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예술 vs. 이미지 정치
상좌. 바바라 크루거, 당신의 몸은 전쟁터이다, 1989년
상중. 제니 홀저, 구겐하임을 위하여 2008년
상우. 보수단체 회원의 1인 시위
하좌. TV조선의 박근혜 인터뷰 자막 2011년
하우. 낸시 랭 4.11 선거 투표 독려 퍼포먼스 2012년
정보 전달력 면에서 간결한 이미지 한 점이 장황한 텍스트를 능가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적다. 뉴미디어 인터페이스의 개발도 텍스트를 이미지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그렇지만 텍스트는 이미지보다 전달 내용의 명시성과 정확도에서 우월하다. 기구한 사연이 글로 적힌 피켓을 들고 선 1인 시위자의 보편적인 행태를 떠올려보자. 이미지는 공간예술인 반면 텍스트는 시간예술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강인한 이미지라 한들 시간을 두고 발생했을 어떤 이의 절절한 자초지종을 모두 응축해서 담긴 힘들 것이다. 드물지만 텍스트로 넘쳐나는 피켓 시위랑 만날 때가 있다. 피켓에 적힌 해설에 가까운 주장은 전달력과 가독성 모두를 훼손한 채 시위자 개인의 감정 과잉만 확인시킨다.
정치색이 깃든 개념예술이 텍스트를 작품에 빈번이 끌어들이는 이유는 텍스트가 긴 사연을 담을 수 있어서다. 여권신장의 주장을 담은 바바라 크루거의 <무제(당신의 육체는 전쟁터이다)>는 대중 집회에서 포스터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당시 현장에서 포스터로 쓰인 원작에는 훨씬 많은 텍스트가 적혀있었다. 소비사회의 병폐와 남성 중심적 사회를 성토하려니, 크루거의 작품은 구호에 가까운 문장을 포스터의 교조적인 형식 속에 담아 제시하고 말았다. 예술가의 체감 분노는 작품을 도그마처럼 만들곤 한다.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점과, 텍스트에 의존하는 점까지도 같지만, 제니 홀저는 조형적 보완책을 마련한 경우 같다. 작품 전시를 공공장소로 확장해 메시지에 생동감을 줬고, 광고 전광판을 통해 전달된 메시지는 정치적 효과와 미학적 효과를 함께 나눈다. 무엇보다 작품으로 제시된 텍스트가 다만 메시지 전달에 국한되지 않고, 이미지처럼 체감되게 만들었다. 홀저의 텍스트 작품은 심야에 대형 건물의 표면 위에 빔 프로젝션으로 새겨 졌다. 건물에 비친 텍스트는 주장임과 동시에 굉장한 볼거리로 활약한다.
지난 해 4.11 총선을 앞두고 팝아티스트 낸시 랭이 비키니 차림으로 도심을 오가며 투표 독려를 한 퍼포먼스는 선명한 계몽 의도로 1인 시위의 형식을 빌렸다. 하지만 그녀에 손에 들린 피켓에는 투표 권유에 쓰이는 익숙한 문장이 단 한 줄도 적혀있지 않았고, 대신 낸시 랭의 브랜드가 된 탄식 ‘앙’ 한 음절만 적혀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이 주장 없는 퍼포먼스로 그녀의 투표 독려 메시지는 (미디어를 통해) 충분히 전달되었고, 낸시 랭도 소기의 예술가적 경력을 취했다. 보수 성향 종합편성방송은 개국 첫날 방송에 여권의 유력 대선후보 박근혜를 인터뷰한다. 인터뷰 화면 하단으로 ‘형광등 100개를 켜놓은 듯한 아우라’라는 자막을 깔면서 한동안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낸시 랭의 나름 유쾌한 선거 독려 퍼포먼스에도 투표율은 예상을 뒤집고 저조한 결과(54.2%)를 낳았고, 시대착오적인 자막으로 갖은 아유를 받았지만, 형광등 100개의 아우라 밑에서 살아야 할 세상이 찾아오고 말았다. 세상은 구호대로 되지 않고, 때로 망상(妄想)을 닮은 이미지로 엄습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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