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18일 목요일

0418 시저는 죽어야 한다 시사회



4월18일(목) 16시30시. 파올로&비토리오 타비아니 형제감독의 이탈리아 영화 <시저는 죽어야 한다> 시사회(왕십리CGV).


<시저는 죽어야 한다>의 도입부는 연극무대에서 연기 중인 배우들을 보여준다. 이 초반부만 보고 극의 전개를 <도그빌>처럼 연극 무대를 차용한 작품으로 알았다. 그런데 실제 연극무대의 한 장면을 단지 보여준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의 연극 리허설 과정을 영화 연출로 구성한 <시저는 죽어야 한다 Caesar Must Die>(2012) 작년 17회 부산영화제에도 초대받은 화제작인 모양이다. 로마 베비비아 교도소에 수감자의 연극 참여로 교화하는 프로그램이 있는 모양이다. 이 영화는 그 프로그램에 영감을 얻어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실제 수감자들이 연기하는 연극을 보여준 영화다.  

연극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는 측면에선 메이킹 필름이며, 리허설의 진행을 추적한 편집본인 점에선 과정예술이기에, 무대 연출을 응시하는 연출의 자기지시성이 강한 영화다. 영화 속 출연 배우들이 모두 수감자라는 충격 고백(1명을 제외하곤 여전히 수감 상태인 모양)이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화면에 덧붙으면서, 치유와 갱생의 유효한 수단으로 연극의 가치를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나는 큰 신뢰를 갖진 않으나 미술로 치면 미술치료에 빗댈 수 있으려나.... 그래서 영국 언론 텔레그래프Telegraph에 실린 영화 리뷰에는 "셰익스피어도 이 보다 자연스런 캐스팅을 할 수 없었을 것....Shakespeare could not have asked for a more instinctive cast...."이라는 지문이 실렸다고. => 예술이 개인에게 구원이자 희망일 수 있는 드문 경우. 

<시저는 죽어야 한다>는 교도소와 연극이 공유하는 지점들을 잘 이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교도소의 갇힌 공간과 세상의 연극 무대가 누군가의 감시와 관람이 용이한 구조로 짜여진 팝옵티콘의 공간인 점에서 그렇고, 교도소 내부의 위계가 수감자와 이들을 감시하는 교정당국 사이의 수직관계이듯, 영화에서 다룬 연극 '줄리어스 시저'에선 시저와 그를 암살하는 부르투스의 반군 사이가 수직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 연출을 맡은 형제 감독도 화제다. 이들의 초기작은 네오리얼리즘 전통을 계승한 기록 영화로 분류될 만큼 매우 연로한 생존 예술가다(파올로는 1931년생 비토리오는 1929년생). 
이 형제감독이 주는 교훈 => 저조한 예술 창작을 나이 탓으로 돌리지 말 것. 


** 영화의 도입부 연극 무대 장면을 거의 편집 없이 마지막에서 다시 한번 반복한 이유가 왜일까 궁금했는데, 극중 카시우스 배역의 코시마 레가(현재 무기징역 복역중)가 연극을 마치고 그가 수감된 방으로 다시 돌아와 내뱉는 독백 "예술을 알고나니 이 작은 방(그가 수감된 방)이 감옥이 되었구나"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감독은 배역에 몰입했을 때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배우의 감정과 무대를 떠나 고립된 자기 공간으로 돌아온 수감자의 감정을 대조하려고 했다고 밝힌다. 
=> 영화 전반부에도 출연배우들의 출신과 나이와 죄목이 열거되는데, 상당수 중늙은이처럼 생긴 자들이 죄다 나랑 똑같은 생년이 기재되어서 너무 놀랐다. '유럽인은 원래 노안이라 그런건가, 이제 내 나이대를 되돌아봐야 할땐가' 이런 생각을 잠겼다.
 



내가 볼때 대단치 않은 작품이 수상하는 사례를 여럿 목격한 터라, 예술상을 절대 반지 쯤으로 간주하진 않지만 아무튼 이 영화는 62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받았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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