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2일 금요일

0703 심사(송은) 무라카미 다카시(플라토) 0706 강홍구(원앤제이+트렁크) 박보나(조선) 이중근(아트파크) 0710 이세경(송은) 알폰스 무하(한가람) 쭈뼛쭈뼛한 대화 + 정희승(아트선재) 0711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화이트블럭)

0703(수)
본선 심사 (15시, 송은아트큐브)
무라카미 다카시 '수퍼플랫 원더랜드(2013.0704~1208, 플라토)

0706(토)
강홍구 '사람의 집 - 프로세믹스 부산' (2013.0704~0730 원앤제이 + 트렁크갤러리)
박보나 'friends' (2013.0704~0724 갤러리조선)
이중근 '카르페 디엠' (2013.0612~0709 아트파크)

0710(수)
이세경 'Recollection' (2013.0621~0810 송은아트스페이스)
알폰스 무하 '아르누보와 유토피아' (2013.0711~0922 한가람미술관)
'쭈뼛쭈뼛한 대화' (2013.0711~0818 아트선재센터 2층)
정희승 '부적절한 은유들' (2013.0706~0818 아트선재센터 3층)

0711(목)
임동식 김성남 구현모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 (2013.0705~0908 화이트블럭)




심사(송은)

 폭넓은 경력을 이미 확보한 작가들이 본선 심사 후보로 올라와선지, 평가 대상이 된 후보작들 대부분이 평균 이상의 수준을 보여줬다. 본선 후보작들의 면면을 통해 뉴미디어와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원예술이 하나의 추세를 형성한다는 점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설령 미디어 장비를 창작의 도구로 쓰지 않은 평면 회화 작업에서조차 뉴미디어에 지배받는 작가의 사유가 반영된 작품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다. 이 같은 창작 추세가 단순한 현상 이상이 된 오늘날, 전에 없던 조형 문법으로 재편된 화단의 변화를 새로이 풀이하려면 비평가도 거듭 자성해야겠다는 생각을 심사하면서 했다. 

그렇지만 뉴미디어를 탑재한 후보작 가운데에서 눈에 띠는 발상이나 독창적인 재미를 보여준 작품은 태부족하다고 느꼈다. 뉴미디어가 초래한 창작 환경의 변화를 단조롭게 조망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설명조로 기술하는 작업도 보였기 때문이다. 후보작들 사이의 우열을 가르는 기준으로 내가 정한 건, 색다른 재미와 당장은 미흡해도 실험성이었다. 

또 본선 심사에 출품된 단 한 점만으론 후보 작가의 진가를 온전히 평가하기 어려워서, 모든 후보작들의 전력을 담긴 작가 포트폴리오를 평가의 병행 자료로 참조 했다. 

흔히 이런 공모전 심사는 심사위원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심사하게 만드는데, 송은 심사는 심사위원이 각자 원하는 시간대에 와서 평점을 매기고 가면, 그 점수들을 합산해서 결과를 얻는 방식을 쓴다. 맘에 든다. 심사위원들이 전부 모인들 합리적인 회의로 연결되지도 않을 뿐 더러, 생떼부리는 위원과 마주쳐야 할 때도 드물게 있다. 심사위원을 한 자리에 모은들 심사의 공정성이 담보되는 건 아니란 얘기이다. 





무라카미 다카시(플라토)










 - 무려 12월까지 하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개인전의 전시 기간은 현존하는 거물의 방한을 증명한다. 직접 보지 않고도 대략 머리 속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많은 이미지가 노출된 무라카미 다카시의 한국 전시는 작가의 지명도를 대비 했을땐 실망이 더 커서, 관람을 권하고 싶지 않다. 
- 7월말 출국하기 직전에 무라카미 다카시의 플라토 개인전에 관한 리뷰를 써서 올릴 예정. 
- 개막식의 플라토 앞에 전경들이 깔려있어서 영 부조화스러운 풍경을 연출했다. 뭐... 대통령이라도 온다니?  





강홍구(원앤제이+트렁크)




 포커스나 화질에 개의치 않는 강홍구의 오랜 사진술을 전시장 두곳에서 만날 수 있다. 원앤제이의 경우 전시장의 층에 따라 작품 사이즈와 화면의 균질성이 일치하는 것 같았는데, 순간 "아. 여긴 상업화랑이었지."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자 화면의 프레임들이 달리 읽히게 되더라. 화려하지 않은 남도의 낡은 건축물의 집단적 파사드를 담은 사진이 많은데, 이게 꽤 이국적인 정경으로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도시 문제라는 정치적 이슈를 살짝 덧붙인 이국적인 파사드로 읽힐 만한.   



박보나(조선)
 화단 일각에서 당대 시각예술의 유력한 추세 가운데 '관계미학'이란 현상이 있는데, 좁은 전시장 안에 그 현상을 압축시킨 개인전 처럼 보였다. 전시는 ‘영상 두 점, 인쇄된 포스터 설치물 한 세트, 퍼포먼스’로 구성되어 있다. 상이한 3 종류의 매체 작업이 한 공간에 포개진 셈인데,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미술 전공자마저 문맥을 찾기 힘들어 어리둥절한 전시일 게 분명하다. 

두 점의 영상물은 작가의 주문으로 제3자의 행위를 영상으로 기록했고, 퍼포먼스 역시 작가의 요청으로 전문 피아니스트가 전시장에 상주하며 연주하고, 인쇄 설치물은 관객의 자발적인 개입이 있을 때(포스터를 무료로 집어가라는 설명이 벽에 붙어있음) 완성되는 점 등을 종합하면, 출품된 모든 작업의 전제 조건이 제3자의 관계적 개입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런 관계미학의 창작은 보편적인 전시의 맥락과 너무 차이가 커서 난해하다. 하지만 역설은 이 난해한 관계미학의 출발이 실은 이론 과잉과 극소수를 위해 존재해온 제도미술에 대한 내부의 반발이란 점이다.  

아르테 포베라처럼, 제도 예술계가 삶과 예술성 사이에 만든 거리감을 좁혀보자는 자성에서 비롯된 작업들로 보인다. 관람자 중 극소수와 접촉면을 밀착하려는 이런 관계미학적 작업은 근자에 시각예술에서 관찰되는 추세 중 하나이며, 제도 예술의 문제점이 초래한 역설적 현상 같기도 하다. 미술원 출신자 가운데에 관계미학의 창작자 내지 기획자가 많은 것도 흥미로운 사실. 




이중근(아트파크)



 관람 후기와 향후 창작 방향에 대한 내 견해는 저녁밥을 같이 먹으면서 작가에게 얘길 했다. 
간추리면 격의 없는 협업의 필요성, 작품 스케일의 확대, 다매체와 결합.  




이세경(송은)








 여러 전시장에서 이세경의 작품을 이미 봐왔기 때문에 오래 관람할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송은까지 간 김에 근처(청담동)에서 열리는 다른 전시장들을 보려던 애초 계획을 취소하고, 이세경 전시를 오래 보고 왔다. 맨 위층의 변형된 전시공간은 이 전시의 방점 쯤 될 것이다. 전시 제목이기도 한 Recollection이 그 맨위층 전시장에 있는데, 무수한 소품들을 비스듬한 양쪽 벽에 걸고 깨알같은 글씨로 사연을 적은 작품인데, 그 사연까지 모조리 읽으면서 봤다. 사전에 설명을 듣지 않고 전시를 접해서 신작 Recollection을 보면서, 강아지를 머리털로 재현한 작품(작품에 개가 등장하면 나는 점수를 후하게 주는 경향이 있음)이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3번의 2악장(아다지오)이 맘에 들었다는 사연을 읽고선, 내심 "흠 이 작가가 나랑 취향이 비슷하군."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23번은 내가 20대 중반에 겪은 짧은 연애가 파경을 맞았을때, 상대방에서 CD로 이별 선물까지 했던 마이 페이보릿이다. (유튜브를 뒤지니까 내가 당시 그녀에게 선물했던 연주자의 2악장이 있네. -- 프리드리히 굴다 피아노 / 아르농쿠르 지휘) 

한데 자기 고백으로 구성된 Recollection 작품을 계속보고 있자니, 고백자가 남자로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다시 속으로 "이세경이 여자 이름이지만, 남자도 쓰는 이름이지. 아.. 이세경이 남자 작가였구나....몰랐네" 했다. 그러다가 마주친 머리털로 재구성한 사진가 김도균의 작품을 보고서야, 다른 사람들의 사연으로 Recollection이 구성되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이 준 머리카락과 사진으로 재현한 작품 모음. 







알폰스 무하(한가람)




 무하의 기본 스타일은 정중앙에 배치되는 여신 + 그림의 둘레에 배치되는 식물 패턴 문양 + 그림의 검정 윤곽선 + 여인 4명으로 구성된 4면 주제화(봄 여름 가을 겨울 / 오전 정오 오후 밤..... 따위) 이다. 거기에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의 근대적 감성이 덧붙는다. 감미로운 화면과 장식이 많다. 하지만 대동소이한 패턴이 보는 내내 반복되기 때문에, 새로움을 느끼기 보다 차차 지루해진다.  

19세기 후반 작업에는 여성의 측면 프로필을 강조하려고 애쓴 것 같았다. 무하의 전시에서 만나는 작품의 대부분이 채색 석판화인데,  대량 생산으로 창작의 본질이 넘어가서 원본성의 가치가 무색해진 오늘날 미술계 현실의 아무 먼 원조 쯤 될 것이다. 

전시를 관람하는데, A일보 기자라고 밝힌 이가, 작품을 어떻게 봤냐고 묻더라. 잘 모르겠다고 답하니까 그냥 느낌만 좀  말해달란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니 다른 분에게 물어보시라고 말하고 돌려보냈다.  관련 기사를 찾아보니 왠 관객의 '그냥 느낌'이 인용되어 있다.  
=> "장식적인 요소들이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니 놀랍다."   미술 전시 기사는 이렇게 작성된다. 





 무하 개막식을 보러 한가람에 들렀다가, '디지털 명화 오딧세이'라는 블록버스터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전시장 안에 들어가 보진 않았지만, 명화를 고해상도로 촬영해서 디지털 화면으로 확대한 전시여서, 뭐 저런게 다 있나 싶었다. 하지만 전시장 바깥에서 호객하는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꽤 높은 해상도로 명화들이 재현되고 있었다. 나름 볼만할 거 같다. 




쭈뼛쭈뼛한 대화(아트선재2층)




 관계미학의 성지가 된 미술원와 아트선재의 만남. 



정희승(아트선재3층)




 사진계 인사들이 많이 방문한 사진계 행사. 
감상평은 좀 더 생각해 본 후에.




기억의 시간 시간의 기억(화이트블럭)






헤이리의 전시(장)는 어지간해선 안 가게 되는데, 출품 작가 세분 중 한분(임동식)과 전시장 기획자 두 분(이윤희, 임종은)을 만나러 영화 <마지막 4중주> 시사회를 본 직후 곧바로 헤이리로 갔다. 원래 전시 오프닝의 주 목적은 리셉션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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