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7일 토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표현의 자유와 취향의 문제 (씨네21)

* <씨네21>(991호)의 '반이정의 예술판독기'115회.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자신이 지지하는 스타의 출연 영화를 평가절하한 글을 올리자 내 블로그에 몰려와서 항의했던 팬덤을 겪은 후 떠올린 주제.



취향이라는 두 개의 수평선



상좌. 샤를리 에브도 테러 직후의 테러리스트의 모습 2015
상우. 무명시절부터 크레용팝을 지지한 팬덤 팝저씨를 차용한 정연두의 <크레용팝 스페셜> 2014
하. 나는 샤를리다’ 시위 2015


자신의 취향과 신념에 대한 비난을 덤덤히 수용하는 사람은 전무에 가깝다특히 공개적인 비판 앞에선 더더욱명백한 잘못마저 당사자가 부인할 때는공개 비판의 모욕감 너머로 동의하기 힘든 불편한 직감이 있어서 일거다취향과 신념이 곧 자기의 존립근거여서가 아닐까존립근거인 취향과 신념이 평가절하 될 때대응 방식은 다양하게 표출된다그 중 극단적으로 대처하는 극소수의 저항은 세간의 주목을 끌 만큼 충격적 사건으로 귀결된다.

대중 스타를 향한 팬덤도 그 중 하나연모하는 스타를 향한 팬덤의 일편단심은 스타가 관여한 결과물에 사재기로 응답하거나,다른 라이벌 스타의 흠집을 열심히 잡아내 비교우위를 주장하거나스타를 비판한 기사 아래로 인신공격성 댓글 폭탄을 투하하는 식으로 표출된다스타를 향한 극성맞은 지지자인 광빠와극성맞은 비난자인 광까는 이렇게 탄생한다스타에 대한 팬덤의 염원을 사재기와 광빠처럼 표출시키는 동력은 스타의 성공 자기 존립의 정당화라는 굳은 소신에서 오는 걸 거다소신의 문제란 이처럼 간단하지 않다.

아이콘을 향한 지지자의 맹목성은 대중 스타와 팬덤의 관계를 넘어종교와 신자 사이의 관계에도 반복된다샤를리 에브도 테러는 팬덤의 종교 버전 쯤 될 거다샤를리 에브도 만평이 이슬람주의를 명예 살인했다면이슬람주의는 인명살상으로 대응했다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나는 샤를리다’ 시위는 표현의 자유신념의 존엄성그리고 비평의 기능과 같은 상충하는 요소들이 뒤엉킨 사건이다때문에 이 시각에선 이게 맞고저 시각에선 저게 맞아 보인다.

요컨대 만연한 성차별과 독단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계율에 지배받는 종교를 비판할 표현의 자유란 있다이슬람의 이데올로기가 무슬림 사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그 사회 밖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더욱 정당화된다그럼에도 자기 존립근거인 신앙의 명예 살인을 목격한 신자라면 인명 살상에 준하는 마음의 상처를 받을게다더구나 도발 가능성이 높은 집단에 대한 조롱과 비난조의 풍자가 예고된 재앙의 도화선이었다는 지적 역시 틀리지 않다그럼에도 비평의 기능을 생각해보자.

비평은 상대의 마음을 돌려놓거나 견제하는 기능이 원래 낮은 작업이다비판의 수위가 높건 낮건 말이다요컨대 이슬람을 온건하게 비판한들 그들의 신앙심이 흔들릴 리 없고어떤 스타의 연기력을 온건하게 비판한들 팬덤의 열정이 식을 리 만무하다.그렇다면 비평은 대체 무슨 기능을 할까비평이란 문제점에 동의하는 다수에게 공감의 쾌감을 선사하고 지지를 돌려받아비평의 내용을 다수의 견해로 만드는 작업일 수밖에 없다.

샤를리 에브도 테러와 맹목적인 팬덤 현상에옳고 그름을 선명하게 나누기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그럼에도 비평이 업인 이로서에브도의 과장된 풍자나 특정 스타의 자질을 비판하는 기사가 상대적으로 정당하다는 직감이 내게 있다테러리스트와 광빠도 그들이 정당하다는 절대적인 직감이 있을 게다만날 수 없는 수평선 둘.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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