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09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75회분.
눈빛 서명
좌. 피에로 만초니, 살아있는 조각 1961년
우상. 러시아판 <보그>에서 클로이 모레츠 2012년
우하. 이효리 <미스코리아> 2013년
예술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무수한 요인 가운데에 가장 손품을 적게 쓴 것은 15세기 경 그림 속에 유행처럼 삽입된 작은 파리 한 마리일 것이다. 정밀묘사로 그려진 파리 한 마리는 재현 능력을 판가름하는 잣대로 인정되었다. 현대미술 중에도 일상적 대상을 예술로 승격시키는 몫이 대개 사소한 장치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현대미술의 생성 원리를 자조적으로 풍자한 피에로 만초니의 시도도 한낱 사소한 개입만으로 변별력을 얻은 경우일 것이다. 만조니는 여성의 알몸에 자신의 서명을 남겨 ‘살아있는 조각’이라 칭했다. 예술품을 인증하는 작가의 서명에 올인을 해서 얻은 미학적 역설이다. 얼굴의 주요 부위 한곳을 변화시켜 사람의 인상을 모조리 바꿔버리는 기술은 눈화장이다.
다만 아이라인의 일부를 바꿨을 뿐이지만, 인물의 성품과 정체성까지 동반해서 변모한다. 눈화장은 타불라 라사를 완성작으로 채우는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화장으로 손을 본 눈매와 눈꼬리는 표정과 감정을 지어내어 얼굴에 삽입한다. 삐죽 올라간 눈꼬리 때문에 청소년 시절 손연재는 20대의 성숙한 처녀처럼 보였고, 아역 배우의 청순한 그림자가 드리운 클로이 모레츠(1997년생)는 농염한 팜므 파탈로 돌변했다. 예능방송에서 보여준 털털한 이미지의 가산점을 확보한 채로 이효리가 시도할 수 있는 변신술은 <미스코리아>에서 눈꼬리를 올린 자신의 마스크이다. 온몸을 던지는 누드 화보 촬영이 세간에서 잊힌 스타가 재기를 위해 택하는 파격 승부수라면, 지분을 확보한 스타라면 그저 눈매만 살짝 바꾸는 것으로도 충분한 변신술을 얻는다.
하지만 눈매로 각인된 인물은 아이라인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역설과 만난다. 지워진 눈화장은 눈가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인물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스모키 아이라인으로 규정되는 손가인을 생각해보라. 인물의 인상을 바꾸는 것이 화장술의 일반론인 걸 감안해도, 눈 부위를 살짝 다듬어서 새로운 페르소나를 낳는 눈화장의 마술에 비할 수는 없다.
남녀의 불륜을 연구한 철학자 리처드 테일러는 “낯선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눈빛만으로도 일련의 의미 있는 사건이 일어났거나 충분히 일어날 가능성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대다수의 불륜 아니 거의 모든 불륜이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고 풀이하면서, “눈빛은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솔직한 감정을 숨길 수 없어서”라고 이유를 댔다. 눈은 명시적인 언어를 담진 않지만, 육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점에서 예술에 뒤지지 않는 가장 신뢰할 만한 인체 기관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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