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3일 화요일

라디오 청취자 사연


라디오를 틀어놓는 운전기사가 많아, 귀가 버스에서 본의 아니게 들은 청취자 사연에 집중하는 만담형 라디오프로의 한토막.


청취자 사연: "여중학생을 둔 엄마인데, 딸에게 남친이 생길까봐 너무 걱정이다. 세상이 험해져서... "

라디오 진행자: "정말 그럴거 에요.  요즘은 학원이다 뭐다 애들이 늦게 귀가하기도 하고요.... " 

라디오 게스트: "설령 남친이 생겨도 집에 데려와 놀지만 말라고 얘기하세요..." 


저런 내용을 사연이라고 공중파에 보내는 청취자나, 저런 걸 조언이라고 맞받아치는 라디오 방송이나. 
공동체의 평균 수준 때문에 영원한 미숙아 신세일 대한민국. 

2013년 4월 20일 토요일

원형탐구 시리즈: 4도道4색色 (예악당)


4월19일(금) 19시30시. <원형탐구 시리즈: 춤, 마음의 지도, 4도道4색色> (국립국악원 예악당).


2013 국립국악원 정기공연을 봤다. 국립국악원 예악당 안에 입장해보긴 처음.  
제목처럼 권역별로 4지역의 춤을 선보이고, 마지막에 북의 울림이라 이름 줕인 집단 타악공연으로 매듭을 한다. 순서는 이랬다. 1.서울 경기(터벌림춤) 2.충청(태평무, 승무) 3.영남(동래학춤, 삼천포 소고춤) 4.호남(진도북춤, 진도씻김굿 中 영돗말이.지전춤, 살품이춤) 5.북의 울림 

전통춤 공연 관람은 매달 1회 갖는 웬 편집회의 자리에서 뵌 분(김영희.무용평론가)께서 초대를 해주셔서다. 


1.서울 경기(터벌림춤)은 귀신을 발로 차서 쫓는 동작을 춤사위로 수용한 건데, 무속신앙이 지배한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2.충청(태평무)는 손목 관절을 이용한 느린 춤이었는데 잰걸음사위 사위로 몸이 움직이는 모습은 서구의 탭댄스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2.충청(승무)는 독무다. 그래서 무대를 홀로 감당하는 안무자에게 연장된 긴 두 팔과 타악기를 두드릴 수 있는 스틱을 쥐어주는 것 같았다. 
3.영남(동래학춤) 해설에 따르면 한량들이 췄다고 하는데 나는 학춤이라해서 학의 가면을 쓰고나오는 줄 알았는데, 학탈을 쓰고 나오는 학춤은 궁중에서 전승된 학춤이란다. 동래학춤은 젊은 남성 안무가들이 폴짝폴짝 집단으로 점프하면서 도포를 휘날리며 시각적 효과를 내는 군무였다. 
3.영남(삼천포 소고춤) 가장 절도 있게 몇개로 나뉜조들이 장단변화를 주는 군무였는데, 안무가마다 작은 북을 들고 있어서 운신의 폭은 넓되, 자체 사운드를 낼 수 있는 점이 소고춤의 변별점 같았다. 호남춤 볼 때도 느꼈지만 이렇게 장단과 박자가 생생한 군무는 관객석의 호응이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극히 소수의 관객만이 소리로 추임새를 넣곤 하더라. 형형색색으로 차려입은 의상은 과거에도 그랬는지 아니면 현대적 변형인지는 모르겠으나, 안무가의 화려한 의상이 소고춤 무대를 참여가 아닌 일방적 응시로 고정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즉 객석을 정적으로 평정하는 예기치 않은 효과를 낳았을 지도. 
4.호남(진도북춤) 영남 소고춤처럼 관객석의 박자 대응이 필요할 것 같은 현장무용. 하지만 그런 참여가 현대 공연장의 무대매너와 왠지 충돌할 것 같다는 인상을 관객에게 줄 수 있다. 
4.호남(진도씻김굿 中 영돗말이.지전춤) 다원예술에서 보는 퍼포먼스처럼 느껴진 무대. 
4.호남(살품이춤) 이걸 볼때는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겼는데 어쩐지 전통춤 공연도 무대예술을 새롭게 보완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정태적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전통춤이 본래 실행된 시공간은 현대적 공연장이 아니었을 테고, 관객 역시 의자에 오와 열을 맞춰 가만히 앉아 구경하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5.북의 울림은 마지막 무대인데, 대중은 타악기 장단에 쉽고 고취되는 것 같다. 타악기는 내 취향은 아니지만. 웅대한 타악 박자의 동기화로 안무가의 집단적으로 기계화된 절도미는 큰 스펙터클을 만들더라. 준기계미학은 어딜가도 대환영.  



 진도북춤. 공연 중 촬영은 금지인데, 객석 곳곳에서 태연히 촬영하는 느슨한 분위기여서 나도 편승해서 두어장 조용히 기념 삼아 찍어봄. 전통춤 공연을 보며 느낀 건 관객과 정적으로 만나는 것 '원본의 취지'에 어긋날 거라는 거. 그래선지 전통춤 공연장의 객석에선 조용히 얘길 나누는 관객도 더러 있었고, 앉은 자리를 이동하는 모습도 다른 공연 때보다 잦았으며 휴대전화로 조용히 공연 모습을 담는 장면도 드물게 보였다.    

마지막 무대인 '북의 울림'이 끝난 직후의 커튼콜.  
국악 무용단 공연에도 커튼콜이 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공연을 뛴 무용수 전원이 나온 것 같진 않고, 마지막 공연 '북의 울림'팀과 무용단의 원로과 예술감독 급 되는 인물이 무대 앞으로 나와 객석에 인사를 하더라. 


2013년 4월 18일 목요일

0418 시저는 죽어야 한다 시사회



4월18일(목) 16시30시. 파올로&비토리오 타비아니 형제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 시사회(왕십리CGV).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도입부는 연극무대에서 연기 중인 배우들을 보여준다. 이 초반부만 보고 극의 전개를 <도그빌>처럼 연극 무대를 차용한 작품으로 알았다. 그런데 실제 연극무대의 한 장면을 단지 보여준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연극 리허설 과정을 영화 연출로 구성한 <시저는 죽어야 한다 Caesar Must Die>(2012)는 작년 17회 부산영화제에도 초대받은 화제작인 모양이다. 로마 베비비아 교도소에 수감자의 연극 참여로 교화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그 프로그램에 영감을 얻어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실제 수감자들이 연기하는 연극을 보여준 영화다.  

연극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측면에선 메이킹 필름이며, 리허설의 진행을 추적한 편집본인 점에선 과정예술이기에, 무대 연출을 응시하는 연출의 자기지시성이 강한 영화다. 영화 속 출연 배우들이 모두 수감자라는 충격 고백(1명을 제외하곤 여전히 수감 상태인 모양)이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화면에 덧붙으면서, 치유와 갱생의 유효한 수단으로 연극의 가치를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큰 신뢰를 갖진 않으나 미술로 치면 미술치료에 빗댈 수 있으려나.... 그래서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Telegraph에 실린 영화 리뷰에는 "셰익스피어도 이 보다 자연스런 캐스팅을 할 수 없었을 것....Shakespeare could not have asked for a more instinctive cast...."이라는 지문이 실렸다고. => 예술이 개인에게 구원이자 희망일 수 있는 드문 경우.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교도소와 연극이 공유하는 지점들을 잘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교도소의 갇힌 공간과 세상의 연극 무대가 누군가의 감시와 관람이 용이한 구조로 짜여진 팝옵티콘의 공간인 점에서 그렇고, 교도소 내부의 위계가 수감자와 이들을 감시하는 교정당국 사이의 수직관계이듯, 영화에서 다룬 연극 '줄리어스 시저'에선 시저와 그를 암살하는 부르투스의 반군 사이가 수직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 연출을 맡은 형제 감독도 화제다. 이들의 초기작은 네오리얼리즘 전통을 계승한 기록 영화로 분류될 만큼 매우 연로한 생존 예술가다(파올로는 1931년생 비토리오는 1929년생). 
이 형제감독이 주는 교훈 => 저조한 예술 창작을 나이 탓으로 돌리지 말 것. 


** 영화의 도입부 연극 무대 장면을 거의 편집 없이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반복한 이유가 왜일까 궁금했는데, 극중 카시우스 배역의 코시마 레가(현재 무기징역 복역중)가 연극을 마치고 그가 수감된 방으로 다시 돌아와 내뱉는 독백 "예술을 알고나니 이 작은 방(그가 수감된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감독은 배역에 몰입했을 때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배우의 감정과 무대를 떠나 고립된 자기 공간으로 돌아온 수감자의 감정을 대조하려고 했다고 밝힌다. 
=> 영화 전반부에도 출연배우들의 출신과 나이와 죄목이 열거되는데, 상당수 중늙은이처럼 생긴 자들이 죄다 나랑 똑같은 생년이 기재되어서 너무 놀랐다. '유럽인은 원래 노안이라 그런건가, 이제 내 나이대를 되돌아봐야 할땐가' 이런 생각을 잠겼다.
 



내가 볼때 대단치 않은 작품이 수상하는 사례를 여럿 목격한 터라, 예술상을 절대 반지 쯤으로 간주하진 않지만 아무튼 이 영화는 62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고 하네. 



2013년 4월 17일 수요일

0417 <헬터 스켈터> 영화 시사회


4월17일(수) 16시 헬터 스켈터 시사회 (메가박스 코엑스) 


사와지리 에리카 주연의 <헬터 스켈터 Helter Skelter>(2012)는 여배우의 높은 지명도 탓인지 노출 수위를 묻는 검색이 많이 이뤄진 모양이다. 관음적 욕구를 채워줄 만큼의 노출은 없다. 영화 초반부는 뮤직 비디오처럼 빠른 편집술로 형형색색으로 뒤덮인 동경 번화가와 미모를 쫓아 움직이는 루즈 삭스를 착용한 일본 여고생 무리를 스크린 한가득 쏟아 놓는다. 심심할 틈이 없는 서두다.  

이 요란한 세리모니는 (주로) 여고생에게 '미모의 롤모델' 쯤 되는 극중 여자 연예인 리리코의 미모 아우라를 위한 작업이었다. 아르 데코와 라파엘 전파 풍을 차용한 싸구려 실내 장식 한 가운데에 인형 같은 외모의 여주인공이 놓인 영화다.  
대다수 팬들의 욕구를 충족 시키려고 리리코의 마음 속에선 '서두르라'는 소리가 들린다. 미모와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그녀의 전신에 가해진 불법 성형수술은 시술자의 말마따나 '새로운 가치관을 창조'하는 작업으로 그려 진다. 고가의 성형수술로 미모와 인기를 유지하려 하지만 변수는 있다. 떠오르는 18세 신예 후발 주자 코즈에의 출연은 어찌할 수 없는 것. 리리코와 그녀의 견제 상대로 나오는 18세의 코즈에를 각각 성형미인과 자연미인으로 설정한 건 리리코로 꼭지점 삼아 일본 사회의(한국도 마찬가지지만) 미모지상주의를 털어놓는 영화의 주제에 콘트라스트를 가한다. 이들의 지명도 경쟁은 가판에 깔리는 매거진들의 표지에 누구 얼굴의 출연 빈도가 높으냐에 따라 가시적인 승부가 갈린다.  

잘 보면 영화는 삼각 구도 속에 있다. 리리코와 재계 및 정계의 고급 고객을 거느린 고가의 불법 성형시술의 연대, 이를 뒤에서 조사하는 검찰, 셀러브리티의 미모를 두고도 변덕쟁이처럼 내심을 알 수 없는 대중의 존재. 이런 삼각구도는 이 영화를 에로틱 스릴러 무비처럼 느끼게 한다.  

사건을 맡은 검사가 난처한 처지에 놓였을 때 내놓은 대사를 재구성하면 대략 이런 의미였다.  
"법이란 한낮 인간이 만든 규칙일 뿐이어서, 용감 사람만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 형형색색 현란한 화면이 많아서 상영시간 2시간15분은 너무 길지 않나 생각 됐다. 마지막 반전을 위해 여유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지만. 한데 정작 시간이 이렇게 많이 필요했던 이유는 서사의 긴장감 유지보다 인형같은 미모라는 볼거리를 향한 관객의 수요를 배려한 탓이 아닌가 싶다.  

** 두 검사가 실종된 리리코를 회상하며 시부야 거리(아마도 ?)에 매달린 리리코 배너를 바라보는 장면이 영화의 마무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장면에서 매듭짓는 건 가장 일반적인 방식일 텐데, 후발 신예 코즈에가 방문한 미지의 클럽 신을 각주처럼 삽입하며 끝냈다. 짧지만 쿨한 여운이었다.   


 일본 전위예술가 쿠사마 야요이를 간접적으로 연상 시키는 투톤 원색 패턴의 실내에서 '신 인류'로 태어나는 아이돌 리리코의 모습이 영화 서두에 배치된다.



 영화 홍보차 여배우 사와지리 에리카가 내한을 한 모양이다. 난 모르고 시사회를 간 건데 끝나자마자 스탭들이 무대를 정리하고 배우를 소개하고 한국의 에리카 팬들의 화환 전달식까지 있었다. 곧 기자 간담회가 시작되었는데 나는 뒷문으로 조용히 나왔다. 

시사회가 열린 메가박스 코엑스의 시사 입장권.

2013년 4월 16일 화요일

연애 선진국 되긴 그른 연예 기사 - 혜리 토니안 교제 기사를 보다가


혜리(걸스데이)가 난데 없이 검색 1위이길래 살펴보니 별일도 아닌 남의 연애사를 무슨 특종이라도 잡은 것처럼 황색매체들이 호들갑을 떤거다. 황색매체와 철없는 독자의 호들갑 때문에 이 사회가 연애 문화 후진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 화들짝 놀란 제목 달기 : '토니안-혜리, 열애…16살 차 극복 아이돌 커플' 
=> 16살이 무슨 대단한 나이 차이라고....

- 예능인 커플 탄생을 전하는 황색 기사의 전형적인 문장 => '몇 차례 만나며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중'
=> 순수한 만남을 애써 강조할 때 쓰는 표현 '알아가는 중'. 쟤네들은 이미 충분히 서로의 속내를 알아버렸을 걸? 
=> 수년후 행여 결별이라도 하면 황색매체는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좋은 선후배로 남기로 했다'는 소속사 입장을 전할 걸.


 행여 들통날까봐 뒤를 연신 확인하며 애인을 만나러가는 불쌍한 소녀의 모습. 연애가 무슨 죄냐. 


vs.


영국 롤링스톤즈의 로니 우드(1947년생)가 2008년 무렵 사귄 1988년생 여친 예카테리나 이바노바 (Ekaterina Ivanova)와 한가롭게 거리를 걷고 있다. 41년 나이 차이니 한국 독자라면 기절이라도 해야 쓰겠네. 로니는 그녀와 헤어진 후 작년 34살 샐리 험프리즈(Sally Humphreys)와 재혼함. 

=>  그래서 결론: 연예인 강국 한국이 연애 선진국 되긴 글렀어.  



0415 파리5구의 여인


4월15일(월) 11시 왕십리CGV <파리 5구의 여인 The Woman in the Fifth>(2011) 시사 관람. 
아침에 깼을 때 너무 졸려서 갈지말지 30분간 누운 채 고민하다 결국 가서 본 영화.  '파리에 간 에단 호크'라는 영화적 설정 때문에 고민이 뒤엉킨 백일몽에선, 극중 상대 여배우로 줄리 델피가 나온다는 암시까지 받았다(물론 출연 안한다)

떨어져 사는 6살의 친딸, 임시 거처에서 만난 20대 여종업원, 문예모임에서 만난 미지의 중년 여인.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와 가방을 분실한 소설가 톰(에단 호크)이 직면한 관계의 트라이앵글. 톰이 겪는 설명 불가의 체험과 모호한 결말은 (차기 소설로 돈을 벌 경우 소송으로 양육권을 얻을 수도 있는)친딸과 (그의 첫소설을 읽고 그에게 매료된)여종업원과 (문예모임에서 만난)중년 여인을 연결시키는 그의 차기 소설에 대한 작가적 긴장과 강박이 밀어붙인 허구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경우 소설 쓰기에 관한 긴장을 다룬 소설 같기도 하고. 결과적으로 예술가의 뮤즈의 역할이었던 미지의 여인 마지트가 톰에게 건넨 말은 이런 추정의 타당성을 보강하는듯. "비극적인 상황을 겪은 당신은 정상에 오를 거에요." (나도 이와 유사한 격려를 주변 지인에게 때때로 해주는데...)


* 그 외의 미셀러니.

- 에단 호크와 파리라는 공간적 설정은 20대의 그를 배우로 각인시킨 <비포 선라이즈>에서 함께 열연한 프랑스 여배우 줄리 델피를 한쌍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 시사회 정보에서 줄리 델피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도 백일몽에선 그녀가 상대 배우로 나온다는 생각이 맴돈 걸 보면. 첫인상은 장기독재자.  
- 큰 창이 붙은 거실과 닫을 때 완강한 소리를 내는 프랑스 가옥의 문짝들. 그립고 애착이 갔다.   
- 비일상적 서사와 모호한 변수들이 난립하는 드라마를 반복해서 해독하다 보면 두뇌의 보수화는 미연에 예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청순한 마스크로 각인된 남자 배우의 나이든 면모를 거울 삼아 내 나이듦도 떠올렸다(에단 호크와 나는 동갑). 이것도 거울 뉴런(mirror neuron)과 연관이 있으려나? 
- 굵은테 안경을 착용한 에단호크의 나이든 얼굴 라인은 어떤 각도에선 미술사가 이인범을 연상시킬 정도다.
- 영화를 보는 내내 얼른 소모임이라도 하나 꾸려야지 하는, 그동안 연신 이행에 실패한 마음 속 다짐을 거듭 끄집어 냄.  




2013년 4월 14일 일요일

0413 미술원 졸전(175) 남화연(송원아트) 데이비드 살리(리안) 임선희(갤러리조선)


0413(토) 
미술원 전문사 졸전(2013.0307~0416 175갤러리)
페스티벌 봄2013 - 남화연 '가변크기' (2013.0322~0418 송원아트센터)
데이비드 살리 (2013.0315~0414 리안갤러리)
임선희 '장미빛 인생' (2013.0412~0501 갤러리조선)






미술원졸전(175) 

 어느덧 전시장의 익숙한 세팅 광경. 필수불가결의 동시대 창작 장비 외장하드+빔프로젝터 세트. 
  
2013 미술원 전문사 졸업전은 총 6회로 나뉘어 안국역 175에서 진행되는 모양이다. 자세한 정황은 내가 알 수 없지만 석관동에서 졸업예정자 전 인원을 몰아서 전시 하는 것보단 접근성에 유리하니 지금처럼 몇 회로건 나뉜 졸전을 안국역의 소갤러리에서 진행하는 게 나을 것 같다. 관람시간 30분 동안 출품된 졸업예정자 4명의 작품을 거의 다 보고 왔다. 넷 중 셋이 영상작업이데. 미술의 향방은 어찌 될까.




남화연(송원)

 전시공간 두 개층 모두에서 퍼포머와 관객이 뒤섞인 채 공연이 진행된다. 공연의 시간 진행상 시작과 끝이 있긴 하지만 그것을 명확히 인식하긴 어려운 공연이다.  

 퍼포머는 관중 속에 태연히 뒤섞여 있기도 한데, 공연 초반에는 함께 관람 중인 퍼포머의 정체를 인식하기 어렵다. 
 벽에 적힌 지시문을 바라보면서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지시를 따라하려드는 관객도 눈에 보였다.



 벽에서 떼어낸 가느다란 흰줄을 매개 삼아 두 퍼포머가 인위적인 인체 율동을 만든다. 뒤에서 이 장면을 구경하면서 퍼포머 둘이 줄로 이어진 이 짧은 순간에 관객이 개입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전시장 안. 국립현대미술관의 두 학예사. 국립기관의 기획자라면 이런 다원예술을 어떻게 해석할까. 

공연이 오후1시 시작한다 해서 시간 맞춰왔지만, 관람 인원 제한이 있어서 1시30분 공연을 봐야한대서 175의 한예종 졸전을 보고 돌아와 1시30분 공연을 봤다. 송원아트센터에 의자를 놓고 관람하는 무대예술인 줄 알았는데, 관객이 전시장 두개 층에서 퍼포머들과 뒤섞여 그들을 쳐다보는 관람 동선을 취한다. 
공연장은 퍼포머와 관객이 지키는 침묵이 가라 앉힌 30여분의 고요함과 백색 공간과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녹음된 독백 소리와 퍼포머들의 기계 작도 같은 움직임이 뒤엉켜 있다. 벽에는 눈높이(150cm가량)에 무언가를 지시하는 암호와 표시가 줄지어 적혀 있다. 명시적인 서사를 포함하지 않는 퍼포머들의 반복행동은 티노 세갈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데이비드 살리(리안)


 '나 때'는 David Salle를 데이비드 살르라고 표기했는데 보도를 살피니 데이비드 살리로 표기했더라. 
이 작가의 작품을 실물로 처음 근접 거리에서 본 건, 1993년 호암갤러리 '시절' <미국 포스트모던 대표작가 4인전>을 통해서였다. 나는 에릭 휘슬을 좋아해서 전시를 2회 정도 관람한 것 같다. 어쩐지 현주소로만 보면 에릭 휘슬과 데이비드 살르의 노정은 유사해 보인다. 전성기때 구축한 시감각적 방점이 너무 확연해서 그 방점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 특히 살르의 최신작은 이런 저런 각도를 눕히거나 세워놓은 반나체의 젊은 여체의 관음적 목적에 예속시켜놓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굳은 '분할 화면'으로 노골적인 관음주의를 한가로운 해변가 풍경으로 중화시키는 안일한 구성 일색이다. 
* 전시장에서 촬영을 금지해서 구글 검색하니 출품작은 물론이고 근작 다수가 잡힌다. 



임선희(조선)







+



부록 

 아이고. 이게 누군고. 팝 오케스트라의 거장 폴 모리아가 자신의 전성기를 마치자 한가한 틈을 타서 마지막 종착지인 동아시아의 분단국가를 방문하는구나. 고전 음악 지휘자들이 대중적 교감을 위해 이따금 인지도 높은 팝송 레퍼토리를 오케스타라의 선곡으로 꼽아 대중의 환호를 받을 때가 드물게 있는데, 폴 모리아는 숫제 그 팝 레퍼토리를 선점/독점해 버린 경우. 

저녁을 먹으러 명동에 갔다가 본 SPAO 매장 쇼윈도. 전속모델 소녀시대를 뒤이어 SPAO의 후속 모델이 된 f(x)와 슈퍼주니어. 늘어선 서열을 보니 소녀시대 윤아의 위치에 해당되는 자리에서 f(x)의 설리가 뜨는 중. 

0404 크리스 마커와 꼬레안들(에르메스) 0406 양대원작업실(덕소) 0410 대만현대미술(서울시립) 이득영(일민) 0412 권여현(OCI) 아티스트 포트폴리오(사비나) 무담 룩셈부르크 컬렉션(아트선재) Bloch&Vautier(선컨템포러리)


0404(목) 
'크리스 마커와 꼬레안들' (2013.0405~0611 아뜰리에 에르메스) 

0406(토)
양대원 작업실(2012.0406 덕소역 인근) 

0410(수)
'한국-대만 교류전 : 롤링! 비주얼 아트 인 타이완' (2013.0409~0616 서울시립미술관)
'이득영 사진전: 공원, 한강' (2013.0308~0428 일민미술관)

0412(금)
권여현 '맥거핀 desire' (2013.0307~0428 OCI미술관)
'아티스트 포트폴리오' (2013.0320~0524 사비나미술관)
'더 완벽한 날: 무담 룩셈부르크 컬렉션 (2013.0413~0623 아트선재센터)
Serge Bloch & Mireille Vautier 'Unexpected encounters' (2013.0413~0623 선컨템포러리)




크리스 마커와 꼬레안들(에르메스)


 크리스 마커, 정오의 올빼미 서곡: 텅 빈 사람들 

 크리스 마커, 승객들, 2008-2010

 승객들(부분)

 황세준, 루나틱; 달을 바라보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고, 비참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좌) + 크리스 마커, 한국인들(우)

 강홍구, 이중구속

 크리스 마커, 한국인들, 1957

 노재운, 방파제

'크리스 마커와 꼬레안들'은 다종예술가로 작년에 사망한 크리스 마커의 작품과 한국 작가 4명을 결합시킨 전시다. 전시 제목의 '코레안들'은 전시에 출품된 크리스 마커의 작품 제목(1957년 촬영한 사진작업)이기도 하고, 그와 결합된 한국 작가들을 중의적으로 지시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에 무게를 둔 작가여서 그의 전성기 때 작업과 타계직전에 촬영한 사진 작업을 현재 시점에서 보는 건 낡고 설명적이라고 느꼈다. 너무 낡은 방식의 화술이었다. 그의 작업에 호응해서 내놓은 국내 작가의 출품작도 흥미를 끌 진 못했다. 따라잡기 힘들 만큼 신속한 업그레이드의 시대 탓도 있겠지만, 이 전시는 동시대 관객과 호흡을 나누기엔 전반적으로 한두 템포가 느린 미적 감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설령 지난 작가의 '회고'전이라고 해도. 




양대원작업실(덕소)



 자세한 기록을 과거에 남겨두질 않은 탓에 확신 하진 못하지만, 덕소역은 연전에 가본 기억이 나는 것 같다. 그게 2010년 상명대 대학원 특강 때문에 당일 코스로 다녀온 건지, 아니면 가평 방향 자전거 집단 주행을 위해 자전거를 싣고 간 건진 확실치 않지만 있는 것 같다. (담부턴 보다 틈틈히 기록 남겨야지) 그런데 덕소역사가 왠지 눈에 익숙지 않아서 확신 할 수 없다. 다른 역에서 내린 걸 내가 오해한 건가....  이번 덕소역 갈때는 서울에서 자전거로 이동하려고 작심하고 네이버 지도로 경로까지 다 봐뒀지만 당일 비가 내리는 통에 이촌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다녀왔다. 





대만현대미술(서울시립)

 메이딩 옌, 삼민주의로 중국통일, 1991. 지난 과거의 정치인(쑨원)을 해상도 떨어지는 사진 편집으로 작업한 소품이어서 이 무슨 뒷북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제작 연도를 확인해보니 1991년. '음 그럼 그럴 수도 있지'하고 생각을 고쳐먹음.  

 궈전창, '95~96년의 기록: 총통. 부총통

 허우쥔밍, 수신, 1996
판화(?)처럼 보이는 소형 작품 여럿을 복사(내지 인쇄)해서 한 화면 위에 재구성한 후 다시 사람 크기로 확대시켜 복사(내지 인쇄) 해서 벽화처럼 늘어놓은 작업이다. 한자를 읽을 줄 몰라서 주루룩 선정적인 그림들만 열람하면서 봤는데, 내 뒤로 지나가는 왠 커플 관객이 내뱉은 딱 한마디가 이 작품을 정리해줬다. "쩌네." 

 린민홍, 무제-모임 시리즈: 정치학/의학(좌) 음악/공학(우), 2012

 린민홍, 무제-모임(포스터). 이 작품은 작가가 정치학 물리학 의학 공학 등 전공 분야가 다른 12명을 2인조 총 6팀으로 편성해서 자신이 구성해놓은 작품에 채색을 하게 만든 작업이란다. 지난 시절 긴 영예를 누린 올오버 추상회화는 오늘날 물성 실험이나 미학적 소신 때문에 그려지기 보다는, 이처럼 회화적 조롱 또는 썰렁한 농담을 위해 두루 차용되는 형편이다. 뭐건 장기독재를 하면 의례 이런저런 반대급부를 후대에 통과하는 것.     

 위안광밍(Yuan Goang-Ming), 사라져가는 풍경-경과 2, 2011. 도회적 삶의 현실성을 유지 시키면서 안정적으로 초고속 역동감을 보여주는 촬영 및 능력이 약간 놀랍다. 따지고 보면 단순한 미학적 논리에서 출발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따분한 영상예술 보단 낫다. 검색해 보니 이 작가는 같은 기법으로 장소만 바꿔서 이런 저런 작업들을 만든 모양이다. 관람 하시길(아래). 


이득영(일민) 



 1층은 낙엽의 효과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아마도) 가을 무렵 오색찬란한 산능선의 아름다움을 담은 항공 촬영 연작이 있다. 고해상도 화면에 담긴 인공적 도로는 숲과 대비를 이루면서 본래(의 도로가 지닌 인공성)보다 훨씬 비현실적인 곡선으로 그려진다.  
2층은 배로 이동하며 한강의 동선을 담은 '두얼굴'의 밤 버전이란다. 사진은 2개층으로 나뉘어 한강의 북쪽과 남쪽을 나란히 담고 있다. 2010년말이던가 (내 상태가 아주 안 좋을 때) 이득영의 한강 두얼굴 낮 버전을 보러 전시장에 간 기억이 났다. 야경으로 보일듯 말듯한 북쪽과 남쪽의 지형물에서 나는 한남대교 일대를 유심히 살폈는데 내가 찾으려는 장소는 발견하지 못했다. 2층 전시장은 암전된 듯한 화면의 효과 때문이기도 하지만, 잿빛으로 도색된 벽면과 그 위로 길게 늘어진 검고 굵은 사진의 띠, 그리고 천장 위에서 서늘하게 비치는 형광등 조명이 한덩어리의 공간 작업처럼 보였다. 한 줄기로 이어진 한강이 한 세트인 것처럼.   




권여현(OCI)
 헬로 들뢰즈씨, 2011. 
이 평면 작업을 비롯해서 '리좀'이란 제목을 붙인 여러 회화를 보며 든 생각은 이렇다. 프랑스 현대철학의 무분별한 유행이 한국의 인문 예술에 괜한 부담감만 남겼다. 

 아테나와 켄타우로스, 2007

 비너스와 마르스, 2012

 세종대 전시순회팀(2011년 제자: 나미나, 최재령, 황정원, 치명타)

교수 신분 작가와 그의 남녀 혼성 제자로 구성된 임의적 팀이 만든 창작물을 보여주는 전시. 지금처럼 작품 속에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 게 하나의 당당한 흐름으로 형성되기 훨씬 이전에 자기 출연의 방법론을 택한 이가 권여현이다. 
이 전시는 과거 작가의 이력에서도 발견되는 고전 명화의 차용, 작가 육체성의 강조, 근대적 작가상에 대한 불신, 작가의 지인들로 편성된 협업 구조, 학계 유행(프랑스철학)의 가벼운 차용, 디지털 사진 편집기술에 의존하는 태도, 이 모두를 작가의 자기애가 포함된 제의적 퍼포먼스로 결합하는 마무리를 취한다. 

권여현이 지인(대부분은 대학 제자)와 맺는 협업 창작은 미덕과 부작용을 나란히 갖는다. 이런 협업의 미덕은 지인(제자)에게 학교 수업에서 얻지 못할 현장 작업에 뛰어드는 긴장어린 체험 기회를 줄 테다. 또 창작자와의 유대감을 강화하는 협의의 관계미학적 가치도 갖는다. 반면 이런 협업의 부작용은 이제 더는 큰 의미를 생산하지 못하는 명화 차용과 직설법에 가까운 진술을 유의미한 창작술로 (제자들이) 오해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완성도에서 많이 뒤지는 디지털 사진 편집술마저 무심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점.  
내 생각에, 권여현의 작업을 격려하는 주변 지인(이 아마도 있을 텐데)의 조언에 작가가 더는 귀 기울이면 안된다고 본다.  





아티스트 포트폴리오(사비나)
 작가 포트폴리오를 온라인으로 열람하게 만든 사이트 ISSUU 

 노석미, 신선하고 뾰족한 가지, 2013

 강홍구

 유현미

'아티스트 포트폴리오'전은 자기 작업의 전개와 핵심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가의 미술 일지인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다양한 방법을 다룬 전시다. 위에도 인용한 온라인으로 작업을 열람하게 만든 사이트 ISSUU도 눈에 보인다. 연초에 있었던 Korean Artist Project에서 해외 소개할 국내 유망 중견작가들을 선정하는 심사에서도 최종 선정된 작가의 작품은 결국 온라인으로 구축된다. 언제고 접속해서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 KAP  
나는 특히 미디어 작가를 만날 때마다 당부하는 게 있는데, 부디 온라인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두라고. 




무담 룩셈부르크 컬렉션(아트선재)


 교이치 츠즈키, 행복한 희생양, 1998-2004

 마이클 애쉬킨, 무제(매일 깨어남과 함께 꿈 삯이 거두어지는 곳), 2008

 이번 전시의 타이틀로도 쓰인, Sylvie Blocher의 영상물 A More Perfect Day. 작품을 보려면 작가의 블로그에.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 유세 때 네세운 A more perfect union 연설문에 대한 변형이라고 들었다. 




Bloch&Vautier(선컨템포러리)
조진근 김두진 최진희 최진희 지인?
손님으로 가득 찬 전시 오프닝에 허겁지겁 도착해서 작품은 거의 보지도 못하고 짧은 친목만 주거니받거니 하다 돌아온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