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19일 화요일

0219 이디도


알람 기상에 실패해서 화들짝 놀라서 깨어나, 오전에 잡힌 약속에 맞추려고 바람 찬날 자전거로 노량진역까지 이동해서 지하철로 환승한 후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정확히 딱 10분 지각. 밤잠을 못잔 상태에서 1시간만 보충하려다가 벌어진 실수. 
오전 오후의 일들을 모두 마친 후 귀가하니 오후 5시가 조금 넘음. 

약속에 늦어 긴장 상태로 자전거를 몰았음에도 바람의 냉기를 느낄 만큼 오늘 날씨는 찼다.   
일마치고 귀가해서 한숨 돌린 후 다시 외출해서 원두를 사는 보라매병원 앞 '한주하의 커피볶는집'에서 더치 커피를 2병 삼.

이디도는 선호하는 원두 품종인데, 내가 집에서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랑 제공 받은 이디도의 맛과 바디감이 달랐다.
내 핸드 드립 솜씨는 일말의 검증도 받은 바 없으나, 호기심 차원에서 집에서 주욱 써왔던 칼리타 서버 말고, 고노(Kono) 서버도 한번 써보려고 결심했다.  

제공 받은 이디도(Ethiopia Idido). 

2013년 2월 18일 월요일

0215 유럽단편영화제


2월15일(금). 건국대 KU씨네마테크에서 1회 유럽단편영화제(2013.0215~0221 행사를. 뒤이어 KU시네마트랩에서 0222~0224 까지)한다 해서 영화제 개막식에 다녀옴. 

극장에 좌석을 잡자 개막식이 진행되었다. 예상 외로 대사 인사말과 긴 소개가 있어서 지루했다. 예술 축제에서 이런 의전은 축약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개막작이 단편 4편이었지만 뒤에 약속이 잡혀서 마지막 한편을 보지 않고 나왔다. 
10~20분 짜리 짧은 시간에 플롯을 녹여내야 하기 때문에, 극 구성을 공부하거나 영화연출을 공부하는 이에겐 교보재가 될 수도 있겠더라. 결과적으로 개막식장을 나온 후 재작년 제자가 기획했다는 전시회 오프닝이 열리는 창덕궁 근처 인미공으로 이동했는데, 뒷풀이 자리에서 영상연출을 한다는 학생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영화제를 보는 초대권을 넘겼다. 이날 술마시다가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서 귀가. 아침에 깨니 오랜만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이 찾아왔다.   


* 유럽단편영화제(eusff)의 상영 정보가 올려진 사이트와 트위터가 있음.  



KU씨네마테크





인미공

제자가 공동 기획한 전시, '( )를 위한 무대' (2013.0215~0316 인미공) 

2013년 2월 8일 금요일

0207 헨젤과 그레텔 : 마녀사냥꾼


2월7일(목) 왕십리CGV 14시. <헨젤과 그레텔 : 마녀사냥꾼 Hansel and Gretel: Witch Hunters> 시사회. 
(* 시사회 입장권을 나눠주면서 8기가 usb도 선물 받음) 


중무장한 남녀 커플(남매)의 정면이 실린 영화 포스터가 강인한 <헨젤과 그레텔 : 마녀사냥꾼 >은 그 원전을 사탕으로 지은 집이라는 감미로운 독일 동화에서 차용했다는 배경 때문에 관람 전부터 큰 반전을 기대하게 만든다. 피가 철철 넘치는 마녀 사냥의 주역으로 장성한 동화 속 남매를 지목한 점부터가 실은 반전이라면 반전일 텐데, 좀 안일한 고전 차용처럼 느껴진다.

무적의 영웅을 내세운 상업 영화의 새롭지 않은 관행을 아낌없이 유지하되 주역만 고전 동화 속 남매로 차용한 게 전부여서다. 
현대를 배경으로 삼는 액션물처럼, 마녀를 의자에 결박해서 '취조'를 하기도 하며, 개조해서 만든 전기 충격기마저 등장하고, 그레텔이 쏘는 화살은 거의 기관총처럼 발사되며, 젊은 헨젤과 그레텔은 선한 영웅적 기행을 보일 뿐 아니라 이들을 연모하는 여성팬과 남성팬의 노골적인 러브콜까지 받는다. 덕분에 꽤 농염한 배우들의 인체가 연신 노출 되는데 딱 거기까지다. 관음의 기쁨을 주기보단 식상하고 감질나다는 느낌이 든다. 세게 나갈꺼면 진짜 좀 세게 나가거나.... 영화에서 희생되는 인간이나 마녀의 죽음은 거의 예외 없이 온몸에서 살점과 피가 펑하고 터져나오는 잔혹사로 귀결되기 마련인데, 현대적 액션물이 폭력을 극단으로 연출할 때 쓰던 방식 그대로다. 그런 반복적인 잔혹사를 지켜보면서, 기성 영화들이 구축한 폭력의 무한 경쟁 때문에, 이미 허구적 폭력의 상한선에 도달해서 영화가 다루는 시대가 언제이건 폭력의 모양새는 거의 천편일률 평준화된 느낌을 받았다. 한데 3D로 확장된 울트라 폭력과 온몸을 터트리는 살해 장면마저 너무 잦은 반복 탓에 긴장감이나 차이점을 만들지 못한다. 폭음과 화염으로 휩싸인 배경 앞으로 주인공이 덤덤하고 천천히 걸어나오는 바로 그 장면! 이미 충분히 진부하지만 그것이 '헨젤과 그레텔'에서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 장면은 훨씬 더 클리세하다.  

 CGV에서 나눠준 3D 관람용 안경과 배급사에서 준 보도자료. 




영화 속 그레텔도 영화 밖 20대 여배우 제마 아터턴(Gemma Arterton)의 관능미를 아낌없이 수용.  

2013년 2월 5일 화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대중장식 (씨네21)


* <씨네21>(891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66회분.

  

견고한 장면의 양면성





상좌. 리허설 중인 틸러 걸들 1930년대
상중. 정조대왕 능행도 -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1795년
상우. 북한의 매스게임 '아리랑'을 찍은, 안드레아스 구르스키의 작품, 평양 I, 2007년
하. 중국 건국 60주년 군사퍼레이드 연습 중인 군인들 2009년 (REUTERS Joe Chan)
  

“추상이 그러했듯이, 대중 장식도 양면성을 띤다.”
늘씬한 여성으로 편성된 무용수들이 기계처럼 일치시킨 팔 다리의 기하학적 인체미. 1920년대 유흥문화의 산물이던 틸러 걸(tiller girl)의 장식적 군무를 관찰한 문화 비평가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내린 평가다. 그가 대중 장식에서 양면성을 주시한 내막은 여성 무용수들의 총화가 탄성 어린 표면적 볼거리를 만들지만, 기하하적 질서의 화려함 뒤로 무용수 개개인의 정체성은 지워지는 이면이 있어서다. 추상적 형식미를 완성하려고 내용을 소멸시켰다는 얘기. 이런 사정이야 어떻건 인체로 구성된 장식적 아름다움에 대중은 열광적 환호를 보낸다. 전체주의의 산물인 대중 장식이 강인한 연대기를 이어오는 배경일 것이다.

극소수의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조정하여 얻어낸 대중 장식에, 대다수 피지배 계층이 지지를 보내는 역설. 이 현상은 가까이는 대중 장식의 역설이지만, 멀리 보면 현실 정치가 작동하는 보편적인 생리다. 대중에게 손쉬운 환호와 위안을 안기는 이점 때문에 대중 장식은 기득권이 신뢰하는 정치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 시대 궁중 기록화와 의궤도(儀軌圖)는 조정의 주요 행사를 궁중 화원들이 완성시킨 역사적 시각 기록물이다. 이 그림들은 화원들의 집단 창작의 산물이어서 화원 개개인의 개성은 견제 받고 규범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통일된 화풍을 낳는다. 인물을 좌우로 줄지어 대칭시킨 안정적 구도를 정면 부감으로 바라보는 궁중 기록화는 단순한 사료적 가치를 떠나, 왕실의 권위와 안정성을 보장하는 문양처럼 느껴진다. 

지난 역사를 통해 전체주의의 패악을 공동체가 충분히 학습했지만, 서열 중시를 향한 집단적 합의, 남성미에 대한 숭상, 애국심의 연대감, 동일한 색으로 전체가 통일된 유니폼이 있기에, 군대는 현대 사회에서 대중 장식의 전체주의를 견인하기에 가장 유리한 거점이다. 군대 열병식이 현대적 대중 장식의 정점이 된 이유다. 절도 있게 오와 열을 맞춰 이동하는 군인들의 인체, 서열 확인을 위한 장황한 의례와 절차, 개인성을 지우고 전면으로 부상한 숭고한 대의명분, 정당화된 폭력 미학까지. 군대 존립의 허약한 명분은 열병식의 조밀한 인간 패턴 속에 잊혀 진다. 

대중 장식의 출중한 볼거리를 부인하긴 어렵다. 대중 장식은 이성 판단을 마비시킬 만큼 중독성이 강하며, 그 미학적 중독의 대가도 크다. 군중으로 촘촘하게 짜인 대중 장식이 큰 흐름처럼 밀려오는 장면은 시각적 안도감과 압도하는 위력을 동시에 체험하게 만든다. 안도와 위압이 뒤엉킨 감정은 지배자의 독재도 정당화 시킨다. 대중 장식의 양면성이다. 숭고는 웅대한 자연의 추상 앞에 느끼는 두려움과 경외감으로 정리되곤 한다. 인공미를 배제한 자연의 위대함과 연결시킨 미학 개념이다. 한편 헤겔은 숭고를 절대 왕권이 보장된 동양권 예술에서 쉽게 관찰 된다고 설명한다. 견고한 대중 장식에 제압되는 감정은 자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제조한 현대적 숭고 같다. 이때 숭고는 무서운 양면성을 띤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2013년 2월 3일 일요일

0202 김희욱(175) 선무(담) Generation Self(옵시스아트) 고명근(선컨템포러리) 사이먼 후지와라 + 제시 존스(아트선재센터)


이런 저런 자리에서 만날 적마다 말버릇처럼 '전시 순회' 얘기를 나눴던 일부 학생들과 작정하고 하루 날 잡아 전시장을 돎.



0202(토) 
김희욱 '논픽션의 픽션' (2013.0202~0217 갤러리175)
선무 '뭐하니' (2013.0202~0216 갤러리 담)
김영롱, 나나, 서한겸, 이은정, 임이혜 'Generation Self' (2013.0118~0208 옵시스아트)
고명근 '환상 공간' (2013.0119~0210 선컨템포러리)
사이먼 후지와라 (2013.0202~0324 아트선재센터)
제시 존스 'The other north 또 다른 북(北)' (2013.0202~0324 아트선재센터)   



김희욱(175)
 '고독'이란 제목을 단 혼합매체 설치물 

 전시장에 비치된 굉장히 짧은 평문이 적힌 A4용지를 집어와서 후에 읽고 있자니, 필자가 작품을 보면서 진심으로 느낀 바를 썼을지 궁금했다. 아니면 작가의 구술을 듣고서 이론전공자답게 과도한 살을 붙인 건지도. 


선무(담)

 밥집에 가서 평범한 기호(嗜好)의 위력에 관해 얘기 나누던 중 거론 된 작품 중 하나.



Generation Self(옵시스아트)
 함께 전시 순회를 한 학생 7명 중 일부 

 어디서 많이 봤다고 얘기하니까, 학생들이 '홍대 거리에 많이 그려진 그래피티'의 작가라고 했다. '나나'라는 예명을 쓴다나. 직설적 성향의 젊은 남성 작가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성 작가라함. 

 전시장 옵시스아트 1층 통유리를 통해 바라본 외부


고명근(선컨템포러리)
 밥집에 가서 평범한 기호(嗜好)의 위력에 관해 얘기 나누던 중 거론 된 작품 중 또 다른 하나.


사이먼 후지와라(아트선재센터)


 어쩌라고?



 Patrick Heron, Horizontal Stripe Painting, November 1957 - January 1958 



제시 존스(아트선재센터) 



아트선재에서 같은 날 개막한 사이먼 후지와라와 제시 존스는 모두 영상물의 비중이 높다(제시 존스는 전부라고 보면 되고 상영시간이 매 작품당 무려 1시간 가량 한다) 일행도 있는 데다가 개막식날 60분짜리 영상물 2편을 보고 오긴 어려워서 조금 둘러보다가 왔다. 더구나 5분 가량 지켜본 바로는 구미가 당기지 않기도 했고. 상황 설정극을 표방해서 배우를 출연시켜 진행하는 연극적 구성의 영상 작품에 매력을 느낀 기억이 나는 많지 않다. 이런 부류의 영상물을 기획자가 전부 감상하고 평가한 후 초대 작가로 결정할지 늘 궁금하다. 

사이먼 후지와라는 '게이, 작가의 출연, 개인 고백이 토대인 극의 구성,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과거 한 순간 설정, 혼혈아, 예술 작품에서 느끼는 주관적인 질감 회고'에 이르기까지 기획자의 호감을 잡아 당길만한 요인을 두루 갖췄다. 그렇지만 실마리만 던져놓는 짐짓 쿨하게 종영하는 영상물 <거울 단계>는 사이먼 후지와라와 정서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극소수에게만 호소력을 행사할 것 같았다. 함께 본 학생 중 퍼포먼스에 주력하는 일부 학생은 자세한 이유를 내놓진 못했지만 맘에 든 영상이었다고 말했다. 

0116 Scout(이마주) 임의 자막(SP) 0123 KAP심사(아트블루) 0124 산책자들(스케이프) 0126 이원우(루프) 0127 홍원석(문래예술공장) 장지아(꿀)


0116(수) 
'Scout' (2013.0108~0119 갤러리 이마주)
'임의 자막' (2013.0116~0130 갤러리SP) 
0123(수)
'2013 KAP 온라인 개인전 심사' (2013.0123 아트블루 사무실) 

0124(목)
임소담 유창창 이해민선 '산책자들' (2013.0124~0302 갤러리 스케이프)

0126(토)
이원우 'Well Done, Good Luck' (2012.1228~2013.0128 대안공간 루프)

0127(일)
홍원석 '문래일기' (2013.0104~0128 문래예술공장)
장지아 (2013.1월말 꿀)



Scout(이마주)
 변예슬, 똥싸러 간건가 2012 


임의 자막(SP)
 연전에 각기 다른 미대에서 가르쳤던 제자 둘로부터 각기 다른 전시회 소식을 알리는 문자를 받아서 메모해뒀다. 두 전시장 모두 우연히 강남 지역에 위치한 터라, 같은 날(1월16일) 방문하면 좋겠다 싶어서 그렇게 일정을 짰다. 하나는 '갤러리 이마주'가 대학 졸업생 대상으로 하는 신진 발굴 프로그램 전시였고, 다른 하나는 '갤러리 SP'에서 과학기술대(내가 출강 나가던 시절은 '산업대'였다) 졸업생 중에 우수작을 선별한 전시회. 갓 미대 졸업 예정자들로 구성된 그룹전에서 눈에 띄는 작품과 만날 확률은 매우 낮지만, 그래도 볼만하다. 이유는 수평적인 정보 공유가 보장된 세상임에서도, 현장 미술이 미대의 일반적인 형편에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확인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졸업자 가운데 그럭저럭 유능한 학생들로 편성된 전시회일 텐데, 현실의 미대들은 현장미술계로부터 얼마나 고립된 섬처럼 당당하게 존립하는지 이런 전시를 통해 확인하게 된다.   



KAP심사(아트블루)


 심상용 김노암 이명옥 
 김소영(KAP), 또 다른 KAP직원(이름 기억 안남)

온종일 1mm 내외의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만 믿고, 심사장으로 쓰일 합정동 '아트 블루' 사무실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는데, 쉼없이 꾸준히 내리는 잔비를 뒤집어 쓰면서 자전거로 집과 심사장을 오갔다. 해외에 소개할 대표선수 20명 남짓의 작품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심사 자리. 기존 작가 데이터 베이스를 보려면 여기에=> KAP  



산책자들(스케이프)





 전시 후 밥모임. 2011년 서교예술실험센터 박은정, 2009년 서교육십 인정게임 웁쓰양 


이원우(루프)




 단순한 구성이지만 갈피 잡기는 쉽지 않은. 그렇지만 시감각의 자극 한방으로 각인을 남긴 다매체 전시회.  



홍원석(문래예술공장)

 문래예술극장에서 상영한 30분 내외의 영상물은 유튜브에 '문래일기'로 검색하면 3회 분량으로 나뉜 영상클립이 올려져있다.

현대 미술의 한 흐름이자 더러는 현대미술의 존립을 위한 알리바이로처럼 느껴지는 '관계맺기' 전술이 있는데. 결과물의 완성도야 어떻건 관계성 미술은 '공동체 정치적 올바름 공공가치 소통 의지'처럼 가시적으로 담보하는 가치들을 확보해선지 화단에서도 호소력을 꽤 발휘하는 모양이다. 상대적으로 개인 결과물을 전시장에 늘어놓고 극소수의 지인과 개인적 교분을 맺는 게 미술 전시회의 일반적인 광경이며 또한 허망한 결론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취향의 문제를 접어둔다면 관계성 미술이 화단 일각에서 크게 선전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나는 관계성미술을 현대미술 생존을 위해 창작자 기획집단 공공기금 사이에서 이뤄진 합의처럼 느껴왔다. 


장지아(꿀)



'꿀' 1층 카페에서. 홍원석 안경수 장지아. 
오후1시부터 저녁8시까지 작가(장지아)가 손수 만든 과일차를 혼자 카페(꿀)에 온 손님에게 예고없이 대접하는 기획 행사. 일견 미술계에서 관찰되는 '관계 맺기'의 방편처럼 보이는 이 기획물의 내막을 여기서 털어놓긴 그렇고, 대신 작가에게서 받은 문자를 그대로 옮긴다. → "현실에 대항하는 장지아적인 저항법"  작년 12월말부터 이 저항적 기획물을 위해 직접 과일차를 만들었다고 한다. 과일차가 동이 날때까지 한다고 했는데 지난주에 끝났을 거다. 

2013년 2월 1일 금요일

0201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 보수: 잘 늙기의 어려움




2월1일(금)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시사회를 왕십리CGV에서 봄.

이 영화는 스테디셀러 <다이하드> 연작 중에서 최신작인 5편으로 올해 2월6일 첫 개봉 예정이다. <다이하드> 스테디 셀링 연작의 원점 격인 1편이 성황리에 개봉한 시점이 1988년이니, 이 연작 신화 자체를 애당초 처음 들어봤을 '신세대'가 좀 많을 줄로 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비유하자면 <다이하드>는 2000년대 전후 흥행 연작을 쏟아낸 <매트릭스>의 유명세를 8,90년대에 누린 액션 블록버스터의 대명사였다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검색해보니 10년 사이 달러 가치의 차이가 생겼겠지만, 박스오피스에서 <다이하드>1편은 $140,767,956 <매트릭스>1편은 $463,517,383를 기록했다고.) 

<다이하드>가 시대착오적이라는 건 최신판 격인 이번 영화가 활동무대를 러시아로 확장하는데에서 볼 수 있다. 미국에서 제작된 애국주의 액션 영화들이 미국의 대립항으로 설정할 때 유효하게 먹혔던 냉전이나 소련이 90년대 초 종적을 감추자 다른 '주적'들을 찾아나선 점을 감안할 때, 여태 (구)소련에 대한 낡은 적개심에 호소하고 있는 거다. 이런 낡은 영화적 장치로도 대박을 올릴 수 있는 상황은 마치 한국 사회에서 자칭 정치적 보수 유권자에게 자칭 보수정당이 호소하는 전략과 유사해 보였다. 

대중 블록버스터로 분류될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플롯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작정적인 완력에 비대칭적으로 기울고도 대박을 기대할 수 있다는 현상을 보자. 이는 무정형으로 분산된 일반 관객의 평범한 미감과 영화적 감동에 대한 그들의 평범한 기대치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확인시키는 것 같다. 한나 아렌트 말까지 끌어들이면 악(惡)이란 본래 평범한 것에서 비롯되듯이, 후지고 시시한 영화도 후지고 시시한 다수의 관객 때문에 대박이 날 게다.   
때문에 브루스 윌리스 처럼 낡은 '올드 보이'를 내세우고, 결과마저 너무 예측 가능한 무수한 클리세로 채운 플롯으로도 대중의 평범한 환심을 사로 잡는 영화 현실로부터, (다시 한국 정치현실에 비유하면) 정치 생명이 이미 끝장나서 퇴물 신세인 정치판의 올드보이를 대거 불러들여 대선 흥행에 성공할 수 있는 정치 현실이 떠오르는 거다. 그러니 이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서, 현실의 비정상성을 지탱해줄 만큼 몰취향하고 몰상식한 대중 유권자의 정치 수준이 연상될 수밖에. 때문에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를 지켜보는 내내 대중(취향)이 얼마나 무서운 세력인지 새삼 깨닫는 값진 교훈도 얻는다.
플롯이 실종된 흥행영화, 핵심은 없고 명분만 세운 우익정치, 몰상식한 대중 취향, 이 모두 Die hard(끈질기게 살아남음). 


*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란 제목으로 국내 개봉된 5편의 원제목은 <A Good Day to Die Hard>. 왜 저렇게 고쳤지.
** 이 영화에는 <잭 리처>(엮인글)에 출연한 '제이 코트니'가 다시 만날 수 있다. 액션물의 세대교체.  
*** 작년 12월31일부터 올해 2월1일까지 관람한 영화가 헤아려보니 6편이나 되더라. 
**** 금주 <한겨레21>(947호)의 특집 볼 만하다. 특집 제목이 '잘 늙기의 어려움'. 한국정치 수준을 퇴행시키는 조연 배우들 격인 극우 노인단체 '어버이 연합'의 정서 상태와 작년 박근혜를 지지한 시인 김지하, 그리고 변절한 낡은 민주당 원로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를 다뤘다. 특히 후자를 표현하는 캡션이 재밌다 ==>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배신자'라는 낙인보다 컸던 것일까." 




≫ 한광옥·김경재·한화갑(왼쪽부터) 등 동교동의 가신들은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당선인을 지원했다. ‘소멸’에 대한 두려움이 ‘배신자’라는 낙인보다 컸던 것일까. 한겨레 신소영 기자, 사진공동취재단  (기사보기) 



잘 늙기의 어려움 [2013.02.04 제947호]
[특집2] 시인 김지하의 말년 보며 ‘늙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 분별 없는 탐욕과 인정 욕구 내려놓고 아름답게 저무는 비결은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비가 새는 모든 늙은 존재들이/ 새 지붕을 얹듯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잘 안다 이렇게 된 것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초’ 중에서)  

≫ 갈 곳 없는 노인 중엔 버릇 없는 ‘젊은 것들’과 자신을 방치하는 사회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다 극우의 행동 전위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2011년 7월 극우 노인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 관계자가 서울 대한문 앞에서 진보단체가 설치한 농성천막을 강제로 철거하려다 이에 항의하는 한 여성의 목을 조르고 있다. 한겨레 김봉규 기자



말년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경우는 비단 김지하뿐만이 아니다. 널찍한 사무실과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오는 ‘한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연 없는 연줄 다 동원해 이력서를 밀어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부 ‘진보 원로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원로와 퇴물은 ‘한 끗’ 차이
민망한 일이다. ‘원로’라 불리던 이들이 속절없이 추락한다. 원로란 본디 “나이나 지위, 덕망이 높은 벼슬아치”를 일컫는 말이었다. 굳이 관직이 아니어도 사회의 지도적 위치에 오르는 게 가능해진 현대에 이르러선, 원뜻의 계급적·윤리적 차원이 탈각되고 개념의 외연도 확장됐다.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쯤을 이르는 보통명사가 된 것이다. 이제 법조인, 정치인, 교수 등 전통적 엘리트뿐 아니라 상공인, 교사 같은 통상의 직명 앞에도 원로라는 말이 붙는 게 어색하지 않다. 존숭받던 원로가 쉰내 나는 퇴물로 추락하는 것도 한순간이다. 원로와 퇴물은 말 그대로 ‘한 끗’ 차이다.
김지하(72). 총칼 든 박정희와 맞짱 뜨며 저항의 1970년대를 선도했던 한 시절의 영웅이, 돌연 연민과 안타까움을 부르는 ‘보통 노인’으로 주저앉아버렸다. 지난해 대선을 앞두고 그가 야당의 대선주자와 거물급 지식인을 겨냥해 쏟아낸 언어의 신랄함은 과거 ‘오적’에서 보여준 치열한 풍자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그것은 ‘대한민국어버이연합’으로 상징되는 동년배 우익들의 저잣거리 언어에 가까웠다.

여기저기 “비가 새는” 조짐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래서 “새 지붕을 얹듯” 그 또한 “사랑을 꿈”꿨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나날이 희미해지는 세간의 인정(認定)을 회복하기 위해, 지금의 김지하를 만든 실존의 지반을 스스로 허문 꼴이 돼버렸다. 언론인 고종석은 “마음이 망가진 사람의 허튼소리”라 일축했지만, 몇몇 평론가들에게 이 사건은 “김지하의 평범화”(이택광)이자 “영웅주의의 무구한 타락”(황호덕)을 드러내는 비범한 표지로 받아들여진 듯하다. 오죽하면 <조선일보> 선임기자 최보식조차 “선거와 정치판에서 잘 싸우는 역할은 그와 같은 시인이 아니어도 할 사람들이 줄을 서 있다”고 안타까워했을까.
그러나 말년의 행보가 논란을 빚은 경우는 비단 김지하뿐만이 아니다. 널찍한 사무실과 기사 딸린 관용차가 나오는 ‘한자리’를 노리고, 있는 인연 없는 연줄 다 동원해 이력서를 밀어넣던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부 ‘진보 원로들’을 사람들은 기억한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시민사회 원로’라는 이름으로 정치권 외곽에 자리를 잡고 중요한 국면마다 발언권과 영향력을 행사한다.
지난해 두 차례의 선거 국면에서 보여준 ‘시민사회 원로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정파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게 쉽지 않은 때일수록, 난마같이 얽힌 상황을 정리하고 중재할 ‘어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게 진영 내 다수 의견이었다. 하지만 양보를 압박받는 쪽에선 ‘권리만 누리고 책임은 안 지려는 훈수정치’라며 반발하기도 했다. 지난 대선 당시 시민사회 원로들로 구성된 ‘희망 2013·승리 2012 원탁회의’가 안철수 후보의 독자 행보에 거듭 제동을 걸자 친안철수 성향 트위터 이용자들 사이에선 “선출되지도, 책임지지도, 교체되지도 않는 권력인 소위 ‘원로’라는 무리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kongheejun)는 격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

≫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박정희와 맞짱 뜨던 한 시절의 영웅이 연민과 안타까움을 부르는 ‘보통 노인’으로 주저앉아버렸다. 지난해 12월13일 시인 김지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화관을 찾아온 박근혜 대통령 후보와 환담을 나누었다(위). 18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진 지난해 12월19일 서울 종로보건소에 마련된 투표소 앞에 유권자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유독 노인들이 눈에 많이 띈다. 사진공동취재단, 한겨레 김봉규 기자
진보에 ‘원로’라는 집단이 존재하는 사실부터 난센스라는 지적도 있다. 현존 질서와 전통의 권위를 부단히 의심하고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진보의 진정한 전통(‘반전통의 전통’)이라 여기는 문화적 전위주의의 영향력이 여전한 탓이다. 실제 ‘축적된 지혜’의 역사적 집적물로 간주되는 ‘전통’이나, 그것의 인격적 구현체로 여겨지는 ‘원로’의 존재에 대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평가해온 쪽은 진보가 아니라 보수였다. 이 점은 ‘원로회의’ 성격의 자문(의결) 기구가 대체로 신분제적 질서가 잔존해 있거나 보수세력의 영향력이 뿌리 깊은 곳에서 발달해온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반면 진보에게 ‘나이듦’이란 질병과 빈곤, 고독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사회적 약자가 되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사회 구성원들이 노년이 된 뒤에도 인간의 자존감을 잃지 않고 존엄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사회적 보호망을 제공하는 일은 진보 정치세력의 중요한 임무였다. 노년층을 위한 보편적 연금과 의료, 돌봄 서비스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부 아래서 발달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나라에서 노인 인구비의 증가는 산업구조 및 가족제도의 변화와 맞물려 20세기 중반부터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제 한국에서도 노년 세대뿐 아니라 모든 연령집단의 고민거리가 되고 있다. 고령화 속도가 어느 나라보다 빠르고, 나이듦을 대하는 태도 역시 가파르게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민의 강도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가장 심각한 것은 물론 경제적 문제다. 국가의 복지 체계는 걸음마 단계인데, 가족의 돌봄과 부조 기능은 급격히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 결과를 보면, 노인 가구 10가구 가운데 6가구가 최저생계비 이하의 소득으로 생활하고 있다(2012년 6월 기준).
노년기의 내리막이 가파르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경제적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는 막막함,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은 노년의 일상을 한층 황폐하게 만든다. 게다가 노년의 삶을 어떻게 가꿔갈지에 대해 별다른 학습이나 고민도 없이 황혼을 맞이했으니, 부딪히는 상황마다 실패와 난감함의 연속이다. 이런 어려움의 강도는 현역 시절 높은 직위에 있던 사람일수록 더하다. 어딜 가도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해주는 환경에 길들여져 있다 보니, 스스로 일상을 챙기는 일에 너무도 미숙한 탓이다.
이들 중엔 ‘왕년의 끗발’에 기대거나, 검증 안 된 ‘경륜’을 앞세워 한번 물러나온 무대를 기어이 다시 오르려는 이도 있다. 그러나 분별 없는 탐욕은 민폐를 낳는다. 큰 선거가 있을 때마다 여의도와 광화문의 유력 캠프에 줄을 대고 호시탐탐 입조(立朝) 기회를 노리는 ‘전직’들, 정권 교체기마다 공기업이나 정부투자기관 감사 자리 하나 얻어보려 이리저리 이력서를 들이미는 정·관·언론계 퇴직자들의 모습은 딱하고 처연하다. 요행히 몇몇은 중심가 사무실의 회전의자를 차지하고 2~3년쯤 풍족한 급여를 받으며 우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위신을 지켜주느라 지출되는 비용은 공공부문에 20~30대를 위한 신규 일자리를 여럿 만들고도 남는 규모다.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결합하면 노추
그나마 대부분의 노년은 이런 자리에 접근하지도 못한다. 정년을 맞아 직업 전선에서 쓸쓸히 퇴역했지만, 집에만 눌러 있자니 가족들 눈치 보이고 나가자니 딱히 갈 곳도 없다. 이들 중엔 서푼어치 권위의식으로 가족들 위에 군림하려다 왕따를 당하거나, 드물게는 버릇 없는 ‘젊은 것들’과 자신을 방치하는 사회를 향해 울분을 쏟아내다 극우의 행동 전위로 나서는 경우도 있다. 물론 거개의 노인들은 집 안에서 TV를 끼고 외로움을 달래거나 무료 전철을 타고 도심 공원에 나가 또래 노인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분별 없는 탐욕의 또 다른 귀착지는 노추(老醜)다. 김지하로 다시 돌아가면, 평론가 황호덕(성균관대 교수)은 그의 변신이 “노년의 외로움의 징표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는 묻는다. “젊음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찬 이곳에서 노년이란 무엇일까.” 그에게 김지하 같은 “한때의 젊은 재능들”이 보여주는 납득할 수 없는 노년은 “오직 커다란 삶의 변곡과 전향을 통해서만 스스로의 존재를 환기시킬 수밖에 없었을 그들의 사정”을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비극적이다. 이어지는 고백은 이 뒤늦은 깨달음에 대한 자책이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노년에 대한 사유가 그간 얼마나 부재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정작 두려워하는 건 누구라도 김지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외로움과, 그 외로움의 근원에 자리잡은 인정 욕구는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는 말한다. “그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확신할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아무리 독불장군이라도 미래의 어느 시점엔가 자신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으리란 믿음 없이는 당대의 고독을 감당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은 평생에 걸쳐 지속되는데, 이런 인정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자들을 일러 ‘속물’이라 한다. 속물은 타인의 인정을 구하는 과정에서 과시와 협잡과 기만도 마다 않는다. 이런 행태의 속물성이 생물학적 늙음과 만나면 노추가 된다.
1990년대 초 황지우가 남긴 ‘성요한병원’이란 시는 인정에 대한 사람들의 병적인 집착을 경쾌하게 조소한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처남의 병문안을 다녀온 뒤 이 시를 썼다. “결국, 사람이란 자기 알아달라는 건데/ 그렇지 못하니까 미쳐버린 거다/ 권력도/ 부부싸움도 그렇다/ 자기 알아달라는 치정이다/ …/ 여자만 보면 자기의 자지를 꺼내 보인다는 목수 김씨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는 웃지 않고/ 나는 웃었다/ 병원을 나올 때에야/ 문 앞에 흰 석고 성자가 서 있었다”
노인과 약자에게 불친절한 이 시스템이 하루아침에 뒤바뀔 리 만무하니, 당장 의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적절한 양생술(養生術)과 욕망을 내려놓으려는 부단한 수행밖에 없는 것일까. <노인혁명>을 쓴 사회학자 홍승표(계명대 교수)는 “그렇다”고 말한다. 문화인류학자 김찬호(성공회대 교수)가 제안하는 노년의 삶도 비슷하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반쯤은 저 세상에 이미 가서 살고 있는 영혼, 현실의 속물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 공정하고 투명하게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안목, 영욕의 세월을 되돌아보면서 생애의 고결하고도 황홀한 기쁨을 빚어내는 내공…. 그러한 위상에서 노인의 권위도 되살아날 수 있다.”(김찬호 ‘노년, 무를 향한 정진’ 중에서)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이쯤이면 군자를 넘어 성자의 경지다. 여기저기 비 새는 범부들 처지에선 언감생심이다. 그런데 아무나 노력해 도달할 수 있으면 그것이 왜 군자의 도, 성자의 삶이겠나. 그러니 지레 겁먹거나 낙담하진 말 일이다. 군자나 성자가 못 되어도, 외롭다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목수 김씨처럼 애먼 처자들 앞에서 바지춤 풀어헤치는 짓만은 피할 일이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