 있을 줄로 안다. 그렇지만 그 반대편에 다만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주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목적지까지 이동하고 싶은 어떤 승객도 있다. 전시 행정의 산물인 라디오 방송을 서울도시철도가 향후에도 강행한다면, 내가 그것까지 말릴 순 없다. 다만 처음의 선의를 유지할 의사가 있다면 지하철 라디오 방송을 듣고 싶은 청취자만 선택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해야 옳다. 지금은 스마트 시대다.

5678 서울철도께.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좀 해주세요.

2013년 10월 28일 월요일

1028 시사회장 갔다가 완전 물먹음.....어찌 이런 일이.

G드래곤 주연의 <원 오브 어 카인드 3D>가 시사회 일정 메일에 포함되어 있길래 관심이 가서 오후에 메가박스 코엑스를 갔다. 근래 열리는 대부분의 시사회는 보통 왕십리CGV, 건대 롯데시네마, 용산CGV 등에 집중된 반면, 강남지역의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언론 시사회가 열리는 경우는 극히 적다. 

한데 시사회 입장권을 나눠주는 부스의 직원이 "사전 취재 신청을 하지 않아서 안된다."고 완강하게 버티네. 세상이 어찌 이런 일이.... 나는 사전 신청 공지를 받질 못했다고 말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시사회 일정 가운데 맘에 드는 극장에서 표를 받아서 보는 게 시사회 관람의 통례이지 사전 신청을 해야하는 경우는 적다. 더구나 이 영화의 경우 사전 신청에 관한 얘길 들은 적도 없었다. 관계자는 취재올 시사 참관자 명단까지 내게 보여주더라. 

어이없이 귀가해서 시사회 메일 담당자에게 문의를 했더니, 자기도 몰랐는데 내 메일 받고서 지난 정보들을 찾아보니 사전신청 시사회라가 맞았는데, 그걸 깜박 잊고 알려주질 못했단다. 시사회 부스 직원의 잘못은 아닌거다. 그래도 여전히 아쉬운 건, 시사회 참석 펑크낼 사람도 아마 생길 테고, 내가 간 시간이 시사회 시작 4분 전인데, 꼭 그렇게 융통성없이 꽉 막히게 일 처리해서 멀리서 온 사람 돌려보내야 정석을 지키는 거냔 말이다. 아무튼 김샜음. 




시사회장으로 가기 전에 신림역에서 GD가 모델로 나오는 화장품 광고 보면서 "곧 널 볼거다" 하면서 갔는데 완전 물먹었음.



계보학 + 영향관계

90년대초 중반 무렵 친구의 영향으로 재즈에 주목했었다. 우연히 1994년은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몬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주연 차인표가 섹소폰을 연주하는 장면이 전파를 타면서 전국의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드라마가 한국 사회에 대중적인 재즈 유행을 확산시킨 본의 아닌 계기로 해석되기도 했다. 당시 나는 명반으로 분류된 재즈 음반도 중고로 사모았고 드물게 재즈 콘서트에 혼자 찾아가기도 했다. 한참 지난 일인 데다가 이젠 재즈를 애써 찾아듣지 않게 된 사정으로, 잊고 지낸 개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그 당시 복잡한 재즈의 유형과 계통을 손쉽게 조감하고 싶은 마음에, 부족한 국내 자료를 토대로 '재즈 계보'를 손으로 직접 작성한 적이 있다. 그 재즈 계보를 손수 작성한 곳은 군대였다. 당시 내가 군복무중이어서. 그 자료는 가령 '랙타임   블루스 → 뉴올리언 재즈   스윙   비밥   쿨   하드밥   프리   퓨전' 이런 식으로 재즈의 개별 유형의 전개를 개념과 해설로 정리하고, 각 유형별로 연관된 연주자와 연주곡을 기재한 수기 형식의 자료였다. 지금 그 자료가 어디 있는진 모르지만. 

90년대 초반 같은 친구의 영향과 개인적인 선호로 인해, 헤비메탈에도 몹시 몰입했는데 내가 소장한 음반의 거의 대부분이 그 무렵 구입한 것이다(엮인글). 재즈 계보를 작성한 관심사처럼  헤비메탈의 다양한 유형과 계보학에도 관심이 커서 헤비메탈을 중심에 놓았을 때 전후로 어떤 음악적 선대와 후대가 있는지 부족한 자료에 의존해서 음반을 수집했다. 다양한 펑크락 밴드들, 벨벳 언더그라운드, 제퍼슨 에어플레인, 프랭크 자파 그리고 재즈까지 모두 거미줄처럼 엉킨 록의 맥락을 짚던 중 발견하고 구입해서 들은 음악이다. 수집한 음반 가운데에는 세간에선 신화니 명반이니 하는 상찬을 받았지만 내 취향에는 전혀 맞질 않았던 음반도 많았다. 레드 제플린과 딥퍼플처럼 전설로 분류된 원조 하드락 밴드는 거의 모든 음반을 갖고 있지만 좋은 점을 내가 발견하지 못한 경우. 

이제는 온라인에 무료 자료가 산적한 시대가 와서 계보학과 영향관계를 파악하기에 너무 손쉬워졌다. 심지어 희귀 명반으로 분류 되어 고가에 어렵게 구입했던 거의 모든 아트록 음반이 수록된 전부를 통째로 유튜브에서 찾을 수 있는 시대다. 
유능한 개별 아티스트의 기량에 집중하기보다, 영향 관계가 형성한 계보를 따지고 주제별로 유형화 시키는 데에 훨씬 관심을 집중시킨 과거 기억이다. 이런 취향은 현재 미술을 대할 때에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2013년 10월 26일 토요일

1025 잉투기 ★★★★★

10월25일(금) 16시30분. 대한극장. 엄태화 감독 <잉투기 Ingtoogi>(2013) 시사회.  

별점: ★★









완전 새롭다. 반갑고 즐겁다. 
영화를 보면서 '김장훈을 닮은' 엄태구에게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의 류승범과 류승완이 떠올랐고, 가느다란 눈매의 류혜영을 보면서 내내 <여고괴담 2>(1999)의 공효진이 떠올랐다. 긴다리의 류혜영은 완전 미녀는 아니지만 묘한 섹스 어필을 표정과 인체에 담고 있다. 앞선 두 영화 모두 당시로선 새로운 영화실험을 감행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었다. 뒤늦게 생각이 난 건 <잉투기>의 감독과 주연배우가 형제인 점까지 류승완 류승범 케이스와 닮았더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 첫화면 크레딧을 봤을땐, 또 무슨 식상한 사연을 인용하려 드나....했는데, 예상 벗어났음.
시나리오 탄탄하고, 화면의 시각적인 전환도 스토리와 동기화되어 감각적이고 경쾌하되 진부하지 않다. 무엇보다 현시대를 지배하는 감각과 정서를 화면과 플롯으로 능숙하게 구현한 점 때문에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또 다른 장점은 뉴페이스의 등장이다. 출연진 모두의 연기력이 식상한 프레임에서 벗어나 있다. 주연이건 조연이건 가릴 것 없이 연기력이 전부 출중하다. (내가 너무도 혐오하는) 감정 과잉의 연기를 하지 않고도 흥분된 상황을 재현한다. 뉴페이스는 아니지만 <어떤 시선>에서 엄마로 출연한 중견 연기자 길해연도 <잉투기>에서 만날 수 있다. 흔히 오바액션으로 빠지기 쉬운 격투기 원장 역의 김준배도 절제된 감정과 쌈마이 기질을 균형있게 조화시켜 자기 연기에 입혔다. 김준배의 연령를 확인하곤 깜놀(나랑 사실상 동갑. 내가 과도하게 동안임).

<잉투기>의 또 다른 매력은 젊은 하류 인생의 표정이, 그들의 뒷배경으로 나오는 서울 변두리 가옥들로 간접 서술된다는 점. 그것이 연출자의 의도건 아니건 나름 세련됐다. 또 실시간 소통 시대의 정서가 화면에서 덧글문화로 투영하는데, 이 방식도 경쾌한 편집을 따라서 한편으론 신기하고 한편으론 감정이입이 된다. 류혜영이 여고생 출연하는 여고 교실 장면도 신랄하다.    


이제껏 ★점을 다섯개 준 적이 <마지막 사중주> 딱 한번 있었는데(엮인글), <잉투기>도 ★점 다섯개 받을 자격있음. 전체적인 완성도는 4개반 정도. 그렇지만 출중한 신예의 제시, 영화 패러다임 전환. 또 모든 면에서 새롭다는 점 때문에. 

2013년 10월 25일 금요일

뭉크 탄생 150주년 기념전-뭉크미술관+국립미술관 리뷰 (문화공간 11월)

* 노르웨이 현지에서 올해 열린 뭉크 탄생 150주년 기념전시 Munch 150에 관한 리뷰. 
세종문화회관에서 간행되는 <문화공간>(11월호)에 기고한 원고. 


반복된 모티프와 뭉크 탄생 150년




반이정 미술평론가 

오슬로 공항에는 지난 10월까지 노란 바탕에 검정색으로 Munch 150이 적힌 초대형 배너가 걸려있었다.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입국자들은 이 큰 배너를 바라보며 노르웨이로 들어왔다. Munch 150이란 노르웨이 태생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탄생 150주년을 뜻하는 약자로, 뭉크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Munch 150란 명칭 아래에 기획되었다. Munch 150의 홍보는 노르웨이 전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울 도심에서도 드물게 관찰될 만큼, 뭉크 탄생 기념행사는 올해 노르웨이가 주력을 쏟은 문화상품이다.

 뭉크는 반 고흐(네덜란드)와 나란히 현대미술사의 초석이 된 북유럽 태생의 양대 화가일 텐데, 반 고흐가 전성기를 프랑스에서 보낸데 반해, 미학적 성장과 여생의 많은 세월을 고국에서 보낸 뭉크는 노르웨이와 지연적 관련이 훨씬 깊다. 뭉크는 가히 노르웨이의 국보급 현대미술가인 것이다. Munch 150 행사의 정점은 단연 뭉크미술관과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이다. 뭉크의 작품 연대기는 초기 작업(1882-1903)을 전시한 국립미술관과 후기작업(1904-1944)을 모아놓은 뭉크미술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뭉크의 초기 작업에선 뭉크다운 표현주의가 아닌 북유럽 인물화 전통의 영향이 깊이 밴 1882년 자화상도 볼 수 있다. 한편 <생의 프리즈> 연작은 과거 전시 되었던 당시의 작품 진열 순서를 그대로 재연하기도 했다. 5개월 넘는 긴 기간 동안 250여점의 작품으로 뭉크를 포괄하는 이 대형 전시회에서 어떤 관전 포인트를 찾아야 할까?

동시대를 함께 산 반 고흐와 뭉크 사이의 유사점은 정규예술교육의 수혜를 받지 않고, 사실상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경력이리라. 유수의 유럽 미술관들을 순방하며 거장들의 작품을 따라 그렸던 반 고흐처럼 뭉크 역시 앤트워프 파리 니스 베를린 코펜하겐을 방문하면서 유럽미술의 선배와 동시대 예술가들의 미학적 흐름을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간접 학습의 길을 열었다. 덕분에 뭉크의 화풍에서 사실주의 표현주의 점묘주의 종합주의가 두루 관찰되는 건, 특정 유파에 예속되지 않았던 배경 때문일 것이다. 반 고흐가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와 물감을 두텁게 올리는 몽티셀리의 임패스토를 수용해서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킨 것처럼, 세기말에 유행한 미학 실험을 두루 섭렵한 뭉크도 독자적인 주제와 양식을 수립할 수 있었을 게다.

지난 2012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뭉크의 <절규>가 매물로 나와 1억1992만2500달러(1355억원)에 낙찰되면서 역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깼다. 인구에 회자된 당시의 매물 <절규>는 우리가 익히 봐온 <절규>(1893)보다 2년 뒤 제작된 파스텔버전이다. <절규>는 현재 다양한 버전이 남아있다. 가파른 사선구도에 유기적인 빨간색과 파란색 곡선으로 화면의 상하를 구분한 ‘절규의 구도’의 효시는 <절규> 이전에 이미 제작되었으며, ‘절규의 구도’는 이후 여러 변형작을 낳았다. <절망>(1892)이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절규의 구도’의 맹아 쯤 되는 작품으로 <절규> 이전에 그려졌다. ‘절규의 구도’는 후일 여러 제목으로 반복되어 차용되었다. 그 중 <불안>(1894) <다리 위의 소녀들>(1901) <니체의 초상>(1905)처럼 ‘절규의 구도’를 쓰되 등장인물만 교체하면서 <절규>를 계승한 작품은 퍽 많다.

같은 모티프의 반복은 비단 <절규>만의 것이 아니다. 뭉크의 연대기를 다각도로 볼 수 있었던 Munch 150 전시에 따르면, 뭉크는 그가 애착을 보인 모티프를 평생 반복해서 채택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사춘기> <마돈나> <키스> <뱀파이어> <성스러운 어둔 밤> <여성의 세 시기> <병든 아이> 등은 모두 여러 변형을 낳은 그의 단골 주제들이다. 뭉크가 반복적으로 다룬 건 비단 작품의 주제 뿐 아니라, 수면 위에 막대처럼 길게 늘어진 달빛처럼 형식상의 패턴도 많다. 그는 그가 애착을 보인 패턴에 몰두했다. 

모티프의 반복은 뭉크에게 어떤 성취감을 되돌려줄까? 동일한 모티프의 노출빈도가 잦을수록 그 모티프는 화가의 브랜드로 굳기 쉽다. 다리 난간의 역동적인 사선과 대기의 불안정한 유선형이 서로 부딪히는 <절규>의 구도를 전적으로 뭉크만의 것이라고 우길 순 없겠지만, 그 모티프가 반복되면 결국 그 불안정한 구도는 뭉크의 고유 브랜드로 굳는다.
뭉크 탄생 150주년 회고전을 관람하러 오슬로에 집결한 세계 각지의 관람객 행렬, 즉 근대 초기 거물 화가를 향한 동시대인의 집중된 수요를 보노라니, 현대미술이 처한 자기 고립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동시대인이 근대 초 화가에게 빠져드는 까닭은 뭉크가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올린 모티프들이 그림의 명시적인 주제야 뭐건, 일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본능의 희로애락과 연관되어 선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불안과 죽음을 지목한 뭉크의 그림에서조차 대체로 에로티즘이 묻어있다.















2013년 10월 24일 목요일

1023 중거리 주행으로 회복

원고 스트레스로 애간장을 태운 직후(엮인글). 
10월23일(수) 작은 바퀴 자전거 브롬톤을 몰고 '미성동 → 청담동 → 옥수동 → 서울역 → 보라매동 → 미성동'을 돌았다. 
스트레스가 풀렸음. 서울역에선 며칠 전부터 꽂힌 배상면주가의 '느린마을막걸리'를 포함해서 막걸리 5병과 세븐에일 2캔을 사다가 베낭에 짊어지고 집까지 달렸다(베낭에는 이미 카메라와 노트 및 자료가 추가로 있어서 매우 빵빵하게 찼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 막걸리 1병이 모자라는데, 보라매동에서 한주하의 커피볶는집에 원두를 살때 1병 기증해서 없는 거다.
네이버맵에서 직선 거리로 쟀을 때 45km 나오는데 내가 볼때 50km는 뛴거 같다. 




2013년 10월 23일 수요일

도망가고 싶은 심정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능하다면. 
원고가 안 풀릴 때는 더러 있는 법이지만, 이번처럼 자포자기 상태에 빠질 만큼 스스로 위축된 건 수년 만이다.  
내심 자신있는 주제라 믿고 너무 늦게 착수한 게 패착이었다. 조바심의 부메랑으로 돌아왔으니까. 
한번 다급해지자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까봐 내내 조바심으로 속이 탓고, 진심으로 달아나고 싶었다. 근데 그게 어디 가능한가.

자기 실망감 때문에 어제밤을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영화 시사회를 보러나갔다가(영화가 별로여서 보다가 중간에 나왔다), 다시 대학 도서관에 들러 밤11시까지만 원고를 마치면 무조건 집까지 걸어서 간다고 다짐했다.
결국 밤 9시를 조금 넘겨서 미흡하게 원고의 끝을 봤고, 보상 차원이 아니라 벌주기 차원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차로 지나갈때 구경만 했던 도림천 길을 따라 걸었다. 
자전거로 20분이 걸리는 거리여서 도보로 1시간을 넘으리라 예상했는데, 딱 1시간 걸리더라. 내 걸음 속도가 좀 빠르지.



1017 어떤 시선 1022 녹색의자 2013

10월17일(목)  민용근 이상철 신아가 박정범 감독 <어떤 시선 If You Were Me>(2013). 

별점: 


시사회 극장이 갑자기 변경 되었는데, 공지를 받지 못해서 엉뚱한 극장에 찾아갔다가 헛탕친 영화. 하지만 이후 다른 경로를 통해 영화를 봤다. <어떤 시선>은 3편의 단편로 구성되어 있다. 
<두한에게>는 보는 내내 배우를 어떻게 섭외했는지 궁금했는데, 출연진이 모두 연기 초보자라고 한다. 즐거웠음.  
개중 가장 맘에 든 건 <얼음강>. 세 작품 가운데 연기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아서인 듯. 

영화를 보다가 알게 된 경악할 만한 반인권적 사실. 이 인권 영화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제작을 맡는데, 제작자 이름에 현병철이 떠서 진짜 경악. 관람 직후 확인한 결과 그 반인권적 인사는 여전히 위원장 자리를 연임까지 해서 현직에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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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2일(화) 16시30분. 왕십리CGV. 박철수 감독 <녹색의자2013-러브 컨셉츄얼리>(2013) 시사회.

별점: 보류



영화 시사회 참관 초유로 관람 중도에 밖으로 나온 영화다. 과거사를 떠올리면서 예술의 가치를 품평하는 건 낡은 태도지만, 고인이 된 박철수 감독은 <학생부군신위> 때문에 좋은 인상이 남은 감독이었다. 장례식을 주제로 삼은 두 편의 영화-임권택의 <축제>와 박철수의 <학생부군신위>-가 우연히 같은 해(1996)에 개봉해서 비교 될 수밖에 없었는데, 나는 박철수에게 훨씬 높은 평점을 준 터라 박철수에 대한 인상은 남달랐다. <301 302>도 나쁘지 않았고.  

40분 정도 보다가 박차고 나온 <녹색의자 2013>은 박철수 감독의 전작 <녹색의자>(2003)의 후속편 쯤 되는 유작인 듯하다. 유작의 지위에 어울리지 않게 시사회 중도에 자리에서 일어날 만큼 품질은 기대할 수 없다. 미술에 대한 무분별한 몰이해가 반영된 배우들의 대사들은 오그라들 지경이다. 

19세 미성년 남자애와 34세 이혼녀 사이의 연애 행각을 다룬 이 선정적인 영화의 첫 화면에 "이 영화가 실화에 바탕한다"는 크레딧이 뜬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정도의 나이 격차가 나는 연애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전부 보질 않아서 별점을 줄 순 없어도,40분을 봐서 아닌 건 아닌 거다. 

2013년 10월 22일 화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반 고흐 브랜드 (씨네21)

* <씨네21>(926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83회분.  금주 출간 예정인 <반 고흐 평전 불꽃과 색채>(이상북스)에 소개글을 하나 썼는데, 그 글에 일부를 추가하고 압축시켜 완성한  '브랜드 시리즈 8탄' 



반 고흐 브랜드



좌상. 반 고흐를 자사 홍보에 활용한 현대자동차의 아트카 이벤트 2013년.
좌하. 반 고흐 전시회 개막식에 참석한 정계 요인들 중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모습도 보인다. 2012년.
우. 반 고흐 사망 100주기에 뉴욕 크리스티에 나와서 경매 사상 최고 낙찰가 8,250만 달러(한화 약 7백7십억 원)에 팔린 <가셰 박사의 초상>(1890) 1990년.


반 고흐는 19세기를 산 네덜란드 화가의 이름이지만, 현세대에 두루 개입하는 전방위적 브랜드이며, 개입한 싸움에서 항상 불패 카드로 통한다. 반 고흐 전시회가 한국에서 크게 열린 2012년 11월. 문화부장관을 포함한 정계 금융계 재계의 요인들이 두루 개막식장을 채웠다. 이중 눈에 띤 인물은 단연 차기 대통령선거 당선 안정권으로 분류된 안철수 무소속 후보다. 그는 전시 개막식에서 축사까지 했다. 예술 평가를 좌우하는 것도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해관계이다. 반 고흐는 예술과 담을 쌓고 지내던 불특정 다수의 잠든 호기심을 모조리 흡수하는 문화 블랙홀이다.

국내 전시와 연계하여 현대자동차가 ‘그랜저 반 고흐 아트카 포토레이스’ 이벤트를 내놓은 건 이런 사정 때문이리라. 반 고흐의 작품 이미지를 차체에 올린 자칭 아트카를 매장에서 전시하고, 이 장면을 촬영해서 SNS에 게재한 응모자들에게 경품을 제공하는 행사다. 천재 예술가에 대한 집단최면이 확산될 때 상품 인지도까지 덩달아 상승하는 점을 노린 것이다.

반 고흐는 매혹적인 각주를 달 요건을 겸비했다. 자해와 자살로 이어진 정신질환은 ‘예술가의 광기’를 손쉽게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불행이다. 생전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6백여통의 서신은 반 고흐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그의 육성 메시지같은 무게감을 지닌다. 그의 개인주의 성향도 현대적 예술가상의 시금석으로 이해될 만하다. 생전 홀대받던 작품들이 역대 최고 낙찰가 기록을 갈아 치우는 오늘날 경매장의 풍경도 반전 드라마의 통쾌함을 준다. 이처럼 작품 이외의 드라마는 전문가와 비전문 대중의 기대감을 나란히 충족시킨다.

반 고흐의 인지도 상승은 그가 남긴 무수한 자화상 덕이 크다. 자화상은 작품만큼이나 화가라는 개인에게 주목하게 만들며, 유별나게 많이 남긴 자화상 때문에 남다른 자의식의 소유자라는 세간의 선입관도 강화된다. 그런 대중적 믿음은 그가 모델료가 없어서 자신을 모델로 삼았다는 진실은 외면한다. 반전의 백미는 생전 평가절하 되었지만 오늘날 오히려 반 고흐 그림의 브랜드처럼 군림하는 ‘불타는 붓질’일 텐데, 이는 반 고흐가 독창적으로 고안한 브랜드는 아니었다. 물감을 두텁게 올렸던 선대의 바르비종 화풍과 몽티셀리의 임패스토 기법을 수용해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결과였다.

반 고흐는 브랜드다. 생전 그림을 거의 못 판 비인기 화가, 현대 미술 경매장 최고 낙찰가 갱신, 외면된 작품 세계, 속물적 교양의 정점, 정신질환과 자살, 천재 예술가 신화, 상품 판촉의 손쉬운 매개. 이 모두를 포괄하는 브랜드다. 양립 불가능한 요소를 무수히 포함한 모순된 브랜드다. 월등한 반 고흐의 작품 앞에서 탄성을 애써 숨기고 싶어지는 까닭은, 찬사의 혜택을 예술이 아닌 상업 자본이 독점하기 때문이다. 예술 평가는 산 사람들의 이해관계에 좌우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2013년 10월 18일 금요일

1003 김구림(서울시립) 1005 진경(OCI) 비평워크샵(금호) 진마이어슨(학고재) 1006 2013 다빈치 아이디어(금천예술공장) 레일웨이 트레블러스 핸드북(문래예술공장) 1007 비평가 이일컬렉션(최정아) 1012 미디어퍼포먼스(정미소) 칼리토 카르발료사(국제) 1016 이동기(송원) 윤석남(학고재)

1003(목)
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일반·특이 행동: 4개의 퍼포먼스 (2013.0716~1013 서울시립미술관)

1005(토)
진경 (2013.0912~1027 OCI미술관)   
금호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 비평워크샵 (2013.1005 금호미술관)
진마이어슨 (2013.0828~1006 학고재)

1006(일)
2013 다빈치 아이디어-블루아워 (2013.0925~1030 금천예술공장)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 (2013.1004~1006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1007(월)
비평가 이일 컬렉션+비평워크샵 (2013.1004~1031 최정아갤러리)

1012(토)
미디어 퍼포먼스 프로젝트 (2013.0905~1022 정미소)
칼리토 카르발료사 (2013.1012~1110 국제갤러리 k3)

1016(수)
이동기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마' (2013.0925~1031 송원아트센터)
윤석남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2013.1016~1124 학고재)





김구림 + 일반·특이 행동: 4개의 퍼포먼스(서울시립미술관)






벽면에 적힌 해설에 따를때 김구림은 실험적 최초 시도자일 것이다. 국내 최초 누드 영화 <문명 여자 돈>(1969)제작, 국내 최초 실험 영화 <1/24초의 의미>(1969) 제작, 국내 최초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 제작, 국내 최초 일렉트릭아트<공간구조 A,B>(1968) 제작. 김구림같은 최초의 실험 예술가와, 이른바 최초의 형식 미학 모더니스트들이 후일 받은 예우의 지위의 편차는 크다. 후자가 비교할 수 없이 큰 대접을 받았다. 둘 다 후기식민적 문화 조건이 초래한 최초였을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불구하고. 누구의 발상인진 모르겠으나 김구림의 연보를 큰 벽면에 세계사 세계미술사 한국사 한국미술사의 연보 사이에 끼워넣어 비교한 건 과하게 느껴졌다. 서정추상부터 실험영화 대지예술....등을 단 세월안에 압축해서 실현했다? 후기식민적 조건이 만든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대와 후대에 높은 평가를 못받은 이유일 것이다. 
김구림 전시와 연계된 퍼포먼스 행사는 개천절 개최되었고, 동시대 젊은 작가 4팀이 순서대로 꼬박 2시간을 채웠다. 두 댄스 씨어터(공영선_곽고은)+건축사사무소 SOA「주름, 짓다.」 이행준+유운성「강연 A Lecture」 양아치「칠보시(七步詩), fullbore metal version」 권병준「김구림의 그림자」이 그들. 4팀 모두 집중하기 힘든 행위 실험이었는데 특히 두번째 그룹이 행한 「강연」은 이론적 무게감이 실린 지문을 무거운 어조로 시종 강연하는 행위였고, 보는이의 진을 빼놓기 충분했는데 퍼포먼스 일반에 대한 거부감을 만들 만큼 내용 형식 모두 교조적인게 맘에 걸렸다. 이처럼 자기애적 탐구의 수혜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자기애와 인정욕구가 진하게 밴 점에선「강연」이 김구림을 가장 온전히 동기화한 퍼포먼스 같기도 하고.   


진경 (OCI미술관)




2층 전시를 보지 못하고 돌아간 <진경>을 다시 들러서 보고 갔다. 임택의 출품작은 이끼가 낀 실제 '녹지'의 일부를 떼어온 설치물이다.  



비평워크샵(금호)





금호 입주작가 8기 비평워크샵. 




진마이어슨(학고재)

흠... 이러면서 봤던, 안정되고 긴 평면회화.




2013 다빈치 아이디어(금천예술공장)


이 전시는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하나.
미디어 아트를 전시장의 굴레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업 확장성/상품화 가능성의 여지를 시험하는 것이 다빈치 아이디어 공모다. 괜찮은 취지인데 이런 전시장에서 만난 당선작들은 손쉬운 자극-반응의 인터랙션에 예속되기 쉽고, 곧잘 간과되지만, 미작동 상태로 방치된 작품도 많다. 아마 이 모두가 뉴미디어 시대임에도 미디어아트가 진전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레일웨이 트레블러스 핸드북(문래예술공장)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또 다른 하나. 
공연장에서 제자 2명을 우연히 만났다. 사진에 잡힌 제자와 그녀의 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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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를 참조하는 창작이 시각예술 분야에서 대세를 이룬 현재, 미디어 아트가 해결해야할 난문제는 기존의 전문 매체의 분야(음악, 영화, 연극, 사진....)를 참조는 하되, 각 매체에 밀리지 않는 각별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 분야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건 난문제이고 그동안 현장에서 발표된 무수한 미디어 아트가 공정한 견제를 받지 않아선지 다매체를 그저 참조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은 다매체 참조를 넘어 분야별 전문가와 협업을 도모하면서 다원예술로 이행 중인 한국 미술(시각예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활성화 되진 않았지만 수년전부터 국내 기획전에서 관찰되는 사운드 아트에 라이트 아트를 결합시키고 소리와 빛을 잇는 매개로 기차를 택한 구성이다. 기차는 여전히 근대성 담론을 저변에 깔 수 있는 유리한 소재이고, 앞에서 뒤로 전진하는 기차의 직선 운동은 미디어 아트의 시간성과 부합 되는 면까지 갖췄으니 말이다.
이 같은 기차의 속성은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의 도입 본론 그리고 마무리에 차용된다. 이 소리극의 도입부는 중앙등 하나를 빼면 암전된 실내에서 시작되며, 소리극의 종결은 전원을 모두 켠 조명과 고음의 기차 경적으로 무대를 채워지면서 마무리 되는 식이다.
이 공연의 차별점은 30분 동안 암전된 무대를 음과 빛이라는 2가지 단순 요소에 예속시킨 점일 것이다. 기차의 이동, 환승, 정착과 중요한 극의 전환을 조명의 미묘한 변화로 암시한다. 아나운서 목소리를 차용한 정치 논평(브로셔에 따르면 19~20세기 신문 광고 사료에서 따왔다고 함)도 조명의 미묘한 변화와 나란히 동기화 된다. 상업적 광고 멘트는 랙타임 피아노 반주와 동기화 된다. 이런 내러티브들은 철도에 대한 고증(이 기획전의 한 축이다)이 투영된 셈인데, 사운드와 빛의 압도 때문인지 철도를 둘러싼 그런 내러티브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철도와 근대성에 관한 이 기획의 서사는 빛과 소리라는 미니멀리즘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그리고 철도에 관한 내러티브를 강조하지 않은/못한 게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이 공연에서 기차는 빛과 소리를 매개하되 중요한 서사를 담은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미끼 혹은 영화로 치면 맥거핀 정도로 관객이 받아들이면서 보는 것이 낫다. 관객 대부분도 철도에 관한 서사보다 빛과 소리의 무대에 집중했으리라고 본다. 진지한 내러티브를 앞세우다가 지루함에 빠져버린 미디어 아트가 얼마나 많았던가. 

--- 내가 쓴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시각예술 전문평가위원 평가. 




비평가 이일컬렉션(최정아)

‘이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사된 <비평가, 이일 컬렉션>은 두 개의 결과물로 이뤄졌다. 생전 발표된 비평문을 선집으로 묶은 출판기념회와 이일의 소장품 가운데 유족 대표인 장녀 이유진이 소장한 소품으로 구성된 컬렉션 전시회가 그 둘이다. 출판기념회와 전시회는 각각 아르코의 평론 출판 지원과 서울문화재단의 전시지원금을 받았다.
전시회 출판물 그리고 비평 워크샵은 모두 한 인물을 중심으로 매개된 행사여서 상보적인 성격이 있다. 그렇지만 생전 이일이 비평적으로 지지를 보낸 작가군과 미학적 흐름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히 반복적으로 노출된 형편인 점을 감안할 때, 소품으로 구성된 비평가의 소장품 전시를 통해 고인의 비평세계를 재확인하는 건 놀라운 발견도 각별한 기획도 아니다.
전시회 출판물 비평 워크샵의 진행 주체가 모두 이일이 교수로 재직한 홍익 미대 동문이 중심이 점이나, 당초 심포지엄으로 잡혔던 행사가 비평 워크샵으로 규모를 축소한 점이나, 비평 워크샵이 이일에게 사사한 후대 홍대 동문 평론가들이 모여 방담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 자리였던 점등을 고려하면 <비평가, 이일 컬렉션>는 공공성보단 사사로운 추모행사의 성격이 강하다. 특별한 준비 없이 즉석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청중에게 들려주는 자리가 무의미할 턱은 없다. 설령 그것이 비평 워크샵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어쩌면 학술적으로 느슨한 그런 분위기는 1세대 이론수업의 일반적 학풍이었을 것이다. 이일은 생애 이룬 공로만큼 권세도 많이 누린 1세대 평론가다. 이번 추모 사업이 동문 제자 세대들로 편성되어 연대감이 강조된 점이나, 동문들의 사적인 회상을 이론전공 청중(대개 홍대 예술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과 나누는 비평 워크샵의 성격으로 볼때, 공공기금보다는 동문 차원의 지원으로 조촐하게 진행하는 편이 적합했을 것 같다.
추모행사의 또 다른 진성성은 전대 비평가의 자료가 실현가능한 보급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리라. 그 점에서 상.하 2권 분량의 두툼한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는 고전적인 ‘아카이브’ 자료의 관점에선 노동집약적 성과이지만, 후대 전공자들의 접근성은 차단하는 낡은 방식을 택한 셈이다. 대개의 앤솔로지는 찾아보지 않고 사문화되는 문서에 머물기 때문이다. “타계한지 16년이 흐른 지금, 비평가 이일을 기억하는 젊은 작가들이나 비평가들, 미술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이일 앤솔로지 발간의 배경도, 낮은 수요에 직면한 오늘날 비평의 형편을 환기시키는 지문이지, 앤솔로지 발간의 정당성이 될 것 같진 않다.
--- 내가 쓴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시각예술 전문평가위원 평가. 


ps. 평가서에 적긴 어울리지 않지만 <비평가, 이일 컬렉션>의 '비평 워크샵' 참관에서 느낀 점:
- 지난 성과는 평가 정리 하되 발목 잡힌 현주소를 털어내야 하는 건, 한국 화단에서 올드 스쿨을 대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다. 작가 그룹이건 비평가 그룹이건 장유유서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올드 스쿨은 딜레마다. 긴 문화 식민 상태를 통과한 1세대는 독보적인 성과를 냈기보다, 국외의 미학적 유행 가운데 일부를 국내에 기계적으로 이식했다는 의심을 줄곧 받아왔다. 그럼에도 1세대는 지나친 예우를 받아왔다. 현재 1세대의 영향력이 매우 미미하다는 건, 반어적으로 1세대의 자체 동력이 약하다는 걸 의미할 게다.
- ‘지는 장르’의 예술 분야가 자기 생존을 위해 꺼내드는 진부한 카드가 선대를 우상으로 만들어 거기에 빌붙는 것이다. 이런 생존법은 예술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 비평 워크샵을 듣고 있자니, 준비 안 된 만담으로 수업시간을 채우던 미술이론계의 오래된 학풍이 떠올랐다. 이러니 세대가 교체되어도 ‘젊은 구시대 미술이론가’가 반복해서 양산되는 거다.




미디어퍼포먼스(정미소)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또 다른 하나.
장르적 경계파괴, 다원예술, 준 관객모독적 해프닝은 이 바닥의 한 추세.  




칼리토 카르발료사(국제)


벽면을 침엽수 통나무가 뚫고 있는 설치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뜩. 이런 초대형 설치물이 상업갤러리에게 어떤 미적, 경제적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다. 



이동기(송원)





이동기의 2013년 신작 개인전. 전작 가운데 이동기의 대표 마스크인 아토마우스는 단 한점 뿐. 아토마우스의 의도적인 누락과 스프레이로 비형상회화를 차용한 페인팅 몇점의 포함에 주목해야할 거다. 아토마우스는 새로운 실험을 가로막을 만큼 이미 압도적인 원점이 되었으므로. 상호 무관한 광고사진과 텍스트를 중첩시킨 신작들에선 의도야 어떻건 제프 쿤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불투명한 원색과 만화적 구성이 만드는 작가들이라면 그 귀결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토마우스의 팝아트의 적통을 잇는 직계 후신은 한류 붐이 만든 한국 드라마의 장면 일부를 옮긴 아래층 작업 같다. K-pop은 K-pop으로.     




윤석남(학고재)




전시장에서 도판으로 내가 요긴하게 쓸만한 작품 한점을 발견했다. 전시를 촘촘히 보긴했는데 촬영하는 걸 잊어버렸다.  아주 오래된 나무 기와 위에 그린 평면 설치물이 이번 전시의 방점이다. 총출동까진 못되어도 왕언니들 일부가 참석한 오프닝 광경은 변화된 지형를 보는 듯(그럼에도 방문자의 연령대는 높았다).  
뒷풀이 자리에서 소주를 너무 마셨는지 깜박 선글라스를 두고 나왔다. 선글라스 회수하러 다시 삼청동에 들러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