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3일 월요일

1017 조습(조선) 단색화(국제) 임영주(스페이스선) 1018 도슨트교육(과천관) 1023 문화공감(KBS) 1024 안옥현(space22) 변웅필(UNC) 하태범(소마) 윤정미(테이크아웃드로잉) 1027 김형석(그림손) 1028 전혜림미팅(스튜디오) 민병헌(미메시스) 변순철(북서울) 1029 강영호(서울관) 정복수(나무) 1031 류장복 작가대화(일민)

1017(금)
조습 '어부들' (2014.1008~1105. 갤러리조선) 
The Art of Dansaekhwa (2014.0828~1019. 국제 K1,K2,K3)​ 
임영주 '거기' (2014.1010~1030. 스페이스 선)​  ​ 

1018(토)
도슨트 양성 심화교육 (14시 국립현대 과천관) 
1023(목)
문화공감 녹음2 (20시 kbs)
  
1024(금) 
안옥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 세상' (2014.1014~1101.  space22) 
변웅필 '옥림리 23-1' (2014.1016~1107 UNC갤러리) 
하태범 'White - 시선(Line of Sight)' (2014.1008~1026 소마미술관) 
윤정미 '관계-수집' (2014.0901~1031. 테이크 아웃 드로잉 한남동) 

1025(토)
도슨트 양성 심화교육 2 (14시 국립현대 덕수궁관)  

1027(월) 
김형석 '세계의 밤' (2014.1022~1028. 그림손)​  ​

1028(화) 
전혜림 미팅 (11시. 휴+네트워크 성동창작스튜디오)  
민병헌 '흑백사진전' (2014.0913~1214 미메시스뮤지엄)
변순철 '전국노래자랑' (2014.1028~2015.0104 북서울미술관) 

1029(수)
강영호 (19시 국립현대 서울관)  
정복수 '뼈속 풍경' (2014.1015~1104 나무화랑), 

1031(목)
아티스트 토크: 류장복 (17시 일민미술관)  



조습 '어부들' (2014.1008~1105. 갤러리조선)
 
작가가 자신의 지인들을 불러모아 예외 없이 통속적인 감정 연기를 선보이며, 자기 작품의 화면을 채우는 건, 흔들리지 않는 조습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었다. 근작 <어부들>도 2000년대초반부터 이어온 조습의 트레이드 마크의 계보에 있을 뿐 아니라, 그 극단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장소는 달라졌지만 조습과 그의 지인들이 선보이는 연기의 유형은 동일성을 반복한다. 근작을 통해 작가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번 감정 과잉으로 첫 인상을 굳힌 작업일수록 반복을 통해 자기 정체성은 굳어질테지만 외부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자극이 되긴 어렵다.    



The Art of Dansaekhwa (2014.0828~1019. 국제 K1,K2,K3)​


 
한국 현대미술의 판도라 상자, 단색화풍 원로 작가들의 작품이 국제갤러리 전관에 모였다. 이는 2년 전 2012년 국립 기관에서 정리한 '한국의 단색화'에 뒤를 잇는 사설 기관 버전 쯤 될 것이다. 내겐 언제고 정리해야 할 숙제와 같은 우리의 과거사. 



임영주 '거기' (2014.1010~1030. 스페이스 선)​


 
 ​ 
매체 확장을 실험하던 끝에 무속인으로 분한 작가상을 보는 것 같았다. 그 점은 박찬경의 지난 경로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얼굴을 가리는 간이 상담소에서 익명의 다수를 상대로 작가 1인이 상담을 이어가는 영상 작품에선 화단에서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번진 관계미학이 떠오르기도 한다.  
전시장 근처의 복정식당에서 통영에서 직송했다는 멍게 비빔밥을 작가가 사줘서 저녁을 나누면서 대화를 했다. 관계미학. 



도슨트 양성 심화교육 (14시 국립현대 과천관) 


문화공감 녹음2 (20시 kbs)

구로디지털단지역 근처에 거주할 때 많이 녹음해 두려고 2회 녹음을 앞당겼다. 왜냐하면 구로디지털단지역 강남아파트에서 여의도 KBS 본부까지 자전거로 20분도 채 안 걸리니까. 지금 이사한 동네에선 불가능.  



안옥현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본 세상' (2014.1014~1101.  space22) 







노을을 배경으로 못난 남녀가 낭만적 연정을 연기한 사진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야성미를 찾을 수 없는 가슴팍을 드러낸답시고 상의를 풀어헤치거나, 갈대밭에서 연정을 과시하는 중년은 각별한 드라마를 지닌 연인이 아닌 보통의 필부필부이다. 정교한 사진의 화질이 역설적으로 일반인 모델들의 포토제닉하지 못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만다. 어쩐일인지 연기 경험이 없는 일반인들이 이런 작위적인 낭만을 연기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들이 근래 급증한다는 인상이 내게 있다.

모델들이 취하는 어색한 연기는 하나 같이 어떤 프로 연기자들의 전형을 모방한 것일 테다. 자기 연기는 억눌렸던 자기 과시 욕구의 분출이자 해방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나의 유형을 이루는 한쪽 가슴을 고의로 드러낸 여성상은 안옥현이 연전에 발표한 비스듬히 누운 여성들의 미숙한 자기 과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안옥현의 이번 개인전은 크게 3파트로 구성된 것 같다. 
1. 일반인 연인의 낭만 연기 2. 일반인 여성이 한쪽 가슴만 드러내는 자기과시의 커밍아웃 3. (응접실?에 진열된) 중년 이상 일반인의 극단적 나르시즘

역삼역 사진 전문 갤러리 'space22'를 처음 가봤다. 



변웅필 '옥림리 23-1' (2014.1016~1107 UNC갤러리)





소품과 그 밑에 적은 육필을 통해, 과감하게게 변웅필이 스스로 생각하는 작가론과 미술세계에 대한 거친 인상이 묻어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 몇 작품에 sold out 딱지가 붙어 있었다. 작가가 그동안 얼마나 하고싶었던 말이 많았던지 작품보다 글의 비중과 인상이 훨씬 커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기 의사를 텍스트로 자주 정리해봤는지, 글 쓰는 재능이 일반적인 작가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뛰어나 보였다. 
  
삼성역으로 이사한 UNC갤러리를 처음 가봄. 


하태범 'White - 시선(Line of Sight)' (2014.1008~1026 소마미술관) 



공간을 순백 재료로 어딘지 허술하게 구성한 후 포격을 맞는 건물처럼 연출한 하태범의 과거 영상물을 이상 깊게 본 적이 있다. 그 잔상을 품고 이번 전시도 봤다. 백색으로 구성된 시공간은 내러티브를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것 같다. 그래선지 난민 시설의 이모저모를 다룬 이번 전시의 백색 작품들은 난민이 처한 격한 감정을 중성적으로 필터링하는 효과를 갖는다. 전시장에서 본 소년상과 소녀상 혹은 모자(모녀?)상은 작가의 의도가 뭐였건간에, 서구 회화 속 걸작 아이콘을 차용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가령 씨뿌리는 사람, 피에타 같은. 



윤정미 '관계-수집' (2014.0901~1031. 테이크 아웃 드로잉 한남동) 




 
윤정미가 이 전시에선 반려동물과 그 주인들을 다뤘다고 함. 



도슨트 양성 심화교육 2 (14시 국립현대 덕수궁관)  



국립현대미술관 도슨트 심화교육 3회 가운데, 2회는 덕수궁에서 진행 했다. 



김형석 '세계의 밤' (2014.1022~1028. 그림손)​




 
 ​
친구 김형석의 개인전에서. double. 붓질의 인상. 그리고 <깊은 심심함>이라는 작품 제목. 



전혜림 미팅 (11시. 휴+네트워크 성동창작스튜디오)




  
오픈스튜디오에 맞춰 발간될 자료집에 쓸 평문 때문에, 휴+네트워크 성동창작스튜디오에 입주작가인 전혜림을 만나고 왔다.



민병헌 '흑백사진전' (2014.0913~1214 미메시스뮤지엄)





동일한 지점을 촬영한 2점 이상이 나란히 걸린 파노라마식 사진 배열이 많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건 인화를 스스로 하는 작가의 실력을 과시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 기계의 도움 없이 안목과 손으로 균질한 질감과 명암의 인화를 여러장 뽑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민병헌의 흑백 사진을 보고 있자면, 미디어 시대에 액자에 낀 그림이나 사진를 향한 여전히 굳은 신뢰를 느끼게 된다. 
민병헌의 뿌연 화면의 흑백 사진은 파스텔이나 수채화의 질감을 사진이 모방한 것 같기도 하다. 전시장에서 만난 양지윤 큐레이터는 수묵화 같은 사진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내가 파스텔과 수채화에 빗댄 것과 같은 맥락이리라. 



아는 여자가 꿈을 꾸었다 (2014.1017~1031 아트스페이스 휴)



전부터 알던 일부 작가를 이번에 다시 보게 된 전시. 



변순철 '전국노래자랑' (2014.1028~2015.0104 북서울미술관) 








변순철의 개인전 '전국노래자랑'에 대한 견해는 도록 서문에서 밝혔음. 
2차까지 이어진 뒷풀이에서 재밌게 술 마시며 얘기하다가 귀가했다.   


정복수 '뼈속 풍경' (2014.1015~1104 나무화랑), 





화랑 전체를 임시 화실과 간이 응접실로 전용한 정복수의 나무화랑 개인전. 손님을 맞고 있을 무렵 우연히 방문한 나도 막걸리를 5잔 이상 마시고 자리를 떴다. 



강영호 (19시 국립현대 서울관)  

강영호의 이번 퍼포먼스에 관한 내 견해는 5년 전 내가 작성한 강영호 전시 리뷰와 여전히 유사하다.  => 당시 리뷰  



아티스트 토크: 류장복 (17시 일민미술관)


 
 
류장복의 아티스트 토크는 서문으로 쓴 글을 참조하면 된다. => 전시 서문 

2014년 11월 1일 토요일

류장복 개인전 '투명하게 짙은' 서문 (일민미술관)

​* 류장복 개인전 '투명하게 짙은'(2014.1017~1207 일민미술관)의 서문으로 쓴 글. 
   10월31일(금) 17시 일민미술관에서 부대행사인 작가와의 대화(엮인글)가 있었다.  



2013년 6월1일 11시49분, oil on linen, 90.9x72.7cm, 2014


류장복 프레임


반이정 미술평론가 

프레임 이론은 의제를 효율적인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인식의 틀을 정한 후 세상을 바라본다고 풀이하는 이론이다. 요컨대 자기만의 창문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거다. 비단 남다른 자기 고유성을 보유한 인물이 아닌 그 누구건 자기 프레임에 따라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대처한다. 탄광촌이 밀집한 철암을 필두로, 한남동이나 성미산 등지의 장소를 정해서 현지 순례를 떠나는 류장복의 기행도 그가 고집하는 프레임 가운데 하나일 게다.

거의 매일 일기에 가깝게 습작을 쏟아내는 창작 일과 또한 그가 취한 미학 프레임의 한 귀결일 것이다. 그림의 개수를 능가하는 단문 또는 장문의 글을 써나가는 습관도 그의 프레임이리라. 작가의 그림과 그가 쓴 글이 한 묶음의 연속체가 되도록 배려하는 건, 어쩌면 류장복을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프레임이라고 본다.

급기야 틀/액자를 뜻하는 프레임을 가시적인 결과물로 연결한 것이, 창문 18장을 늘어놓을 류장복의 21번째 개인전으로 구현된 게 아닌가 싶다. 이번 개인전에 소개된 창문은 2013년과 2014년 두 해의 여름 동안 관찰하고 연출한 창문들이다. 긴 세월 고집해온 류장복의 미학 프레임은 누구의 방도 아닌 자기 방에서 완결 되었다. 작가의 방 창문을 상이한 시점과 연출로 재구성한 거다. 공공의 창이 아닌 작가의 방 창으로 프레임을 잡은 게 관건일 것이다. 이를 테면 자기 방에서 재구성한 작가의 시점 쯤 될 터이니.

균일한 작가의 방 창문 사이로 이국 취향의 창문 3 점이 끼어드는데, 여행을 떠난 통영의 어느 숙소 창문이란다. 자기 시선을 안정적으로 담는 자기 방의 무수한 창문들 사이로 바깥세상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사소한 간섭을 수용한 거다.

무수한 창문의 나열이 작가 관점의 제시라면, 이번 개인전의 큰 그림은 작가 관점을 반영하는 무수한 창문들과 그 사이사이 틈틈이 간섭하는 외계의 사건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대하는 작가의 관점을 병행시키려는 의도이리라. 단번에 알 수 있는 세월호 침몰 같은 동시대 사건이 작가의 창문 사이에 난데없이 개입한다. 세월호 침몰을 단독 사건으로 뽑아내기보다 일기의 흐름 속에 은연중 삽입하여 일기의 연속체의 일부로 동참시키는 식이다.

회화의 자기 지시성에 대한 류장복의 확신에서, 20세기 중반 평면회화의 독보적인 미학을 형상회화로 반복 계승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때문에 ‘회화 공간의 투명성’같은 미적 도그마를 고지식하게 지지하는 작가치고, 류장복은 과도하다 싶을 만큼 많은 글로 작품을 해설한다. 흡사 일과로 굳은 그리기가 일기의 대용인양 보이는 것과 별개로, 방대한 글로 그림들을 보족한다. 세월호 그림이 창문 연작 전체에서 단독적으로 행사하지 않듯, 류장복은 그림 한 점의 단독 승부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 동일한 주제의 그림의 연작과 그 연작을 보족하는 글의 연작이 총체를 이뤄 제시되는 식이랄까. 그래선지 류장복의 형상회화가 작가가 쏟아내는 방대한 에세이로 자기 철학을 보강되는 닫힌 구조 안에 놓인 점마저, 20세기 중반 평면회화의 노선을 연상시킨다.


 2014년 6월27일 오후 2시2분, oil on linen, 90.9x72.7cm, 2014


두 개의 침몰, charcoal, graphite powder on linen, 90.9x72.7cm, 2014



2014~2  7월15일_13(1)


2014년 7월17일 저녁 8시57분, oil on linen, 90.9x65cm, 2014



작가가 쓴 글은 날씨에 관한 단조로운 품평, 풍경에 둘러싼 기계적인 관찰, “계단 끝에 녹슨 녹색 철문이 천국으로 가는 이승의 마침표 같았다.”(2008년)와 같이 현지의 풍광을 멋 부려 시적으로 묘사한 글 등이 뒤엉켜 있다. 자기의 예술관을 장황하게 나열한 지문 역시 자주 눈에 띤다. 기자의 보도수첩마냥 촘촘한 연대기로 기록한 철암 작업의 묶음은 책 제목마저 숫제 <철암에서 그리고 쓰다>일 만큼 그림과 글의 관계에 대한 신뢰가 보통 이상이다.

류장복의 글과 그림이 일기에 가깝다는 건, 표면적으로도 손쉽게 확인되는데 그 대표적인 게 <2009.2.25. 20:10>처럼 연원일시와 요일 따위를 기계적으로 나열한 작품 제목 짓기다. 내용과 메시지를 투명하게 만드는 이런 제목의 무감동함 때문인지, 그림에 동반되는 에세이의 길이는 짧지 않고 시적인 묘사가 유독 많다.

그의 창작이 일기에 가깝다는 것은 연례행사에 가깝게 열리는 부단한 개인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매 개인전은 일기의 중간정리 쯤 되리라. 강력한 한방을 날리는 화면보다 무덤덤한 묘사로 삶을 스케치한 작업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도,외부 유행에 더디게 반응하고 내면의 고집에 집중하는 그의 성향 탓인 듯하다. 무심한 제목과 조응하는 덤덤한 화면을 표현주의적 글로 해설한다. 대상인 선탄장과 동기화된 재료를 택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 목탄으로 표현주의를 정점까지 끌어올린 ‘철암’ 연작마저 장문의 글로 그림을 보조한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대표작 두어 점이 아니라, ‘그림+글 패키지’로 구성된 연속체가 류장복의 창작 주기를 형성해온 것 같다. 동일 연작 속에도 작품마다 질감의 편차야 존재하지만, 연작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연속체로 관람할 때 작품이 온전히 읽히리라. 그것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 그림 감상의 일반 관성에 저항하는, 작가 개인주의에 편중된 화면 구성이기 때문이다. 류장복의 프레임은 여하튼 그렇다.

‘그림+글 패키지’로 구성된 연작은 관찰 지역들의 순례기로 구성되어 있다. 철암, 한남동, 성미산 등이 순방한 장소 중 일부다. 현지에서 섭외된 듯한 인물이 그림의 모델로 등장한다. 묘사된 인물은 쉽게 인지하기 어렵게 그려졌는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인물의 평범함을 간직하게 만든다. 그 결과, 그린 이와 모델만이 재현된 인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그가 취하는 의사소통의 폭은 제한적인 것 같다.

류장복을 50대 한국 중견 미술인의 일반론이라 할 순 없어도, 50대 중견 평면 화가의 한 징후로 읽을 순 있으리라. 화단의 시류를 선도하는 뉴미디어 세대와는 상이한 미적 층위를 형성하는 세대 말이다. 어찌 보면 자기 고집의 고지식한 관철 같기도 하다. 뉴미디어를 창작의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 50대 중견의 일반 평면 작가와 류장복 사이의 갈림길은 서넛 이상 잡힌다. 그 가운데 몇을 고르면, 그가 장르 회화의 원점에 천착하는 인상을 준다는 거다. 그는 예외 없는 하루의 일과처럼 ‘방에서 바라본 창문 밖이라는 정물’이라는 근작 이전부터, 보편적인 정물과 인물상을 그려왔다. 또 어쩐지 소싯적 단어처럼 느껴지는 스케치 여행을 떠나서, 현지와 현지인을 풍경화와 인물 초상화로 사생했다. 회화의 원점에로 숭고하게 귀환하는 모양새다. 사진에 의존해서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대적 공감에도 동참하지 않는다. 사진을 참조해서 그리지 그러냐고 묻는 누군가의 무심한 물음에, “그러면 사진처럼 돼서요. 실물보고 그려야 실감나요.”라고 응수하는 식이다.

2013년 이후 류장복의 습작에도 ‘갤럭시노트’같은 뉴미디어가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뉴미디어는 습작을 돕는 보조 장비에 머물 뿐, 완성작을 만드는 프레임은 여전히 즉물적 사생과 직감에 의존하려 든다.

회화라는 프레임을 열린 창문에 빗대는 건 전통 회화 이론에서 곧잘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건축가와 미술가은 2차원 면(화폭)에 3차원을 옮기는 방안을 고심하다가, 열린 창밖으로 내다본 세상처럼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 그 결과 선 원근법이라는 아주 오래된 눈속임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재현 대상을 정교하게 옮기는 프레임으로 창문을 사용한 것이 전통 회화의 미학이었다면, 한국의 어느 50대 중견 화가는 창문을 자기가 고집하는 세계관과 미학을 고정시키는 프레임으로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류장복이 자신의 작가관과 세계관을 나란히 투영하는 프레임으로 창문을 선택한 이상, 그가 그린 창 그림의 거개가 자기 방 창문인 건 자연스런 귀결일 게다.



* 10월31일(금) 개인전 부대행사 작가와의 대화 기록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