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16일 화요일

쿠사마 야요이 Yayoi Kusama 작가론 - 전시 서문 (대구미술관)

대구에서 열리는 쿠사마 야요이 개인전 <금세기 최고의 작가 쿠사마야요이 특별전 KUSAMA YAYOI, A Dream I Dreamed>(2013.0716~1103 대구미술관)의 전시 서문으로 쓴 글. 프리 오프닝은 오늘 열렸는데 나는 참석하지 않았다. 쿠사마 야요이의 세계를 포괄적으로 확인할 기회는 이미 2011년 스페인 마드리드에 방문했을 때, 마리아 소피아 미술관에서 개최된 야요이 쿠사마 회고전(엮인글)으로 관람 한 바 있다.


쿠사마 야요이: 예술을 초월한 사회적 브랜드





반이정 미술평론가



일본인 여성 아티스트 쿠사마 야요이는 84세의 고령이지만 원로 예우를 받으며 과거사로 정리되는 길을 택하지 않은 엄연한 현역이다. 노구의 그녀를 끊임없이 무대 위로 부르는 수요는, 지난 현대미술사의 중량감 있는 미술 사조들을 두려 섭렵한 작가의 이력이 배후에서 작용할 것이다. 단일 미술 운동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고안한 그물망 무늬 회화처럼 다방면의 미술운동에 연루되어 온 쿠사마 야요이다. 지나간 미술사를 동시대에 참조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실존 인물인 점도 그녀의 희소가치를 높인다.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미국행을 결심한 1957년 전후에 전념한 ‘무한 망사 Infinity Net’ 회화 연작은 후일 쿠사마 야요이의 전매특허가 된 ‘물방울무늬 Polka Dot’의 시원쯤 될 텐데 당시 ‘무한 망사’ 그림은 그 무렵 서구 화단의 주류로 눌러앉은 모노크롬 추상화나 추상표현주의와 연결 고리를 갖는 것이었다. 60년대 후반 들어 그녀가 매진한 해프닝과 퍼포먼스 역시 그 무렵 서구에서 유행한 비주류 예술 운동이었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1980-90년대 내놓은 평면과 입체 작업은 기존의 ‘무한 망사’와 ‘물방울무늬’라는 자기 브랜드에 평면감과 원색을 증폭시킨 결과물로서, 장식성이 강화된 패턴이 만드는 ‘가와이(귀여운)’한 첫 인상 때문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일본 대중문화의 코드를 흡수한 것으로 느껴졌다. 당연히 일본 네오팝의 전신으로 그녀를 지목하는 이유가 되었다. 쿠사마 야요이의 영향력은 꾸준한 활동력에 더해,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치료를 받는 그녀의 정신 병력과도 연관이 깊다. 반복되는 패턴을 강박장애증이 만드는 것이라는 해설에 대중과 비평은 작가와 작품 모두에 호기심을 집중시켰다. 동양 여성이라는 정체성 또한 비평가에게 성소수자와 인종소수자라는 매력 있는 코드를 제공했고, 동양과 서양을 잊는 가교로 그녀를 기억하게 만들었다. 쿠사마 야요이라는 주제어 밑으로 강박장애, 반복, 알몸 해프닝, 섹스어필, 자기 노출, 연극성, 물방울무늬, 거울방 등 각주를 달고 싶은 무한한 주제어들이 매달린다.


일본, 미국행, 다시 일본
1929년 일본 나가노현 마츠모토의 유복한 가정에서 넷째로 태어난 쿠사마 야요이는 1948년 엄격한 도제식 학풍을 고수하는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전통 일본화(日本画 Nihonga)를 배우면서 미술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사제 간의 절대 복종을 중시하는 도제식 교육과 호흡을 맞추기 힘들었던 쿠사마 야요이는 다양한 서양화 기법(과슈, 수채화, 유화)을 익혔으며 일본에서 열린 첫 개인전도 다매체로 완성한 그림을 벽에 걸었다. 1957년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내 미국행을 결행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패한 후 일본의 허무주의적 분위기로부터 탈출해 미국으로 향한 예술가는 많았다. 오노 요코와 온 카와라도 이 무렵 미국행을 택한 경우다. 쿠사마 야요이가 미국으로 건너간 1957년, 당해 미국 시애틀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1960년에는 루치오 폰타나, 이브 클랭 등 38명의 유럽 작가와 단 2명의 미국 작가(쿠사마 야요이를 포함)로 구성된 단체전 <모노크롬 말러라이 Monochrome Malerei>의 출품작가로 선정된다. 

서구의 무수한 추상 실험을 접할 수 있는 이 전시를 통해 쿠사마 야요이는 자신의 모노크롬 회화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 같은 해 11월에는 6명의 일본 작가로 편성된 단체전 <일본의 추상 Japanese abstraction>에 쿠사마가 포함된 사실도 당시 화단의 주류였던 단색조 추상회화로 기운 그 무렵 쿠사마의 사정을 엿보게 한다. 미국 활동을 전개하던 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의 쿠사마 야요이는 망사처럼 화면 전체를 채우는 모노톤 추상회화에 전념하고 있었다. 무수한 단색조 점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그림인데, 자세히 보면 포물선 모양의 붓질로 둥글고 조그만 여백들을 무수히 남긴 화면에 가깝다. ‘무한 망사’ 회화로 통칭되는 이 연작은 후일 물방울무늬의 시원이 된다.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망사’는 세계 화단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단색조 추상화와 화면을 전면화 시킨 추상표현주의로부터 그녀의 미학이 자유로울 수 없었던 형편을 방증한다. 1961년 스티븐 래디쉬(Stephen Radish) 갤러리에서 개최된 미국에서 쿠사마 야요이의 2번째 개인전은 여러 예술 잡지와 주요 일간지에 광고가 실렸는데, ‘무한 망사’회화의 폭을 무려 10m 길이로 확장시킨 초대형으로 벽면 하나를 가득 채웠다. 개인전이 열린 1961년 쿠사마는 여러 미술관과 갤러리 관계자들에게 홍보용 편지를 여러 통 보냈으나 신통찮은 반응을 얻었다. 

심지어 1961년 개인전에 관한 리뷰 역시 호의적인 평가를 얻는 데 실패한다. 때문인지 1961년부터 그녀는 순수 평면 작업에서 입체 조형을 포함한 다매체 창작으로 장르적 경계 넘기를 시작한다. 이는 당시 가까운 사이로 발전한 에바 헤세와 도널드 저드의 영향도 있었을 테고, 무엇보다 그 해 뉴욕현대미술에서 개최된 전시에서 접한 아상블라주 작업에 깊은 감흥을 받아서라고 전해진다. ‘집적 Accumulation’연작이 1961년에 시작된 것도 이 때문이리라. 일상 가정용품에 돌기형 자루를 무수히 부착한 설치물 ‘집적’이나 ‘강박 가구 Compulsive Furniture’시리즈는 그 무렵 고안되어 쿠사마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다. 이 연작은 4년이 지난 1965년 개인전 <플로어 쇼: 쿠사마 Floor Show: Kusama>를 통해 집대성 된다. 솜으로 채운 하얀 자루에 빨간 망점을 무수히 찍은 남성기 형태의 돌기들을 거울로 둘러싼 방 안 가득 집적시킨 대표작 <무한 거울방 Infinity Mirror Room Phalli’s Field>은 이 개인전 때 출품된 실내 설치물이다. 

‘무한 망사’와 ‘집적’은 각각 평면작업과 입체작업이지만, 무언가를 무한히 반복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모티프를 취한 셈이다. 또 무한 거울방의 개념은 후일 쿠사마의 대표 상표가 되는 작은 조명들이 망점처럼 방안 가득 반짝이는 실내 설치물의 출발점이 된다. 또 ‘밀폐된 실내 공간 속의 개인(작가)’을 놓는 설정 역시 ‘무대 위의 주연 배우’처럼 작가 본인을 작품의 중심에 놓아온 쿠사마 야요이 스타일의 시원 쯤 될 것이다. 쿠사마를 가까이서 지켜본 미니멀리스트 도널드 저드는 1964년에 쓴 한 평문에서 그녀 작업의 핵심이 “강박적인 반복”이라고 논평한다. 돌기 형태의 자루를 거울방에 잔뜩 쌓아둔 1965년 개인전은 후일 암전된 거울방에 작은 조명들이 반짝이며 빛나는 거울방으로 변형되어 발전하는데, 그 변형의 원조가 이듬해 열린 개인전 <쿠사마 핍쇼(끝없는 사랑쇼) Kusama peep show(endless love show)>(1966)이다. 한편 1966년은 쿠사마 야요이가 제33회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된 해로 그녀는 플라스틱 재질의 거울공 1,500개를 바닥에 늘어놓은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이라는 설치물을 출품했다.

60년대 후반 쿠사마 야요이는 제도권 전시장 밖으로 창작의 시공간을 확장한다. <육체의 향연 Body Festivals>(1967)을 조직한 쿠사마 야요이는 알몸 퍼포머들을 고용해서 언론의 이목을 받게 된다. 또 베트남전 참전 반대로 뜨거워지던 미국 사회의 반전 문화와 1968년 미국 대선을 기회 삼아서, 센트럴 파크와 브루클린 다리 등지의 공공장소에서 알몸의 퍼포머들로 구성된 반전 해프닝도 기획한다. 1968년 <해부학적 폭발 Anatomic Explosion>은 뉴욕 증권 거래소에 반대하는 알몸 퍼포먼스였지만, 그 취지는 “주식으로 마련된 자금이 전쟁에 사용된다.”는 반전 메시지에 있었다. 이 외에 장르적 사유를 넘나드는 다원예술 활동이 집중된 때도 60년대 후반이다. <자기 소멸 self obliteration>(1968)은 쿠사마 야요이 자신과 그녀의 작업을 실험영화적 연출로 기록한 영상작업이었으며, 60년대가 저무는 1969년에는 ‘nudity love sex & beauty’라는 제호를 단 타블로이드 잡지 <쿠사마 의식(儀式) Kusama orgy>도 간행한다.

 Infinity Mirror Room-Phallis Field Floor Show,  1965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 1966

 나르시스 정원 Narcissus Garden, 1966

 Kusama orgy




1990년대. 재평가와 재기
1973년. 쿠사마 야요이는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고국으로 귀환한다. 뉴욕 생활에서 인연을 만든 서구 미술 작품을 수입해 일본 부유층에게 판매하는 미술품 수입 회사(Yayoi Kusama Art Import Company)를 차린 것이다. 그렇지만 70년대 중반 석유 파동이 닥치자 경기가 위축되면서 미술판매업은 정리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유년기부터 그녀를 따라 다녔던 환각과 공황발작이 재발하면서 1977년 자발적으로 병원 인근에 작업을 얻어 치료와 창작을 병행하기 시작 하는데 그 같은 삶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지난 뉴욕 생활을 회상하면서 집필한 자전 소설 <맨해튼 자살 중독자 Manhattan Suicide Addict>를 1978년 출간 했고 이런 집필 활동은 8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져 시, 소설, 자서전 등 십 수권이 넘는 저서를 출간한다.

1980-90년대 쿠사마의 신작은 초대형 부피를 지향했고, 환각성이 강한 색채를 선택했으며, 화면의 평면성도 예전 작품을 능가해 마치 그래픽 디자인 같은 조형미로 발전한다. 이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같은 일본 고유의 대중 소비문화를 연상시켜 변별력 있는 시너지 효과를 낳았다. 1960년대 쿠사마의 아상블라주 작품을 대표한 돌기형 오브제는 이 무렵 뱀의 모양처럼 길게 늘어났다. 변신하고 있는 쿠사마 야요이가 세계 무대에 본격 재등판하게 된 변곡점은 베니스 비엔날레다. 1966년 이래 27년 만에 되돌아온 베니스에서 그녀는 일본관 대표작가 자격으로 출품한다. 출품작은 물방울무늬가 찍힌 거울방 안에 노란 호박모양 오브제를 쌓아놓고 작가 자신도 그 안에 들어선 모습으로 제시되었다. 물방울무늬, (거울로 인한) 무한반복, 작가 노출. 종래 그녀가 답습해온 세 코드를 한층 더 밀어붙인 모양새인 거다. 1993년 45회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작가 선정은 잊혀질 뻔한 쿠사마 야요이의 존재감을 새로이 세계무대에 각인시켰다. 뉴밀레니엄을 앞둔 1998년 쿠사마 야요이의 첫 해외 회고전이 이듬해까지 연속해서 순회를 한다. <영원한 사랑: 쿠사마 야요이 1958–1969 Love Forever: Yayoi Kusama 1958–1969>라는 회고전 타이틀이 말해주듯, 쿠사마의 미국 활동기에 초점을 맞춘 전시였다. 이 회고전은 LA 카운티미술관에서 시작해서 뉴욕현대미술관 워커아트센터를 거쳐 모국인 일본의 도쿄도 현대미술관에서 끝맺으며 세계 유수의 미술관 4곳을 순회하는 형식을 취한 대규모 회고전이었다.

미국 체류기의 작업에 한정시킨 1998년 순회 회고전과는 달리, 쿠사마 야요이의 미학을 초기부터 현재까지 포괄하는 회고전은 그녀가 여든이 된 2010년 이후 여러 나라에서 연달아 개최된다. 스페인 마드리드 라이나 소피아 미술관은 2011년 쿠사마의 회고전을 개최했고 같은 해 퐁피두 센터도 프랑스 최초로 쿠사마의 회고전을 연다. 그렇지만 쿠사마 야요이에 대한 전면적인 재평가와 세계적인 주목이 정점에 이른 해는 2012년으로 봐야 하리라. 그 해 영국 테이트 모던은 쿠사마 야요이의 전 생애를 포괄적으로 정리하는 회고전을 열었는데, 테이트 모던의 회고전에는 1965년 시작된 쿠사마 야요이의 ‘무한 거울방’이 색상이 변하면서 깜박이는 조명 설치로 역대 최고 규모의 확장판으로 소개되었다. 또 2012년은 명품 회사 루이 비통이 야요이 쿠사마와 콜라보레이션을 맺었다고 발표한 해다. 이는 루이 비통이 여성 아티스트와 맺은 최초로 콜라보레이션이었다. 테이트 모던의 대규모 회고전과 루이 비통과의 콜라보레이션 외에 2012년은 뉴욕의 대형 건물 두 동이 쿠사마 야요이의 작품으로 포장된 해이기도 하다. 하나는 루이 비통 뉴욕 사옥으로 건물 외관을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나무(Yellow Trees) 패턴으로 장식했고, 또 다른 건물은 맨해튼 웨스트 14번가에 축조 중인 콘도 프로젝트로 또 다시 노란 나무 문양 그물망을 공사 가림막으로 썼다. 이는 그해 쿠사마 야요이의 개인전을 개최한 미국 휘트니 미술관과 연계된 공공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쿠사마 야요이 브랜드
쿠사마 야요이의 예술 생명력은 작가 이름과 함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작가의 브랜드에서 나온다. 거울방과 물방물무늬가 그 브랜드다. 동일한 패턴을 무한 반복하면서 집적한다는 차원에서 이 두 브랜드는 결국 같다. 물방울무늬가 설마 쿠사마 야요이에게만 예속된 문양일 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테이트 모던 회고전을 앞두고 가진 인터뷰에서 땡땡이 회화(Spot painting)를 고용된 조수들을 통해 대량 생산하는 데미안 허스트를 언급하며, 데미안 허스트가 땡땡이 무늬를 사용하기 수 십 년 전에 자신이 먼저 물방울무늬 모티프를 사용했으며, 자신은 조수를 고용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작품을 완성한다고 답함으로써 은연중 물방울무늬 패턴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쿠사마 야요이의 대표 브랜드가 된 물방울무늬는 1950년대 초로 기원을 찾아야 할 만큼 역사가 길다. 비단 ‘무한 망사’ 그림을 그렸던 시기를 제외하더라도 <시체의 집적 Accumulation of corpses(Prisoner surrounded by curtain of depersonalization)>(1950)처럼 구체적인 형상이 나타나는 초기 구상회화에서도, 일본 전후(戰後) 초현실주의자의 미학에 공감한 쿠사마 야요이가 시체를 반복 패턴으로 변형시켜 표현하면서 ‘무한 망사’와 유사한 패턴을 사용한 바 있다. 이 옛 구상화가 그녀의 반복적 물방울무늬의 먼 시원으로 종종 인용되는 이유이다. 물방울무늬에 관한 훨씬 먼 기원은 무수한 망점으로 (아마도 자신의) 얼굴을 뒤덮은 여성의 상반신을 그린 <무제>(1939년으로 추정)라는 펜화 드로잉이 인용된다. 물방울무늬에 대한 영원한 저작권은 누구도 소유하지 않았다. 다만 물방울무늬를 통해 미술계가 쿠사마 야요이를 조건반사처럼 떠올리는 까닭은 쿠사마 야요이와 물방울무늬가 한 몸이 되어 걸어온 역사가 너무 유구한 탓이다.

1960년대 초반 무수한 돌기형 자루로 오브제를 뒤덮은 아상블라주 설치물은 평면으로 재현된 물방울무늬를 입체조형으로 확장한 버전 같기도 하다. 그런데 돌기형 자루가 남근상을 연상시키는 점, 그녀가 조직한 해프닝이 거의 예외 없이 알몸 퍼포먼스로 선정성을 띤 점, 그 무렵 그녀가 출간한 타블로이드 잡지<Kusama Orgy>도 준 포르노그래피를 표방한 외설적 사진과 내용을 담은 점, 1980년대 후반 완성한 일련의 물방울무늬 회화가 정자의 모양으로 변형되어 제시된 점 등을 모두 따질 때, 쿠사마 야요이의 작가 이력은 섹스어필이 강한 표면과 항상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쿠사마 야요이는 섹스에 대한 깊은 혐오감을 오래 동안 품고 살아온 것으로 알려져 왔다. 미국 체류 기간 중 가장 가까이 의존하며 교류했던 70대의 조셉 코넬(Joseph Cornell)과도 성관계가 없는 플라토닉 러브였음을 누차 강조해 왔고, 남성기로 뒤덮인 아상블라주 작업에 관해서도 섹스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라고 말해왔다. 

쿠사마 야요이는 “콜라주의 축적은 ‘자기 소멸’의 철학을 반영한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열등감을 작품의 주제로 쓴다. 나는 페니스처럼 길고 괴상한 것이 내 안에 들어오는 생각을 하면 두려움에 떤다.”고 고백한다.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란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정신질환이다. 강박장애의 치료법으로 권유되는 ‘노출법-반응방지법’은 불안을 유발하는 대상에 고의적으로 자신을 노출시켜서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에 차츰 숙달되도록 하는 훈련이다. 밀폐된 실내에 남근 모양 돌기를 잔뜩 채운 무한 거울방 연작은 혐오하는 대상을 최대치로 노출시킨 작업으로 볼만 하다. 그녀는 그 돌기 자루들 위에 눕지 않았던가. 강박장애의 원인으로는 신경망의 기능 이상이 진단되기도 하고, 버리지 못하고 계속 쌓아두는 저장강박증(compulsive hoarding)의 경우는 깊은 상실감과 애정결핍을 체험한 과거의 상처가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지나간 애정결핍을 보상받으려고 사물을 꾸준히 쌓아둔다고 풀이하는 것이다. 쿠사마의 생애에 밀착된 강박장애증은 유년기에 각인된 친부모에 대한 실망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바람둥이였던 부친과 딸에게 폭력을 번번이 행사한 모친 밑에서 자란 가정사, 그리고 엄격한 도제식 교육이 강요된 일본 미술대학의 체험은 쿠사마 야요이에게 일본을 벗어나야할 굴레로 보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외유기간 동안 교류한 연상의 조셉 코넬을 좋은 남성으로 번번이 회상하는 것도, 바람둥이 부친에게서 받지 못한 유년기의 애정결핍을 자애로운 남성상을 통해 보상받으려는 심리였으리라. 쿠사마에게 조셉 코넬은 이성이 아니라 부성(父性)의 비중이 높은 상대였을 것이다.

 1993년 45회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시체의 집적 Accumulation of corpses(Prisoner surrounded by curtain of depersonalization), 1950

 Self-Obliteration Horse Play, 1967

 Untitled, 1939

 14th Street Happening, 1966


 Compulsion Furniture (Accumulation) c.1964 

 Pacific Ocean(Infinity Net Series), 1960, 


강박장애, 창작의 모티프
바람둥이 부친을 통해 형성된 섹스에 대한 혐오감이 남성기 모양 돌기로 채워진 아상블라주 작업을 만들었다면, 애정 결핍에 대한 또 다른 보상은 자기 노출형 작업 방식으로 표출된 것 같다. 알몸 퍼포머를 고용하거나 작가가 무대 전면에 스스로 나서는 자기 노출형 작업 방식은 주변의 이목(또는 관심)을 집중시킬 수 있는 최선책이다. 1960년대 후반 반나체 혹은 나체 퍼포머로 나서기 직전에, 그녀는 1965년에도 몸에 밀착하는 옷을 입고 거울방의 중심에 나타나기도 했고,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선 무수한 거울공들 옆에 나란히 누운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즉 노출된 자기 인체와 출품된 작품을 대등한 무게로 간주한 것이다. 어느 미술사가는 당시 쿠사마의 잦은 작가 노출증을 식상하다고 비판했으며 또 다른 미술사가는 쿠사마의 자기 노출을 “자기를 제물로 바치는 자기 희생의 연극”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두 해석 가운데 무엇이건 작품과 작가 자신을 동일한 재현물로 간주하는 쿠사마의 미학은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전략으로는 성공한 것 같다. 유년시절 결핍된 보살핌은 여성의 알몸에 집중되는 주변의 시선으로 보상받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처럼 쿠사마의 흥행사적 기질은 후일 계속 발휘되는데, 그것은 휠체어에 의존해서 이동해야 할 만큼 노년기에 이른 최근의 쿠사마에게서 오히려 정점에 달한다. 

물방울무늬(또는 노란나무 무늬)로 뒤덮인 실내 공간 안에 물방울무늬(또는 노란나무 무늬) 의상을 착용한 쿠사마 야요이가 앉아 있는 보도사진을 우리는 자주 접할 수 있다. 형상과 배경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이런 위장(僞裝)의 연출은 1965년 거울방 촬영 당시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렇지만 1965년과 근래의 위장 연출 사진을 자세히 보면, 형상과 배경의 경계가 무너진 화면 속에서 결국 빨간 의상을 차려입거나(1965년), 빨간 가발(근래)을 머리에 쓴 작가의 존재감만 증폭시키는 연출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쿠사마의 흥행사적 육감은 비평적 단서를 손쉽게 제공하기 때문에 그 만큼 작가에게 주목하게 만든다. 또 소비사회가 된 현대의 관객과 상업 자본에게도 스타성이 발달한 쿠사마 야요이를 유독 주목하게 만든다. 동시대 미술계의 일반적 풍경이자 한계가 작품에만 감상의 범위를 한정하는 건데, 이에 반해 작가의 스타성을 꾸준히 활용해온 쿠사마 야요이는 동시대의 비평과 시장경제의 수요를 나란히 충족시킨다. 

<무한 거울방>를 촬영한 과거 사진을 보면, 바닥에 누워있는 쿠사마 야요이를 관객이 응시하도록 만든 계산이 읽힌다. 이는 전시장을 무대처럼 이용해서 작가를 주연으로 세우는 연극의 문법을 작가가 차용한 것으로 읽을 만하다. 이 연극적 연출법은 강박장애로 자기 고립의 두려움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해법으로 쓰였을 것이다. 공백공포(Horror Vacui)를 느낄 만큼 빽빽하게 채워진 반복 패턴과, 작가의 출연, 그리고 그것을 관음하려는 관객의 기대감이 결합한 곳에 쿠사마 야요이의 미학이 숨 쉰다. 그것은 미학과 자본 사이를 무리 없이 오갈 수 있는 플랫폼이다.


미학적 단순성의 확장성
고령의 나이에도 쿠사마의 입지가 흔들리지 않는 이유로 지난 시절 그녀가 섭렵한 현대미술의 무게감 있는 사조들을 앞서 거론한 바 있다. 거기에 덧붙인다면 여러 미술 사조를 차용하면서 변별력을 갖춘 미학적 전략을 세웠고, 시대정신에 흡수될 변신술을 구사한 것이 그녀가 현역으로 생존하는 동력이 된 것 같다. 쿠사마 야요이 미학의 기본은 무한정하게 변형시킬 수 있는 단순한 문양(물방울무늬)을 자기 브랜드를 굳혔다는 데에 있다. 유연한 브랜드를 매개로 제도권 미술의 관행과 장르적 경계를 넘어 동시대의 사회 속으로 미학을 확장한 것이 그녀를 가장 변별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만들었다.

다시 미국에서 첫 경력을 시작한 195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 본다. 단체전 <일본의 추상>(1960)에 포함될 만큼 쿠사마의 ‘무한 망사’ 회화는 국제 화단의 주류인 추상으로 분류될 만하다. 그렇지만 쿠사마는 추상 화단의 일원에 무색무취하게 포함되는 것보다 그 안에서 차이를 만들려고 추상표현주의의 일반적 사이즈를 추월하는 너비 10m의 과도한 크기 경쟁을 선택했다. 맹주였던 추상표현주의를 대척점으로 간주하지 않는 대신, 추상을 지지하되 가시적인 변형을 통해 새 활로를 찾으려 한 것 같다. 비록 당시 그녀의 차별화가 성공적이진 못했어도 말이다.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쿠사마 야요이는 거울 플라스틱 공 1,500개를 전시하면서 개당 2달러에 판매하려다가 비엔날레 당국으로부터 제재를 받아 중도에 무산되었다. 제도권 미술계의 관행을 거스르려는 이 같은 반골 기질은 이후 작품의 전시를 화단의 굴레에 가두지 않으려는 다채로운 시도에서 발견된다. 이목을 집중시키는 알몸 퍼포먼스를 공공장소에서 기획한 1960년대 후반 해프닝도 같은 맥락이다. 

늦은 감이 있어도 무대를 전시공간보다 현대적 사회로 연장하려던 쿠사마의 미학은, 스펙터클의 중심이 소비사회의 시장경제로 이동한 21세기에 들어 적중하고 있는 양상이다. 작가와 작품 모두가 미술 전시장에 구속되지 않고도 무수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합법적인 거점을 확보하는데, 그것이 명품 브랜드와의 콜라보레이션이다. 루이 비통 뉴욕 사옥 전체가 쿠사마 야요이 브랜드로 포장된 일은 공공건물을 한시적으로 포장하는 크리스토의 환경미술과는 다른 지점의 사건일 것이다. 2012년 루이 비통의 신상품 광고에는 물방울무늬 의상을 착용한 채 얼굴과 인체의 노출 부위에 물방울무늬를 그린 8등신 모델의 사진이 여럿 포함되어 있다. 당연히 쿠사마 야요이가 1960년대 자신의 인체 위에 시도한 행위를 상품 광고가 차용한 거다. 

루이 비통과 작가 사이의 콜라보레이션이 있다고 한들, 루이 비통의 전 제품의 디자인을 쿠사마 야요이가 할 턱은 없다. 루이 비통이 쿠사마와의 협업에서 취하는 건 쿠사마 야요이가 기왕에 고안한 문양을 디자인으로 사용하고, 그녀가 쌓아온 인지도와 지명도의 자작권을 임시로 빌리는 것일 테다. 루이 비통 사옥 쇼윈도에 쿠사마 야요이를 닮은 마네킹을 한동안 세워둔 것도 그런 효과를 노린 전략일 테다. 이로써 장르적 경계를 넘어 자기 노출의 극대화를 희망했던 야요이 쿠사마의 바람은 전면적으로 성취되는 중이다. 예술계를 넘어서 현대 사회 속에서.


 Yayoi Kusama’s Yellow Trees cover a whole building in Manhattan 2012


Louis Vuitton Unveils Yayoi Kusama Collaboratio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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