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국으로 내가 없을 때 나간 원고. <한겨레21>이 '마이 소울 시티'라는 제목의 연재를 내보내는데, 여러 필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의 안식처로 인식되는 도시에 관해 들어보는 연재다. 나는 평창동을 택했는데, 동네에 관한 짧은 심경을 2010년 사고 직후 평창동집에서 요양하면서 포스팅 한 적도 있다(엮인글).
한없이 적막한 고요 [2013.08.12 한겨레21 제973호] |
[마이 소울 시티] 미술평론가 반이정이 각별한 성장기를 보낸, 심신의 원점 같은 공간 평창동 |
재수, 대학, 군복무, 대학원, 네댓 번의 연애, 비평가 등단 초입까지 몸담은 한 동네 이야기이다. 청소년기 끝물부터 생계의 진입까지의 추억을 간직했으니 변별적인 시공간이라고 잘라 말할 수도 있다. 대략 10년 전부터 그곳을 떠나 서울의 다른 동네를 전전했지만 주민증상 주소지를 이전 하지 않아서, 선거철마다 귀향하듯 투표소를 다녀가는 한시적 방문지이기도 하다. 2013년 동네 이름이 두 차례나 미디어에 보도됐다. 40년 넘게 개발제한으로 묶인 규제가 풀려 동네 부동산값이 요동친다는 경제뉴스와 서태지의 결혼발표와 함께 공개된 주택이 이 동네에 지어졌다는 연예뉴스였다. 1세대 부촌으로 분류되는 평창동을 영혼의 안식처라는 인문학적 연재 코너에 소개하자니 내내 주저하게 된다. 그렇지만 필자가 살던 집은 경관 좋은 산세나 높은 담벽이 에워싸거나 전망이 탁 트인 성곽 같은 저택과는 당초 거리가 먼 점, 그리고 각별한 추억들의 성장기를 보낸 점 등, 심신의 원점 같은 시공인 사실을 외면할 필요가 있나 싶다.
내게 평창동의 첫인상이 유별났던 건, 10대중반의 눈으로 동네를 처음 봐서일 거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소풍지로 북악산을 선택했는데, 행선지에 모인 어린 동기생들은 물 흐르는 계곡의 틈으로 들어선 거대한 저택들을 구경하면서 산세를 따라 등산했다. 견학보다 집 구경으로 각인된 소풍길이 되었다. 으리으리한 성곽 같은 집들을 거부의 별장촌 정도로 오해했으나, 별장이 아닌 자택이란 얘길 듣고 입을 다물지 못한 어린 학생들의 표정을 떠올려보시라. 그 때가 80년대 중반이니 부동산의 권좌가 강남권에 이전되기 전일 것 같다. 불리한 학군과 역세권, 그리고 개발제한까지 묶인 자연경관지구 평창동은 간혹 드라마에서 마당 넓은 나이든 부자의 집무대로 등장하는 동네일뿐이었다. 그러나 부동산 실정에 어둡고 무관심한 나에겐 세속의 주목에서 벗어났기에, 평창동에 대한 선한 기억이 많다. 개발제한 해제로 일부 지역 땅값이 오른다는 사정도 전혀 반갑지 않다.
산세를 따라 비스듬한 형세로 들어선 가옥들의 나열은 주거지를 도로변으로부터 이격시키는 조건을 만든다. 지대가 높아 마을버스와 승용차가 이동수단이고 등산하듯 집까지 오르내리는 나 같은 도보이동자들이 있다. 이런 형세 때문에 외부인 출입도 낮고 차 소리와도 멀어서, 동네는 한없이 적막한 고요가 흐른다. 소음에 민감한 나는 서울 다른 지역에서 10년여를 전전한 후에야, 평창동이 얼마나 고요한 거주지인지 알았다. 외환위기로 어려워진 살림에 구원이 된 것도 그때 살던 집이었다. 온가족이 함께 외국인 민박 공간으로 집을 전용시켰다. 나는 이제 손을 땠지만, 평창동 집은 여전히 외국인 민박집으로 부모가 운영한다. 사랑하는 개 두 마리와 동네의 형세를 따라 산책하던 기억이 배인 곳도 평창동이다. 지금도 우연히 동네의 어떤 구역을 지날 때면 “여기를 미니랑 같이 걸었는데...”하고 회상에 잠긴다. 개 두 마리가 죽은 후 평창동 집 마당에 묻힌 터라, 서정과 격정의 순간이 함께 매장된 동네로도 추억된다. 감각에 예민한 내게 고요한 거주지, 외국인 민박이라는 뜻밖의 생존 전략이 된 거점, 애견의 육신과 추억을 묻은 동네. 사정이 이러니 “왕년 부촌의 명성을 개발제한 해제로 회복할지 주목”이라는 세간에서 평가야 어떻건, 평창동을 내 영혼의 안식처로 꼽아 부족함이 없지 않겠나.
사진: (서울=뉴스1) 이종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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