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강대학원신문>의 청탁으로 기고한 글. '서강에 없는 것'이라는 기획물로, 서강대학교에 순수예술대학이 개설되지 않은 점에 착안해서 나를 비롯한 순수예술 관계자들(미술, 음악, 사진, 무용, 건축, 의학)에게 청탁을 맡긴 것 같다. 원고 지문에도 적었지만 서강대에 일반적인 미대는 없어도 영상대학원이나 아트&테크놀로지 전공은 개설되어 있다. 원고의 일부 내용은 미술대학의 부실한 교육 과정과 전공에 대한 미대생들의 태만에 관해 쓴 2011년 원고(엮인글)를 연상시킬 것이다.
아래 원고는 <서강대학원신문(125호)에 실렸다.
현대미술의 교양은 상아탑 바깥에서
반이정 미술평론가
눈높이 맞춤 교육의 위험
“마르크 샤갈, 모딜리아니, 뭉크 등 예술가의 삶이나 작품을 바탕으로 이들의 창의력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관한 소개를 꼭 글에 포함해서 써주세요.” 한 기업 사보가 필자에게 보낸 원고 청탁서에는 ‘원고 방향’이 이렇게 명시적으로 적혀있었다. 세간에서 예술의 창의성과 연결되는 예술가의 전형으로 무엇을 인식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구청과 기업들이 구민과 임직원을 위해 마련하는 예술 교양 강좌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략 8회 분량의 커리큘럼 안에 영화 문학 미술 음악 방송 등 분야별 전문가를 초빙해서 마치 종합선물세트를 닮은 교양 강좌를 짜서 청중에게 선사한다. 이 교양의 종합선물세트 안에서 미술 강좌는 현대미술을 다루더라도 청중의 보편적인 눈높이를 넘어서서는 안 되며, 청중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수준에서 조정되기 십상이다. 예술을 자발적으로 접할 기회가 적은 일반인에게 미술교육이 글(사보)이나 말(강좌)의 모양새로 주어질 때는 대략 이런 모습을 취한다. 그리고 이건 예술이 현실에서 소비되고 생존하는 일반론인 것 같다. 이 같은 사회 현상으로부터 나아가 순수예술학과를 개설하지 않은 대학 구성원이 순수예술에 관해 품는 선망의 일반적 형태도 대략 추론할 수 있다.
과연 ‘서강에 없는 것들’일까.
‘서강에 없는 것들’이라는 기획안은 순수예술 학과가 개설되지 않은 대학의 사정 때문에, 순수예술 체험의 기회가 적을 거라 믿는 서강대 구성원 중 일부의 인식을 반영하는 걸 테다. 그렇지만 학내에 예술대학이 존재하지 않는 사실로부터 대학 구성원의 예술적 소양이 결핍될 수 있다고 추론하긴 어렵다. 내 생각은 그렇다. 이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내가 수업을 나가는 미술대학들에서 만나는 미대생들은 출신학교를 불문하고 태반이 당대 미술의 흐름에 무지한 채 학교를 다니고 있다. 나아가 전공에 대한 자신의 희박한 지식에 대해 문제의식을 거의 느끼지 못한 채로 4년을 보내기 일쑤다. 그들이 전공하는 순수예술이 재학생의 현재적 삶에 학문적 동기 부여를 거의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부조리한 현상이 발생하는 거다. 바깥에서 미술대학을 바라볼 때의 환상과는 달리 실제 미대는 자유분방한 창작열로 충만한 실험실은 아니다.
1980년 영화 <패임 Fame>은 예술 전문학교에 대한 세간의 극대화 된 환상을 자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영화는 한 예술 전문 고등학교 학생들의 재기발랄하고 자유분방한 창작 열기를 유쾌하게 묘사했다. 하지만 현실이 영화과 같을 순 없다. 그 영화가 개봉하고 30년이 넘게 지났다. 시대상도 변했다. 세상이 바뀌면 바뀐 시대정신을 전달하는 매체 역시 변화한다. 예술도 의사소통의 변형된 수단인 이상, 예술은 매체 변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이다. (뉴)미디어 아트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이다. 동영상 기반의 단채널 비디오, 다채널 비디오 설치, 관객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디지털 아트, 뉴미디어가 개입된 다원예술까지 두루 칭할 때 쓰는 미디어 아트는 동시대의 가장 선단에 놓인 미술로 평가된다. 뉴미디어가 예술가들의 공통언어로 부상하는 이유는 회화나 조각처럼 구시대의 매체로는 동시대의 시대정신을 창작물로 실현하는데 매체적 한계가 있어서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신설되는 미술대학 가운데에는 학과명을 지난 시대 명칭이 아닌 현 시대의 창작 환경에 어울리게 수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양화과 동양화과 조소과 같은 기존 미술대학들 안에 개설된 구시대의 학과명이 이제 조형예술과나 더러는 뉴폼(New form) 전공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변형되어서, 창작의 도구를 뉴미디어까지 포괄하겠노라고 학과명으로 명시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현재 전국에 있는 절대 다수 미술대학은 지난 시절 수업 방식을 시대 변화와 무관하게 그대로 고수하느라 현재의 매체 변화 속도와 젊은 학생들의 정서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동시대 재학생들의 창작 욕구를 채워주지 못하기 쉽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은바 없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장에 비둘기 박제 2천마리를 설치해서 관행적 미술감상과 전시의 문법을 파괴했다
제도권의 철옹성 안에선 진짜 예술을 만나기 힘들다
미술학은 대학에서 어떻게 교육될까? ‘서강에 없는 것들’이라는 기획안의 기대와는 달리, 대학에 개설된 미술학과는 미술의 현재적 흐름이나 궤적에 관해 이론적으로 가르치는 학과가 아니라 창작 중심의 실기학과가 거의 전부다. 때문에 미술학 학위는 재학생이 자기 창작물에 관한 논문과 전시회 이른바 학위청구 전시회를 통해 수여된다. 그런데 학위청구 전시나 학위청구 논문도 대개는 학생 본인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미술학 학위는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설사 미술대학이 실기 중심이라 할지라도, 미대 내에 개설된 이론과목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진단할 거라 믿기 쉽지만, 일반적인 오해이다. 많은 미술대학이 현대미술을 다루더라도 여전히 20세기 미술사를 고답적으로 학습하는 커리큘럼을 고집한다. 때문에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배울 기회가 현재 미술대학 안에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설령 동시대 미술을 다룬 수업이 개설되었다 해도 더 무서운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다름 아닌 피교육 당사자인 미대생들 다수가 동시대 미술에 대한 기초 지식이 부족하거니와 무엇보다 학문적 관심이 많이 결여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다. 미술대학 현장에서 교육해본 사람으로서, 평균적인 미대생과 미술에 선망을 품은 일반인 사이의 지식 격차는 거의 없다고 믿는다. 미술(학)이 갖는 인문예술의 중요성을 인정하더라도, 현대미술이 뉴미디어가 지배하는 동시대에서 높은 관람가치를 갖거나 진지한 화두를 던진다고 보긴 솔직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미술에 대한 낮은 수요 앞에 미술품의 예비 공급자인 미대생이 창작의 동기를 얻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수요는 매우 낮은데 공급처(미술대학)가 전국에 너무 많이 개설되어서 빚어지는 소동이다.
(그동안 무슨 성과를 이뤘는지 필자가 알진 못하지만) 서강대가 1999년 개설한 영상대학원이나 2012년 신설한 아트&테크놀로지 전공은 ‘서강에 없는 것들’을 뉴미디어 기반으로 메우려는 학문적 대안으로 보인다. 뉴미디어의 보급은 미디어아트의 확산뿐만 아니라, 개별 예술 장르간의 융합을 도모하는 다원예술의 출연까지 촉진했다. 다원예술의 출연 배경으로 변화된 미디어 환경에 적응된 동시대인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려는 예술가의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다원예술이 고요한 전시장이 아니라 입체적인 무대 위에서 선보여지는 이유는 2차원 평면에 예속된 고전 미술의 전략보다, 3차원 시공간을 활용할 때 관객의 오감 자극이 충족 될 수 있다는 경험칙 때문이다.
또 다원예술의 비선형적인 서사 구조는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단속적인 데이터베이스를 체험하며 자란 동시대인의 일상과도 많이 닮아 있다. 오늘날 다원예술은 제도권 밖에서는 꾸준히 시도 되고 있지만, 관 차원에서 다원예술이 수용된 시점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되면서 소위원회 가운데 하나를 다원예술소위원회로 꾸린 2005년이다. 역사가 길지 않다. 2007년은 국내 유일의 다원예술축제인 ‘페스티벌 봄’의 첫 행사(1회 명칭은 ‘스프링 웨이브’였다)가 열려 매해 기획을 이어가고 있다.
PS. 덧붙여: 학교 울타리 너머로 예술과 만나기
필자는 글 첫머리에서 예술관련 학과의 개설 여부와 그 대학 구성원이 받는 예술 수혜의 연관성은 낮다고 얘기했다. 그 이유로 현재 미술의 흐름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는 대학 교육과, 미술의 흐름에 대체로 무관심한 미대생의 사정을 지목했다. ‘서강에 없는 것들’이라는 기획안은 현대 미술에 대한 일반인들이 어떻게 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미술이 거의 전적으로 시각정보에 치중되어 있는 만큼, 미술에 대한 소양은 강의나 독서만으로는 채워지기 힘들다. 그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날로 먹는 교양과 지식은 없다. 미술과 자신 사이의 보폭을 좁히고 싶다면, 전시회를 꾸준히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몇 가지 팁을 주자면 전문 기획사와 대형 신문사가 결합되어 주최되곤 하는 블록버스터형 전시회만은 피하라고 권하고 싶다. 입장료도 비싸거니와 블록버스터 전시는 일반인의 평균적인 기대치를 채워줄 뿐, 동시대 미술의 현주소를 그려보이진 못한다. 결과적으로 고가의 수업료를 지불하고 진도는 제자리를 걷는 셈이다. 동시대 미술의 지형도를 그려주는 대부분의 전시는 입장료가 없다. 이런 동시대 미술 전시회의 정보는 네오룩(neolook.com)에 항상 올려져있다. 이런 전시 정보로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없다면, 미술평론가(가령 내게라도)에게 문의 메일을 보내면 지침을 얻으리라 믿는다. 전시를 볼 때 유념할 건 흔히 전시장벽에 적힌 해설을 미리 읽지 말고, 온전히 자기 안목으로 작품에서 관점과 재미를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처음에는 잘 안될 것이나 반복하면 반드시 노하우가 생긴다.
전시와 함께 병행해서 미술책의 보조도 얻으면 좋은데, 동시대미술의 흐름을 집어주는 책은 미술독자층이 적은 국내의 사정 탓에 많이 발간되지 않았다. 다만 1960년대 이전의 미술을 다루는 미술책은 의식적으로 피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설령 어렵더라도 1980년대 이후 미술을 다루는 책을 집어라. 미술과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다면, 동시대미술이 일반적인 동시대인으로부터 이미 멀리 진도 나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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