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다카시 수퍼플랫 원더랜드 Takashi in Superflat Wonderland(2013.7.4~12.8 플라토)에 관한 리뷰. 출국해서 없는 동안 <시사인>(307호)에 실렸다. 나는 전시를 개막식날 가서 봤다(엮인글). <시사인>에는 본문 도입부가 내가 보낸 원고와 다르게 교정되었더라. 또 말미의 ps도 원고 매수가 넘쳐선지 지면에선 누락되었다. 아래는 내가 보낸 원문.
완전한 네오팝의 불완전한 내한
반이정 미술평론가
팝아트.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거리를 두고 선 현대인에게 예외적으로 폭넓은 접촉 면적을 확보한 현대미술을 지칭하는 용어다. 팝아트의 시원과 전성기는 1960년께로 보지만, 후대에 네오팝 또는 포스트팝이라는 칭호로 성공적으로 부활한다. 원조 팝아트의 간판스타가 죄다 서구인인데 반해, 네오팝의 양강 구도의 한축은 일본 미술가 무라카미 다카시가 쥐고 있다. 그 문제적 개인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린다. 국내 전시 제목에도 쓰인 ‘수퍼플랫(superflat)’은 다카시가 일본 팝아티스트들을 규합한 그룹전의 제목인데, 서구 미술계에는 부재한 일본 고유의 팝을 세상에 각인시킨 혁명적 미학 용어로 굳었다. 고스란히 직역하면 ‘엄청 평평한’쯤 될 수퍼플랫을 이해하려면 일본 시각예술이 걸어온 노정을 살피면 된다. 근대 서구 화단에 영향을 미친 일본 목판화부터 동시대 일본 문화산업의 총아격인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자세히 보라. 모두 사물의 양감과 원근감을 평평한 색면으로 일괄 처리한 공통점이 있다.
평평한 화면의 유구한 전통이 대중소비문화의 감성과 결합하니, 일본의 독보적 미학이 될 수밖에. 완고한 관객의 눈에는 정상적 미술품이 아닌 초대형 팬시상품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지금처럼 거물이 되기 전 다카시가 자국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와 나눈 인터뷰에도 “아직 일본에서는 이상하게들 봅니다. 이걸 해외로 들고 가면 스스럼없이 좋아해 주지요.”라고 털어놓은 사연도 당시 일본 화단의 몰이해를 보여준다. 수퍼플랫을 창안한 것 외에도 무라카디 다카시의 공로는 카이카이 키키(KaiKai Kiki LLC)라는 회사를 설립해서 공동 창작에 투입되는 직원 100여명을 거느린 ‘기업형 아티스트’의 세계를 공고히 한 점일 것이다. 다변화된 현대 시각문화 속에서, 최상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작가 일인에게 한정하지 않고, 분야별 전문가들의 협조와 공동 제작의 강수를 둔 것이다. 예술가의 원본성은 깨졌지만 작품의 완성도는 구원한 거다.
이 문제적 예술가의 한국 개인전 어땠을까? 일본 팝아트의 고유성을 각인시킨 게 다카시의 공로일 테지만, 그의 변별력을 세부적으로 좁힌다면 크게 둘이다. 하나는 만화적 상상력에 의존해서 일본 시각예술의 전통이 긴밀히 관계 맺은 에로티즘의 실체를 과감하게 제시한 점이다. 그의 지난 문제작들은 예외 없이 만화적 상상력과 거대하게 부푼 선정주의의 유쾌한 결합이었다. 다른 변별력은 고전과 현대의 충돌이 빚어내는 대조적인 시각 효과다. 한국 전시에선 이 둘이 모두 실현되지 못했다. 로봇과 소녀의 인체를 합체한 입체작품이 여성기를 노출시켜서 그나마 성적 농담에 가까울 텐데, 그 작품은 개막식에서 사진촬영이 금지 되었다. 사진이 유출되어 물의를 일으킬까봐 걱정한 모양이다. 미술관의 이런 걱정은 기우일까? 그런 것 같진 않다.
한 사회에서 예술이 표현되고 전시되는 수준은 통상 그 공동체의 안목과 한 몸이 된다. 시민사회의 일반적 안목이 고려된 작품 선정은 세계가 다카시를 주목하게 만든, 과격한 시각 실험을 윤리의 우물 안에 가두고 말았다. 아이러니는 다카시의 존재감을 예고한 대표작으로 통하는, 선정적인 초기 작품들이 2011년 ‘프랑소아 피노 컬렉션’ 전시(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이미 입장료 없이 공개된 바 있다는 거다. 전문가가 주로 찾는 전시장에선 별 탈 없이 미학의 핵심을 던지지만, 대중 관객을 상대하는 유료 전시장은 민심의 눈높이을 고려하느라 핵심을 피해간다. 한국 문화가 직면한 고질적인 불행이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대표작은 인터넷으로 외형과 스타일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작품을 육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부터 전시회의 대략적인 전체 그림을 유추할 수 있다. 다카시의 두 가지 변별력으로 앞서 예를 든, 고전과 현대의 충돌은 앙시앵레짐 시기 지어진 바로크 건축물 베르사유 궁전 내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볼 수 있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현대미술가에게 공간을 내준 3번째의 지위를 누린 그 전시에서 다카시의 형형색색 미학은 중후한 고전미와 충돌하면서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화이트 큐브로 불리는 일반 전시장에서도 다카시는 성공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열린 그의 개인전은 현대와 고전의 충돌과 일본 시각예술의 에로티즘을 재확인 시키면서, 그의 변별력 둘을 모두 확보한 전시여서다. 메이지 시대에 서양화를 일본에 도입한 쿠로다 세이키의 누드화를 전통적 일본화 기법으로 재현하되, 인물을 만화 캐릭터로 교체했다. 즉 서구에서 유입된 누드화를 현대적 일본 문화로 재번역하면서 관음적 가치까지 챙긴 것이다.
물론 프랑스 베르사유궁전 전시와 영국 가고시안 갤러리 전시를 한국 플라토 전시가 따라해야하는 건 아니다. 대등한 비교 대상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무라카미 다카시의 국내 첫 개인전은 강조점을 어디에 맞춘 걸까? 찾기 어렵다. 전통에 대한 급진적인 재해석도 아니고, 일본 시각예술의 에로티즘을 노골적으로 투척한 것도 아니라면 대체 강조점은 무얼까? 비록 국내 전시가 다카시의 회고전을 표방한 게 아닐지라도 이 문제적 예술가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전시장에서 만나는 작품은 근작에 심하게 치우쳐 있었고, 일관된 주제로 수렴되기에는 상이한 작품들이 단속적으로 열거된 양상이다. 그의 명성과 강조점을 이렇게 제한된 단면에 가둔 원인은 뭘까? 초대 작품의 구성은 작품을 대여한 페로탕 갤러리의 선택일까, 아니면 ‘무라카미 다카시 국내 첫 개인전’이라는 보증수표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한국 관객의 눈높이까지 근심한 삼성미술관의 안전한 선택일까? 알 수 없다. 잘라 말할 수 있는 건, 네오팝의 간판스타 무라카미 다카시의 단면만이 열거된 그의 국내 개인전 기간(12월초까지 한다)이 무척 길게 느껴진다는 거다.
ps. 팝아트로 규정되진 않으나 강한 팝 성향을 띠며, 무라카미 다카시에 이어 루이비통과 콜라보레이션 계약을 맺은 또 다른 일본 현대 미술가 야요이 쿠사마의 개인전이 대구미술관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열린다. 루이비통과 콜라보레이션를 맺은 두 미술가의 사례에서 보듯이, 팝아트의 대세는 동시대 시각체계에 관여하는 팝아트의 넓은 운신의 폭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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