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6일 금요일

잠깨운 보험 전화

시차 적응을 못해서 아침에 겨우 잠들어서 오후에 깬다. 그리고 낮부터 저녁까지 중간에 듬성듬성 잠 드는 일과가 4일 정도 지속되고 있다. 그럴 만하다. 귀국을 8.11일 했으니. 오전 11시가 조금 지났을 때 전화가 울려서 잠에서 덜 깬채로 받았는데, 생소한 목소리가 내 실명을 부르는 게 아닌가. 나는 상대방이 실명을 부르면 냉담해진다. 십중팔구 광고 전화여서다. 그런데 나랑 옛날에 정신분석 스터디를 했다며 아무개 라며 자기 이름까지 밝힌다. 십수년전 대학원 수료 후 스터디를 몇번 조직한 적이 있고, 희성의 이름이라 어렴풋 기억났지만 얼굴까지 떠오르진 않았다. 바로 용건에 들어간 통화 내용은 나를 황망하게 했다...


아무개: 언제 만날 수 있어요? 
나:  왜요?
아무개: 제가 다니는 회사와 관련해서 의논드릴 일이 있어서요.
(회사 일로 내가 관련되는건 미술관련 청탁이 전부인데, 내 실명을 부르면서 회사일이라면 그건 아닌 거다)
나: 어떤 일인데요?
아무개: 그냥 직접 만나서 얘기하려고요. 괜히 부담 느끼실까봐요. 
나: 저도 개인 일정이 있기 때문에 용건을 미리 알아야 나가죠.
아무개: 괜찮은 보험상품이 있어서 소개시켜드리려고요.
나: 저는 보험 가입 안해요.
아무개: 정말요? 왜요?
나: 대학 동기 중에 보험사 직원인 친구들도 부탁했지만 거절했어요. 안합니다.
아무개: 너무 좋은 거에요. 너무 괜찮아서 저도 가입했거든요. 
나: 그야 보험사 직원이시니까 당연히 가입했겠지요.
아무개: 너무 좋아서 가입하고 이 일도 하는 거에요. 
나: 안합니다. 
아무개: 결혼 하셨죠?
나: 아뇨. 
아무개: ......음.....결혼 안한 사람한테도 참 좋은 보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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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짧을 실랑이)

아무개: 그럼 다음에 다시 전화를 드릴께요.
나: 보험 때문이라면 전화하지 마세요.
아무개: 아 왜요... 너무 좋은 보험이라서.
나: 싫다고 의사를 밝힌 사람한테 이러는 건 실례입니다. 잘 아는 사이도 아니면서.
아무개: 잘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부탁을 하는...
나: 그러니까 실례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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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곤 전화를 끊었는데, 나중에 당시 함께 그 스터디에 참가했던 친구에게 물어보니 그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에 음대가 있었는데 음대생이었단다. 그러자 기억이 어렴풋 났다. 실기가 아니라 이론 전공 학생이었던 걸로 기억나지만 얼굴은 결국 떠오르지 않았다. 잠결에 받은 황당한 전화에 잠이 깨고서 화도 났고 황망한 기분이 들었다. 생업이 중요하다지만, 13년전 스터디 모임으로 잠깐 만난 사람에게 전화 걸어서 무작정 만나자고 제안하다니.... 설령 내가 시간 쪼개서 나갔다면 보험 상품 강매자와 만날 뻔했지 뭔가. 그녀는 심지어 당시 스터디를 함께한 다른 사람들의 안부까지 내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그 사람도 보험같은 거 가입 안할 사람이에요."라고 만류하기까지 했다. 자기가 지인들에게 인연을 매개로 무슨 실수를 저지르는지 그녀 스스로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딱했고, 그런 상품을 직원에게 강요하는 보험회사의 시스템이 혐오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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