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3일 수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도시침탈 (씨네21)


* <씨네21>(895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68회분. 내가 보낸 제목은 아래와 같고, 편집팀에선 '표류하라'라는 간략한 제목으로 교체했다. 뭐 괜찮음.
  

빼앗긴 도시에 침범한 봄




상좌. 파쿠르를 다룬 영화 <야마카시>의 장면 2001년
상우. 알랭 로베르가 최단시간 등반 기록을 깬 어스파이어 타워 2012년
하좌. 도시에서 자전거 묘기를 하는 대니 매커스킬의 연속동작
하우. 촛불집회 2008년 (참여현상소 촬영)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건 안정된 선택이지만, 시스템에 수긍하는 수동적 자세이기도 하다. 예술은 그런 길을 가지 않는다. 범주, 분류, 등급, 규칙을 정하는 건 사안을 또렷하게 하고, 선악의 구도도 선명히 밝히지만, 지배자의 전형적인 논리인 것도 사실이다. 이분법처럼 잘라 나눌 순 없지만, 예술이 놓일 별도의 자리를 정하고 엄정한 공식이나 규칙에 예속시킨다면, 제도권 예술과 보수주의 취향에 가깝다. 반면 예술을 생활로 연장하고 공식을 변형하고 규칙을 이탈한다면 전위예술이나 진보주의 미감에 가깝다.

예술과 일상을 분리시켜 사유하는 건, 다수 대중과 극소수 특권층의 머리에 자리 잡은 도그마다. 이들은 정치와 일상도 분리시켜서 한다고 믿는다. 비록 이유는 서로 다르지만. ‘일상의 예술’이나 ‘일상의 정치’ 가운데에는 품질이 낮은 하수가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대중과 특권층의 동기화된 믿음 때문에 사회의 완고한 시스템이 정착된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사회 시스템의 억압을 도시 구조에서 발견했다. 특권층이 점령한 계획도시의 일상에 대중이 안착해서 시스템의 억압을 강화한다고 봤고, 그들에게 점령된 도시의 지리학을 탈환하기 위해선 도시 이곳저곳을 무계획적으로 ‘표류’하라는 지침을 줬다.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의 심리 지리학(psychogeography)은 과거사에 머물지 않고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도시 법규를 위반하고 공간의 지형도를 멋대로 지정하는 ‘표류’를 차용한 기행들이 속속 계발되어 도시를 점령 중이다. 표류는 높은 위험수위에도 안전장구 없이 맨손으로 시행되곤 한다. 안전제일이나 규칙은 중요한 가치일 수 있으나, 침범자에게 어울리는 철학은 아니므로. 날다시피 건물과 건물을 가로지르는 파쿠르(parkour)의 동선은 길일 수 없는 곳에 길을 낸다는 점에서 도둑이 길을 만드는 논리를 닮았다. 

세계 최고층 건물만 골라 맨손으로 등반하는 알랭 로베르에게 어울릴 공식 직함도 고르긴 어렵다. 당국에서 불법으로 간주한 그의 건물 등반은 공식 종목이 없기 때문이다. ‘스파이더맨’으로 그가 호칭되는 이유일 것이다. 사고 위험이 높지만 결코 안전장구 없이 주행하는 오토바이 폭주족과 프리스타일 BMX자전거 라이더는 기존 형태를 과격하게 변형시킨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탄다. 폭주 오토바이는 정상적 교통 흐름을 역행하는 점에서 사회 불안요인으로 간주되지만, 도시 침범을 감행하는 ‘극단적인’ 표류에 속할 것이다.

당국의 불법 규정과 안전장구 미착용을 집단이 수행한 표류도 있다. 또렷한 정치 메시지를 담은 촛불시위의 무수한 사례들이다. 도시를 침범하는 표류의 총합는 인체의 한계에 도전하고, 규정을 위반하며, 실패할 경우 최소 구속 최대 죽음으로 연결되는 위험한 인체 실험이다. 불안정한 표류를 택해서 주류의 지위를 포기한 비주류는 무한한 자유와 무한한 위험을 동시에 떠안는다. 비주류는 주류의 스펙터클을 혐오하되, 숨통이 트이는 ‘독보적인 볼거리’를 남긴다. 때문에 비주류의 표류는 일상과 예술을 결합시킨 전위 예술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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