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에 열린 전수경 개인전 'Body Complex'(2012.0906~0916 금호미술관- 엮인글 보기)과 관련하여 쓴 글이지만, 당시 개인전에 국한하지 않고 포괄적인 작가론으로 썼다.
오르가슴의 정중동
반이정. 미술평론가
화면 위로 불안이 어려 있다. 작업 진행도를 따라가면 2010년 이후 안정된 구도로 마감되는 경향이지만, 대칭구도가 만든 화면의 안정감은 역설적으로 숨겨둔 불안감을 도드라지게 하는 것 같다. 대칭(성)은 전수경에게 불안의 기원이자 창작의 동력으로 보이는데 작가가 대칭을 선호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먼저 데칼코마니의 원리처럼 좌우대칭은 어렴풋한 형상을 만들어 암시할 무엇을 은연중 숨기기에 용이한 조형 원리이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하지 않아도 된다. 또 다른 이유는 대칭성의 조형적 평안과 품격이 재현물의 즉물성을 상쇄시킨다. <Duality>(2010)는 꼿꼿이 선 페니스를 입술과 혀가 밑에서 떠받드는 인체기관 복합체(body complex)를 나타낸 그림인데, 남성기를 전면에 세웠으되 정갈한 대칭 구도 안에 담긴 은은한 파스텔 톤 페니스는 욕정의 원점을 웅변하기보다, 품격 있는 장식물 혹은 독립된 유기체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대칭은 2010년 이전 작업(2007~2009)에도 작가의 복심을 숨기는 유용한 알리바이였던 것 같다. 비단 대칭의 의미를 구도상의 좌우 균형에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상반되는 둘을 같은 화면 안에 공존시킨 광의의 대칭은 2005년 전후 작업에서 더 자주 쓰였다. 동양화의 관념 산수 풍 흔적을 빌려와서 배경 속에 욕정의 나체를 심어 놓는 식이다. 경건한 설교 가치를 표방하는 구약을 인용하되 유명한 간통 에피소드를 따온 <다윗과 바세바>(2007)나, 긴 벨벳 장갑을 착용한 귀족 여성의 두 손과 그녀가 응시하는 맞은편에 건장한 남성 흉부 모양 배낭과 그 위에 새겨진 뒤엉킨 육체의 흔적을 대비시킨 <그녀가 진정 알기 원하는 것>(2009)도 상호 충돌하는 둘을 결합시킨 대칭에 속한다.
전작을 통틀어 대칭성의 진면모가 집결된 작업은 소파 시리즈(2007. 2009)로 보인다. 소파 작업은 불명료한 흔적 속에 주제를 은폐시킨 2007년 이전 시도와, 선명하게 남성기를 정갈한 좌우대칭으로 제시한 2010년 사이를 매개하는 과도기로 보인다. 격조 있는 클래식 소파가 화면 가득 좌우대칭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소파 원목에 새겨진 물결무늬 장식과 굴곡 있는 소파 다리는 설득력 있는 성적 페티시처럼 느껴진다. 등받이 장식 안에 동양화 산수의 흔적을 빌려 뒤엉킨 나체를 숨겨온 전작을 재인용했으며, 그것으론 부족하다 느꼈던지 제목 <흔적들>(2009)처럼 소파 위에 남겨진 체모 몇 가닥이 뜨거운 관계의 구체적인 장면을 정사의 흔적처럼 잠잠히 웅변한다.
David and Bathsheba_2007
Body n Talk
Configuration in Bed_2010
You and Me_2009
소파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구는 소극적인 페티시처럼 쓰였지만, 남성기가 독립된 유기체처럼 단독으로 등장한 2010년 이전부터, 직설법을 대신하여 그 자리를 대신 페티시가 보충해왔다. 세간에서 가장 흔한 페티시로 간주되는 신발은 <Body and Talk>(2007>에 이어 <Configuration in bed>(2010)에서 부츠와 하이힐의 형태로 나타난다. 성적 페티시는 직접 성관계의 차원을 넘어 오르가슴을 사물 매개로 관철시키는 대용품이었다. 2009년의 두 작업 <You and me>와 <Karma>에서 지퍼는 개봉되는 기능적 속성과 안팎 구별 없는 뫼비우스 띠 모양을 이용해서, 성기 모양을 연상시키는 변형 페티시로 쓰이기도 했다.
소파 시리즈(2007. 2009)가 그 이전과 이후를 대칭성으로 매개하는 과도기였다면, 전수경 개인사의 번민을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토로한 <Ambivalence>(2010)는 자기 고백에 해당할 지도 모른다. 그림 속 두뇌는 <Duality>처럼 독립된 유기체 모양으로 화면에 홀로 떠있다. 뇌의 굴곡 잡힌 주름은 초기 작업에서 알몸을 숨기는데 동원된 동양화의 관념 산수풍 흔적과 같은 기능을 한다. 더구나 사람의 속내가 담긴 인체 기관인 뇌의 주름 위로 남녀 성기, 귀, 혀, 웅크린 알몸들이 뒤엉켜 또 다시 인체기관의 복합체를 형성한다.
그렇지만 자기 고백에 가까운 두뇌 풍경화를 전수경의 개인 고백에 한정시켜야 할까? 분기점을 선명하게 지목하긴 어려워도 2000년대 초반 이래 섹슈얼리티를 재현 주제로 삼은 젊은 여성 작가(20대)가 한국 화단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의 전례가 없는 현상이었다. 여성 섹슈얼리티는 간과될 수 없는 비중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권에서는 억압되고 애써 외면된 주제였다. 구시대의 낡은 성도덕이 사회 구성원의 리비도를 장기간 단속해온 사회라면, 그 사회와 개인은 병들게 마련이다. 공동체와 사회가 탈출구를 마련해주지 않으면 현실에서 허용될 수 있는 변형태로 리비도의 해결책이 등장한다. 인터뷰에서 다소곳한 아이돌 걸 그룹 구성원들이 무대 위에 오르면 엔터테인먼트라는 공인된 명분을 내세워 인체 노출 욕구를 과시하는 것도 흡사한 타협책이 아닐까.
전수경의 그림에서 쉽게 만나는 기독교 구약의 에피소드와 안정된 좌우대칭 구도, 동양화 산수화풍 흔적은 작가를 오래 지탱시킨 윤리학과 미학이었으리라. 아울러 내면의 고백을 외면하던 강한 억압 기제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아가 종교 에피소드의 인용과 안정적인 대칭구도는 내면의 뜨거운 자기 고백 사이를 중재하는 중후한 타협안으로도 쓰인 것 같다.
<Between the Candle and the Candlestick>(2011)은 <Duality>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모티브를 채택했다. 뱀 모양 혀와 발기된 남성기로 제기(祭器)를 차용한 것은, 제의적 가치를 내세워 남근숭배 혹은 탐닉 가치를 타협시킨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언제나 대칭성 안에서 타협점과 합의점을 찾아냈고 그것은 자기 치유의 방편이기도 한 것 같다. 그리고 2010년이 지나자 내면을 지배하던 종교 도그마와 윤리적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벗어난 인상이다. 이 현상은 딜레마를 던진다. 하드코어(핵심)를 진솔하게 응시하는 도약대가 된 점에선 다행스럽고, 해제된 긴장이 직언(直言)의 반복을 쏟아낼 수 있는 점은 위험하다. 해석의 여지가 낮아진 직설법은 시각적 통쾌함을 배가시키는 큰 장점이 있지만, 동어반복의 허탈함도 나란히 가져올 수 있다.
그렇지만 늦었어도 도그마에서 벗어난 건 새로운 도약대를 찾은 청신호 같다. 직언의 거친 인상이 남더라도 정갈한 장식품처럼 대상을 주목한 것은 이전 작업들보다 후련하다. 딜레마를 넘어서는 간단한 해법은 다음과 같은 게 아닐까. 내면의 타협점을 조심스레 유지하기, 화면에 스토리텔링을 배가하기,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의 치유 기능을 포기하지 않기.
Ambivalence_캔버스에 콜라주 먹 채색_38x46cm_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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