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897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69회분. 내가 보낸 제목은 '검열과 묵인의 신축성'이라고 달았는데, 편집팀에서 아래처럼 교체했다. 더 낫네. 한데 본문에 알트만 영화의 국내 개봉일은 1995년인 거 같은데, 편집팀이 1994년으로 바꿨더라. 1995년이 맞을 텐데...
양해각서
상좌. 나체 모델들의 런웨이를 도입한 로버트 알트만의 <패션쇼> 1994년
상우. 유출된 장백지 알몸 사진의 일부분을 하트로 가린 편집본 2008년
하좌. 국내 10대 의류쇼핑몰이 등록한 치마레깅스 차림의 소녀모델
하우. 이용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KCSC가 불법유해성으로 규정한 사이트의 차단된 화면
로버트 알트만의 <패션쇼(원제:프레따 포르떼)>의 하이라이트는 영화 말미에 배치된 런웨이다. 이브 샐베일 같은 현존 모델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알몸으로 무대 위를 느리게 캣워킹 하는 라스트 신은 영화 속 패션쇼에 참석한 관객이나 영화를 보던 관객 모두에게 충격적인 반전이었다. 의상을 보여주는 패션쇼의 본질에 역행하면서, 패션쇼의 의미를 반문하는 이 장면은 국내 개봉 당시 한국 정서에 맞게 마사지를 당했다. 알몸으로 걷는 모든 모델들의 사타구니마다 하트 모양 가림표가 매달린 것이다. 이동하는 모델의 동선을 따라 편집된 하트가 허공을 둥둥 떠다니며 사타구니를 집요하게 가렸다. 영화 원본에 하트 모양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화질이 확연히 떨어졌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의상을 모조리 제거해서 패션쇼의 본질을 반어적으로 되묻는 이 심각한 설정은 난데없이 끼어든 하트 때문에, 객석에서 한탄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대략 20년 전(1995년 국내 개봉) 소동이다.
창작자의 표현, 공동체의 정서, 그리고 당국의 검열, 이 트라이앵글의 한복판에서 유두와 생식기 체모를 노출 불가의 마지막 성역으로 암묵적으로 합의하는 나라가 여전히 많다. 이 마지막 성역을 해제하는 기준은 그 사회의 문명지수에 반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명지수가 높으면 자유 표현에 관대해지고 문명지수가 낮으면 검열에 엄격해지기 마련이다. 구성원의 자유 선택을 불신하는 정신분열적 국가는 관람 기회를 법적으로 박탈해 버린다. 그런 국가의 구성원일수록 윤리적 위험감수 의지가 낮은 점도 악순환이 된다.
그렇지만 유두와 체모 노출이 연루된 현재적 사건은 끊임없이 속출하며, 뉴스 소비자의 높은 수요 압박과 검열 당국의 엄격한 기준은 상호 충돌을 거듭한다. 이때 이런 저런 가림표가 고안되어 양자의 충돌을 완화 시키는 양해 각서 같은 역할을 한다. 고작 깨알만한 가림표로는 유두와 체모의 일부만을 덮을 뿐, 발달된 가슴과 관능적 인체 볼륨까지 숨기진 못한다. 검열의 제스처는 취하되, 압도적인 소비자의 관음 욕망은 그럭저럭 충족시키는 방편, 검열과 묵인 사이를 신축성 있게 화해시키는 지점에 하트모양 가림표가 있다. 진관희의 관리 부실로 장백지의 하드코어급 누드 사진이 유출되었을 때, 사진을 인용 보도하는 언론사는 장백지의 알몸 위로 하트라는 양해각서를 붙였다.
2010년 이후 한국 여성의 하의를 치마 레깅스가 극성맞게 획일화 시켰다. 가히 쓰나미처럼 휩쓴 유행이다. (초미니)치마 레깅스는 서구적 체형으로 발육하는 초고속 세대교체와 그것을 따라잡지 못한 공동체의 더딘 윤리의식 사이의 양해각서 같다. 늘씬한 하반신 노출의 욕구를 충족시키되, 똥꼬 치마라는 불건전한 혐의는 털어버린다. 치마 레깅스는 엄연한 밀착형 바지이지 초미니 치마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가창력보다 선정적인 의상과 몸매에 최적화된 한국 걸그룹 시장에서, 예능이라는 양해로 억압된 노출 욕구가 해방구를 찾은 사정(씨네21 867호)처럼, 치마 레깅스의 신속한 전염성도 유사한 현상을 대변한다. 치마 레깅스가 그레이톤 면소재로 통일된 사정은, 인체 곡선의 볼륨감을 모나지 않게 부각시키는 색감과 재질감을 배합한 결과 같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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