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일 화요일

40대 작가 중간회고전 왜 필요한가 (월간사진 4월)

지난 3월13일(수) 충무로 토픽이미지에서 행한 사진 방담(엮인글)은, <월간사진>(4월)의 기획물로 문영민의 비평문과 함께 방담 전문이 수록 되었다. 




작가탐구 박진영
월간사진·고은사진미술관 공동기획
‘386세대’에서 ‘방랑기’까지, 박진영의 사진
한국 사진의 허리인 중견작가를 지원하고 재조명하는 의미에서 고은 컨템포러리 사진미술관(구 고은사진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중인 박진영의 사진전 <방랑기>(3월2일~5월9일)는 40대에 들어선 사진가의 지나온 성장과정을 점검하고 고찰하는 중간보고서 성격의 전시다. 고등학교 때 촬영한 35mm 흑백작업부터 최근의 대형작업까지 한 사진가의 성장 스토리와 지난 역사를 일별할 수 있다. 작가 입장에서는 작가로서 승부를 거는 지점을 가늠하는 반성과 성찰의 계기가 된다. 미술관은 첫 주자인 박진영을 시작으로 매년 1~2명의 40대 사진가의 중간보고서 전시를 계속 열 계획이다. 고은사진미술관의 중간보고서 전시와 맞물려 박진영의 지난 작업을 알 수 있는 문영민의 비평글을 싣고, 이러한 전시가 필요한지부터 박진영의 사진작업을 다각적으로 점검하는 대담을 마련했다.<편집자주> 디자인 | 000기자


1. 방랑기 : 기록의 여정_글 문영민
2. 40대 작가의 중간 회고전 왜 필요한가_박진영, 반이정, 신혜영의 대담

--------------------------------------------------------
방랑기 : 기록의 여정
글 | 문영민(작가, 미술비평, 메사추세츠 주립대 교수)

고은 컨템포러리 사진미술관(구 고은사진미술관 본관)에서 열리는 박진영의 사진전 <방랑기>(3월2일~5월9일)는 지난 20여년간의 주요 작업인 ‘386세대’, ‘서울서 버티기’, ‘서울..간격의 사회’, ‘아르바이트’, ‘도시소년’, ‘더 게임’, ‘히다마리’, ‘새마을운동’, ‘사진의 길’ 그리고 최근 ‘방랑기’ 연작까지 총망라되어, 40대에 들어서는 작가의 중간회고전이다. 그의 작업은 다큐멘터리 사진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일련의 실험으로서 사진의 근원적 문제로 다가가는 기록의 여정으로 볼 수 있다.
작업 초기에 박진영은 군부정권의 몰락 이후 변모하는 한국 사회의 모습을 담아냈다. ‘386세대’는 학생운동, 노동운동, 거리의 시위 등 시민사회의 투쟁 속의 진통의 순간들을 담아냈으며, ‘서울서 버티기’는 사회의 노동계층의 고단한 일상과 국익을 위해 희생된 서민들의 현실을 포착하고 있다.
컬러사진을 이용한 ‘아르바이트’ 이후에는 심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의 폭력성과 그 구조 안에서 착취당하는 이들을 다루었는데, 특기할 점은 작가가 그들의 이름과 일일 임금을 제목 속에서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루는 이 연작에서 박진영은 피사체를 극적으로 프레이밍하기보다는 처음으로 전방위적 시야를 보여주는 파노라마 형식을 도입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 취하는 객관성이라는 신화 또는 허구성이 명백하게 드러남과 함께 취약해진 다큐멘터리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역시 파노라마 형식을 취하는 ‘도시소년’ 연작에서는 상이한 이미지를 2장씩 병치함으로써 내러티브를 구축하는 등 사회적 다큐멘터리의 확장을 시도한다. 이 작업들은 꿈꾸는 청소년들과 그들이 처한 열악한 현실 그리고 그들이 이겨내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가시적이거나 비가시적인 거대한 사회적 구조들과 물리적, 경제적 여건들에 둘러싸인 연약한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속되는 냉전의 후속 여파를 파헤치는 ‘더 게임’ 연작에서 박진영은 처음으로 대형카메라를 사용하는데, 저널리즘적 다큐멘터리를 2미터 가량의 대형 화면으로 보여주는 담대한 시도를 보였다. 냉전구도 하에 민주정부 수립 이후 와해된 신화, 예를 들면 진위 논란 이후 잡초와 쓰레기 더미와 더불어 방치된 이승복 동상, 불안하게 부유하는 새터민 청소년들, 불발탄들이 꽂힌 매향리의 미사일폭격 현장 등의 묵시록적인 이미지들이 포함된다.
일본으로 옮겨간 뒤 박진영은 사진 본연의 요소와 기본조건들에 천착한다. ‘히다마리’ 연작은 약간의 빛만 있으면 사진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도로서, 현재 난무하는 이미지의 디지털 조작 없이 빛과 공간과 시간을 이용해 가장 직접적이며 고전적인 방법으로 최대한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소박한 욕구의 실천이다.
2011년 3월 동부 일본의 대지진을 맞아 박진영은 뉴스미디아의 경쟁적인 보도를 위한 저널리즘적인 사진가들의 무리에 합류하지 않고, 거리를 둔 채 쓰나미가 지난 이후의 흔적들을 엄정하게 잡아내고 있다. ‘사진의 길’은 이러한 기록의 모습과 더불어 재해현장에서 작가가 개인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예를 들면 자신이 나무에 걸어놓은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 찍다 죽을 뻔한 사진, 폐허에서 나뒹구는 유품들을 배열한 사진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그는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고 기록하려는 의지와 이와 상반되듯이 보일 수 있으나 현실에 자신의 의지를 개입하려는 두 가지 영역에서 동시에 작업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방랑기’ 연작은 동일본 대지진 이후 후쿠시마와 미야기현에서 습득한 사물들과 도쿄의 벼룩시장, 고물상 등에서 구한 것들도 포함한다. 그가 선택한 사물들의 공통점은 쓰나미라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어 내고 잔존한 것,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받은 것들, 낡았지만 버려지지 않고 계속 사용되는 것들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물체에 대한 연민은 곧 기능을 상실한 육체 또는 죽음과 그것의 기억에 대한 은유이며, 두고 가는 육체를 인식하는 작가 자신의 정신적 방랑기의 기록이기도 한 것이다. 이 연작은 또한 작가가 대형 필름 카메라를 고집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디지털 시대에 너무나 쉽게 찍고 지워버리는 무수한 사진들 그리고 조작된 이미지의 소비에 대한 저항적 의지로 보아야 한다.
전시제목인 <방랑기>는 그의 고향인 부산에서 지난 20여년간 사진가로서의 한국, 일본, 베트남 등 여러 곳의 여정을 돌아본다는 의미에서 볼 수도 있겠으나, 오히려 그의 작업은 ‘균형잡기’라는 그의 꾸준한 노력으로도 볼 수 있다. 움직이는 수단인 자전거나 목마와 같은 물체를 의인화한 듯한 ‘방랑기’는 센티멘털한 느낌을 줄 수도 있으리라. 하나 그 이면에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기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그의 물리적 이동, 정신적 부유 그리고 형식적 실험에 대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박진영의 다큐멘터리는 액션의 현장에서 ‘결정적 순간’을 취하는 ‘뜨거운’ 다큐멘터리 사진으로부터 사건 이후에 시간과 거리를 두고 엄정하고 ‘차갑게’ 관조하는 방식으로 전이해왔다. 박진영의 다큐멘터리의 실천은 애초에는 사건 즉시의 현장의 증거물로서 기능하다가 차츰 역사적 순간과 미적 순간이 결합된 형식으로 전이했다. 한편 ‘히다마리’, ‘사진의 길’에서의 개입 그리고 ‘방랑기’ 연작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기본으로 하는 역사적 인식을 전제로 하지만 특정한 역사적 의미를 거부하는 일종의 비역사적 순간들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이러한 세가지 경향의 다큐멘터리 방식을 경유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면에서 그의 작업은 다큐멘터리의 가능성 탐지와 모순 사이에서의 균형잡기의 일환이며, 이동과 여정의 기록인 만큼 기록의 여정이기도 하다.

====================================================


40대 작가의 중간 회고전 왜 필요한가
-- 박진영, 반이정, 신혜영의 대담

월간사진 : 고은 컨템포러리 사진미술관에서 처음으로 기획하는 박진영 작가의 사진전 <방랑기>는 40대 사진가에게 중간 회고전의 기회를 부여하는 취지를 가지는데요. 과연 40대에게 이러한 전시가 필요한지부터 이야기를 나눴으면 합니다.

신혜영 : 연령대로 구분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왠지 모르게 박진영 작가는 40대라는 나이에 비해 오래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반면 같은 40대라도 신인 같은 느낌의 작가도 있죠. 작가로 데뷔하는 연령이 각자 다르고,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도 제각각이기 때문에 연령대로 구분하는 것에 의문이 들어요. 물론 객관적인 수치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박진영 : 단순히 나이로 구분해 전시를 지원하는 개념은 아닐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중견작가를 지원하는 프로젝트를 시도하면서 아무래도 뚜렷하게 드러나는 선명한 개념이 필요했다고 봅니다. 외부에서 볼 때도 체계적인 구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세대별로 구별하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또한 단발성 기획이 아니라 정통사진을 표방하는 사진미술관으로서의 한국사진에 대한 향후 대안과 체계적인 전시 시스템 구축을 위해 모색된 시도(40대 중간보고서)이니만큼 저로서는 무한한 영광이자 그 중압감 역시 만만치만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반이정 : 20~30대 작가의 작업량이 부쩍 늘어난 데에는 매체 변화가 만든 조건 때문이겠지요. 디지털카메라의 보편화로 사진학과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지 않고도, 버금가거나 능가하는 작업을 비전공자가 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술판에서 사진으로 승부를 건 작가 가운데 상당수는 미대에서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경우거든요. 도제식으로 배운 사진전공자와 이들 사이의 차이는 시대정신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 같아요. 지금 40대 사진가에게 중간보고 전시가 필요한 이유를 답하긴 어렵지만, 세간에서 익숙해진 세대별로 작가를 분류하는 방법을 택한 것 같아요. 그래야 대외적으로도 이슈를 만들기 쉬울 테니까요.

신혜영 : 박진영 작가에게 받는 오래된 느낌이란 게 식상하다는 뜻이 아니라 작업량이 워낙 많아서인 듯합니다. 이런 경우 중간보고 전시를 한다든지 아니면 예전에 소개된 작업이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다르게 보여주거나 그동안 공개되지 못했던 작업을 보여준다면 전시가 의미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현재 활동하는 40대 작가라면 개인전을 통해 꾸준하게 작업을 알리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갤러리에 소속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들에게 굳이 중간보고라는 이름으로 회고전의 기회를 주는 이유는 뭘까요. 그래서 박진영 작가의 중간보고전이 어떻게 다르게 보여질지 무척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고은사진미술관의 다년간 기획이라니 앞으로 이러한 시도가 자리를 잡아가려면 어떤 작가를 선택하느냐가 가장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일방통행로에 진입한 40대 작가

월간사진 : 40대 사진가에게 중간보고 전시가 왜 필요한지 이야기를 하려면 40대 작가들이 처한 환경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박진영 : 작가의 선별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대체로 공감합니다. 개인적으로 40대 작가는 일반통행로에 들어섰다고 비유합니다. 후진도 어렵지만 후진을 하더라도 골목이 좁아 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면 여기저기 시간강사를 다니던지 아니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 40대 사진가의 현실입니다. 선배세대인 구본창, 배병우, 김아타, 민병헌, 권부문 등까지 50년대 초중반 태생의 사진가 중에는 ‘스타작가’나 ‘빅3’로 불리며 생계를 걱정하지 않고 작업을 하지만 나머지 작가들은 결코 형편이 녹녹치 않습니다. 그 아래인 50년대 중후반 60년대 초반 태생인 이갑철, 이상일, 정주하, 강용석, 최광호, 오형근, 강홍구, 이정진 등은 나름대로 꾸준히 작업의 길을 다져왔지만 그다지 비평이나 작업으로써 경제적인 문제로는 연결되지 않았죠. 이들 중에는 교수가 된 경우와 그렇지 않고 오롯이 작가의 길만 고집한 경우로 나뉩니다. 그나마 당시는 젊어서 유학을 다녀와서 열심히 하면 셋 중 하나는 사진학과의 전임교수가 될 수 있는 시절을 살았어요. 반면 요즘처럼 제작비를 지원받아 전시하는 것을 꿈도 못 꾸었고, 그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생활비를 벌어가며 작업을 햇어야 했죠. 이들에 비하면 지금 40대는 어느정도 시대를 잘 만났다고 보아야죠.

반이정 : 50~60대와 견주어 40대 사진가의 처지를 말씀했는데, 교수라는 안정적 직위를 얻은 작가를 너무 기준점으로 삼을 필요는 없습니다. 양질의 작업은 작가의 세속적 신분의 우위와는 상관이 없으니까요. 그보다는 40대 작가이 경험한 고유한 시대성을 따져보는 게 중요할 겁니다. 이동기(67년생), 정연두(69년생), 노순택(71년생), 정재호(71년생) 등 화단에는 1970년대 전후 출생한 세대들이 전성기를 오래 누렸는데, 이들은 대학 때 군사정권이 끝난 세대들입니다. 군사정권 동안 화단을 지배한 모노크롬 회화나 민중미술의 구도가 사라진 후에 미대를 다닌 거죠. 이전 세대와는 다른 주제의 재현을 요구받았던 세대입니다. 즉 완전히 새로운 미학적 프레임으로 작업을 할 수 있는 세대였던 거죠. 앞서 거론한 정연두, 조습, 윤정미 이외에 많은 작가들이 사진학과를 나오지 않고 일반적인 미대를 졸업했어요. 미술계와 사진계가 학제적으로는 나뉘어있지만, 이런 작가들의 장르적 월경 때문에, 사실상 그 경계가 사라졌다고 봐야 할 겁니다. 별도의 사진계를 구분하는 건 학제적 구분 외에는 큰 의미를 많이 상실했어요.

신혜영 : 그건 미술계의 시각이 아닐까요. 미술과 사진의 장르 경계가 허물졌다고 사진계와 미술계의 영역 구분이 무너졌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여전히 사진계의 특수성이 존재하고 그 안에서 사진가가 처한 현실의 특수성이 존재해요. 또 저는 40대라는 연령으로 그들의 환경을 말할 수 없고, 장르의 차이를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팔린다는 작가들은 풍경 아니면 정물 작업을 하지만 다큐멘터리나 인물사진 쪽은 판매되기 힘든 부분이 사실 있잖아요.

박진영 :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앞 세대에 비해 40대들은 시대를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이 활동하기 시작한 90년대 후반부터 사진이 미술관과 갤러리에 유입되면서 사진작품이 판매와 소장되기 시작했고, 문예진흥기금이나 작가상, 레지던시 등 지원제도도 생겼어요. 넉넉하지는 않지만 500~1,000만원의 제작비만 지원돼도 젊은 작가들은 1년을 버틸 수 있죠. 하지만 이마저도 40대가 되면 나이제한으로 지원이 대부분 끊어지기 때문에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라도 있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또한 시대가 바뀌어 유학만 다녀와서 대학 교수가 되던 시절은 지나갔고, 그 경쟁이 너무 치열해졌어요.

반이정 : 저는 지원제도에서 연령제한은 필요하다고 봐요. 그마저 없으면 주목 받았던 작가가 계속해서 기회를 얻어 세대교체가 더뎌집니다. 게다가 뉴미디어의 교체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이런 뉴미디어를 작업으로 연결하기에 유리한 것은 새로운 세대인 것도 사실이거든요. 이를 조명하려면 신진작가의 발굴이나 지원제도에서 나이제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디지털을 대하는 그들의 ‘삐딱함’

월간사진 : 40대 사진가의 처한 환경 중 학교를 다니면서는 아날로그를 배웠지만 졸업 뒤에는 디지털로 넘어가는 작업환경의 극심한 변화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박진영 : 사진의 역사에서 필름과 디지털의 전쟁은 나라를 불문하고 언젠가 재조명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디지털 사진의 정의와 분류 그에 따른 새로운 사진교육의 모색이나 대안없이 급작스럽게 쓰나미처럼 디지털이 밀려왔어요. 사진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디지털이 왜 올 수밖에 없었는지 성찰도 없이 지나간 느낌이 들어요.

반이정 : 기술의 발전이 파생적으로 디지털 사진을 가져왔는데 왜 디지털이 왔는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는 너무 많이 이뤄졌습니다. 그걸 집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새삼스러울 정도로요.

신혜영 : 저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보통 사진보다 먼저 발전한 영화는 현재 거의 100퍼센트가 디지털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이것이 필름인지 디지털인지 거의 못 느껴요. 영화는 디지털이라 해도 사진처럼 포토샵을 가하거나 눈에 띄는 예술적 터치가 부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경우가 다릅니다. 예를 들어 황규태나 강홍구의 작업에서 디지털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작업의 성격까지 변화시키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어떤 작업은 디지털이든 아날로그이든 별로 상관이 없고, 컴퓨터로 뽑으면 디지털이고 약품을 사용하면 아날로그라는 식으로 구분을 하기도 합니다. 디지털 프로세스에 의해 미학적 성격이 변하는 작업과 그렇지 않은 작업들이 혼재된 상황에서 후작업을 했는지 아닌지, 어느 정도를 했는지를 두고 혼란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박진영 : 2006년에 평택 대추리에서 시위현장을 촬영한 적이 있어요. 나중에 신문을 보다가 제가 본 현장과 보도사진이 약간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전봇대, 현수막 등 불필요한 부분을 지웠더라고요. 사소한 부분이지만 저널리즘 사진마저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고 느꼈습니다. 사진기자의 잘못이 아니라 데스크의 문제겠지만 말이죠. 필름시대와 달리 보도사진을 찍어도 더이상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어떻게 다큐멘터리 작업을 해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반이정 : 필름사진도 결국 디지털 후작업이 있어요. 즉 필름사진도 최종본은 디지털 스캔을 받아 최종 수정을 본 후 결과를 내놓습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필름이건 디지털카메라이건 결국 디지털 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순수한 필름사진의 독보성의 자리는 비좁아졌다는 말입니다.

박진영 : 물론 필름시대에도 후작업이 있었지만 디지털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저는 더욱더 필름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디지털적인 후작업을 가미하지 않고 필름 프로세스를 고집하면서도 완성도 있는 사진을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히다마리’ 시리즈를 시작했어요. 나름 필름사진의 결정판을 보여주고 싶었죠. 항간에서는 사회의식이 드러난 사진작업을 하다가 힘을 빠졌다거나 팔기 위해 변화를 줬다는 말들이 돌았어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


박진영의 뉴다큐멘터리, 무엇이 새롭나

월간사진 : 말씀하신대로 ‘히다마리’ 시리즈 이후로 이전 작업과 많은 변화를 보였는데요. 박진영 작가가 표방한 ‘뉴다큐멘터리’는 무엇인가요?

박진영 : 국내는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 사진의 경계가 모호했다고 생각해요. 다큐멘터리와 저널리즘에는 엄정한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작가의 시선이 개입하느냐의 문제인데, 저널리즘은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을 한다든지, 시각적으로 극적인 상황을 찍어 알게 모르게 관객을 설득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그냥 덤덤하게 찍습니다. 사건이 시작되기 전, 끝나고 난 후 그러한 상황에 더 관심이 있죠. 사실 밋밋한 사진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각종 힌트와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파노라마 형식과 대형카메라를 선택한 것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물 중심의 사진이 아니라 인물이 처한 환경까지를 보여주면서 역사의 한 단면을 드러낸다고 봤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대형카메라를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대형화 시키면 찍을 때는 생각지 못한 정보까지 세세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면서 사진 안의 정보를 읽는 것은 자연스럽게 관객의 몫이 됩니다. 기존의 휴머니즘적인 사진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고 해도 작가의 의도가 먼저 다가옵니다. 반면 제 작업들은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보여주려 노력합니다.

신혜영 : 그럼 그게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왜 뉴다큐멘터리인 것이죠?

반이정 : 기존에 연출 없이 촬영한 걸 두고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흔히 인식하잖아요. 하지만 윌리엄 이글스턴, 리 프리들랜드, 게리 위노그랜드 같은 사람은 피사체를 정자세로 세워놓고 찍었으니 연출이 들어간 셈인데, 다큐멘터리의 거물로 분류되죠. 뉴다큐멘터리 사진이라는 용어는 따로 없는 것 같고요. 아마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라는 의미로 일반 명사로 쓰이는 것 같더군요. 최근에는 테이트모던에서 어떤 큐레이터가 새로운 다큐멘터리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더군요. 미첼 엡스타인, 보리스 미하일로프 등이 거론되었던데, 요지는 이런 겁니다.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이 다큐멘터리 사진이었다면, 카메라가 대중화되고 다큐멘터리 사진도 보도사진과 혼재되면서 동시대 미술가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일종의 기법으로 차용한다’는 것입니다. 즉 사회고발에 방점을 두기보다 일종의 예술창작의 일환으로 다큐멘터리를 쓴다는 내용이었어요. 이건 국내에서도 사정이 비슷해 보입니다. 2006년 전후의 박진영의 파노라마 사진도 그 계열에 들어가겠지요. 요컨대 일하는 사람들의 노임을 기준으로 제목을 달았던 시리즈 작업 있잖아요? 사회적 현실을 과격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새로운 사회현상을 조형적 통일성을 갖고 마감을 한 작업이었죠. 그러니 뉴다큐멘터리의 하나로 볼 수 있겠지요. 박진영 외에도 외관상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분류되진 않지만, 기실 다큐멘터리의 방식을 따라 사회현상을 담아낸 경우는 미술계에 많습니다. 정연두의 ‘내 사랑 지니’나 윤정미의 ‘Pink&Blue project’는 누구도 다큐멘터리라고 부르지 않죠. 아닌 게 맞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뤄지지 않은 꿈을 실현시켜 주는 시도라는 점(정연두)이나 전세계 남녀를 구분짓는 색상으로 파란색과 분홍색이 일반적인데, 그걸 유형학적으로 분리해서 보여준 점(윤정미) 등은 눈으로 확인하는 사회학처럼 느껴집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처럼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사진만 다큐멘터리는 아니에요. 그런 개념은 1920년대에 대략 마감한 것 같고, 이제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연출력도, 조형적 마감도 중시되고 있습니다. 뉴다큐멘터리 사진은 이런 시도들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이는 것 같습니다.

신혜영 : 박진영 작가의 작업 중에 개인적으로 최근의 ‘사진의 길’이 양극단의 것을 모아서 중간의 형식으로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가장 의미 있다고 언급하고 싶은 작업은 파노라마 형식으로 비정규직의 임금을 보여준 작업이라고 봐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잔더의 작업처럼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보고서가 될 수 있었다고 보는데, 좀더 많이 찍고 체계화해서 깊이 있게 지속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박진영 : 작업한 양에 비한다면 발표된 양은 일부에 불과하죠. 그건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히다마리’와 ‘사진의 길’ 사이의 간격

월간사진 : ‘히다마리’ 이후의 박작가의 변화에 관해 더욱 얘기가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사회적인 내용이 강했는데, 사진의 본질적인 물음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입니다.

박진영 : 디지털 이후에 사진의 급속한 변화에 혼란스러움과 거부감을 느끼면서 스스로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디지털 기술의 도움 없이 완성도 높은 필름사진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아주 조금의 빛이 있은 상황에서도 원하는 결과물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스스로 겪으며 과연 사진의 본질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됐습니다. 아시다시피 필름으로 찍을 때와 디지털카메라로 찍을 때는 그 태도와 긴장감이 전혀 다릅니다. 많이 봐야하고 많이 기다려야 하거든요.

신혜영 : ‘히다마리’ 시리즈를 고양 창작스튜디오에서 처음 보고 좋지 않게 얘기했던 사람 중 한명입니다.(웃음) 지금은 작업을 하게 된 설명을 들으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당시는 결과물만 봤을 때 작가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보였습니다. 그 이전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이 담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가 거의 정물에 가까운 작업을 ‘뽀샤시’하게 내놨을 때는 ‘왜 이러지?’ 의구심을 가졌어요. 그 이후에 ‘사진의 길’ 시리즈까지 보면서 두 단계가 이해가 됐어요. 그러면서 사실상 앞서의 사회적인 작업들은 사회적인 의미가 있지만, 예술적인 형식면에서는 작가가 너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고 직접적으로 보여주니까 사회적인 역할에만 치중했다고 본다면 ‘히다마리’ 시리즈에는 개인의 예술적인 표현 즉, 무척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부분에만 치중했기 때문에 양극단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사진의 길’은 외관은 대형포맷에 정제된 느낌을 주지만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인 의미나 역할은 분명히 있어요. 일본의 대지진을 배경으로 하고, 보도사진과는 다른 접근으로 보여줬기 때문에 중요한 측면이 있다고 봐요. 그래서 당시에 제가 리뷰를 썼었는데요, 이 작업이 스튜디움과 푼크툼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표현했습니다. 개인적인 자극(푼크툼)과 보편적이고 문화적인 이야기(스튜디움) 이 두가지가 충족된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박진영 작가의 사진가로서의 길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렴돼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됐어요.

반이정 : 작년에 노순택, 오형근 사진가와 셋이서 사진전에 대해 나눈 대담이 있습니다. 박진영의 ‘사진의 길’에 대해서도 얘길 나눴는데, 지문 일부를 발췌했는데 읽어볼게요. “박진영의 이런 시도는 평론가로서 잘 읽기 힘듭니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박진영의 전시 제목이 ‘사진의 길 : 미야기현에서 앨범을 줍다’거든요.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는데, 자칫 이 무거운 주제 때문에 출품작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느낄 관객이 많을 겁니다.” 아마 에르메스에서 전시를 제안한 데에는 박진영의 종래 사진들 즉, 파노라마 형식에 사회적 문제를 담은 연작들이 준 인상 때문일 거라고 짐작합니다. 반면 ‘사진의 길’ 작업은 종래 박진영 브랜드와는 격차가 매우 크죠. 그런 조형적 격차 때문에 항간에서 전향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 있고, 그런 부분은 작가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봐요. 작년 에르메스 전시나 올해 고은사진미술관 전시는 박진영에게 40대 초반 무렵 자신의 작업을 정리하고 스스로 고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봅니다. 다만 너무 고무되어서 자기 논리에 빠지진 않았으면 하고, 주변 견해를 경청해야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에르메스 이후의 시도들은 박진영이 그동안 걸어온 자기규정으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되어 휴식을 취하는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거든요. 이 시간 동안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국내에서 걸어온 작업의 내력을 되짚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디지털 사진과 변별되는 필름사진의 질감에 대해선 평론가가 사진전공자만큼 잘 알지는 못합니다. 아무튼 필름사진에 대한 애착이 느껴지는데, 에르메스 이후의 본인의 필름 작업에 관해서 동료나 선배들과의 대화를 통해 정리하시면 될 것 같아요.

박진영 : 사진의 결과물을 보고 필름과 디지털의 오묘한 차이는 전문가만 알 수 있다고 말씀했는데, 저는 비단 사진이라는 시각적인 결과만을 보고 필름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진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대지진이 벌어진 참혹한 현장에서 후다닥 사진을 찍고 떠나는 게 아니라, 남아있는 사람들을 보고 풍경을 보고 공기를 느낍니다. 실제로 저는 촬영을 가면 빈집에 들어가고 흩어진 사진을 줍고 변해가는 풍경을 주시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합니다.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일?

월간사진 : 마지막으로 박진영 작가의 작업 계획과 반이정, 신혜영 두분의 마무리 말씀을 듣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박진영 : 지금도 지진 피해지역을 촬영하고 있습니다. 사진관, 공동묘지가 있던 자리, 변하는 풍경을 위주로 했다면 지금은 오브제가 중심입니다. 에르메스 전시에서 보여준 오브제보다는 피해자들의 사연이 담긴 오브제입니다. 예를 들면 피해자 시신의 뒷주머니에서 발견된 돈 같은 경우죠. 매일 3시간을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받은 3천엔을 늘 뒷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돌아오던 한 여성이 있었어요. 이날도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에 일을 나갔는데,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쓰나미를 만나 숨을 거두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유품이라며 그 돈을 지퍼락에 넣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연과 사진은 자주 촬영을 가다보면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자세의 문제와 관련해서 한말씀 드리면, 아무래도 자주 주민들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밀접한 사이가 되는데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깊은 교류는 피하게 됩니다. 엄정한 기록은 결국 시간이 말해주는 것이고, 지금 당장 이슈가 되지 않더라도 역사적인 의미에서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누구든 해야 할 작업입니다.

반이정 : 과거의 동적인 사진에 비하면 정물 느낌이 강해졌죠. 작가가 쓴 글에 “지역민에게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을 기회를 제공하려고 노력하겠다”라는 지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진작업을 위해 자료조사를 하다보면 자신이 찍는 사람이 아니라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에 가깝게 느껴진다”며 회의에 찬 고백도 남겼더군요. 그런데 앞으로 예술창작의 일부는 제작이 아니라 연출, 즉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이 될 거라고 저는 내다봅니다. 실제로 여러 작가들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에 가세해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어요. 정연두는 사실상 연출가에 가깝고요. 임민욱도 고문을 받은 피해자를 찾아내서 그를 전문 심리상담가와 만나 치유하도록 연출했는데, 피해자와 의사가 무대 위에 올라가서 청중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작품이었어요. 연출은 작가가 했고요. 비슷한 시도를 박진영이 어떻게 시도할지는 내가 모르지만, 일본의 지진 피해지역에서라면 충분히 시도해 볼만한 무엇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앞서 뉴다큐멘터리 이야기 때 거론된 해외 사진가들이 주목받은 이유가, 그들이 촬영한 지역의 독특한 사회문제를 파헤쳤기 때문이더군요. 박진영도 기왕에 일본에서 살고 있으니, 본인이 고백한 대로 지역민과 연계된 작업을 진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진 거라고 봅니다. 물론 그 방법까지 평론가가 간섭할 일은 아니지만요.

신혜영 : 저는 ‘사진의 길’ 작업이 장기간 진행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장소나 한 대상을 시간차를 두고 장기간 기록한다면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 될 수 있겠다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에르메스에서 보여줬던 이미지 이외에도 대재앙 이후의 일상을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이것이 단지 일본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사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박지수기자, 장소제공 및 사진촬영 토픽이미지



박진영 Area, Park
1972 부산 출생, 현재 일본에 거주하며 작업. 지역 외국인 신문 컴온뉴스 편집장
개인전
2012 사진의 길–미야기현에서 앨범을 줍다(아뜰리에 에르메스, 서울)
2011 ひだまり(토요타 포토 스페이스, 부산)
2008 ひだまり(갤러리 S, 서울)
2006 The Game 분단풍경 다시보기(금호미술관, 서울)
2005 Boys in the City 도시소년(금호미술관, 서울)
2004 서울..간격의 사회(조흥갤러리, 서울)
주요 단체전
2012 서울에서 살으렵니다(한미사진미술관)
대구사진비엔날레 도시의 비밀(상상발전소, 대구)
2011 The mechanical cocoon(Arti et Amicitiae 암스텔담, 네덜란드)
시선의 반격(라파트먼트 22, 모로코)
2010 한국현대사진의 조망(국립대만미술관 타이페이, 타이완)
아를르 사진축제(아를르, 프랑스)
2009 Chaotic harmony(휴스턴 현대미술관, 휴스턴, 미국)
Chaotic harmony(산타바바라 뮤지엄, LA, 미국)
2008 광주비엔날레 연례보고(광주 비엔날레관)
한국현대사진 60년 1948-2008전(국립현대미술관)
Trans Pop(YBCA 캘리포니아, 미국)
러시아 포토페스티벌(생테페테르부르크 뮤지움, 러시아)
2007 현대 한국사진의 풍경(서울시립미술관, 서울)
Fast Break(PKM 갤러리, 북경)
Trans Pop(아르코미술관, 서울)
2006 사춘기징후(로댕미술관, 서울)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 다큐로 본 아시아(Exco, 대구)
2005 Picturing Korean Vision &Visuality(이영미술관, 경기도)
청계천을 거닐다(서울시립미술관, 서울)
Fast Forward(레인반하우스 사진박물관, 프랑크푸르트, 독일)

캡션
방랑기, 2012-2013, 자전거
방랑기, 2012-2013, 버려진 화분-존 버거
왼쪽부터 취재용 방독면을 쓴 박진영(사진가), 신혜영(미술비평가), 반이정(미술비평가)
386세대, 1992, 전봇대
서울서 버티기, 2001, 어두운 과거를 접고 새 생활을 시작한 아저씨
서울서 버티기, 2001, 첫 돌을 맞아 할아버지를 찾은 아기
아르바이트, 2003, 한달 평균 120만원 버는 K모씨
더 게임, 2006, 외출나온 브래드와 동료
히다마리, 2008, 봄의 끝 #01
히다마리, 2008, 봄의 끝 #02
사진의 길, 2011-2012, 사진액자들
사진의 길, 2011-2012, 건물 #02(12.3m)
박진영 프로필 사진 안 캡션 : 박진영(사진 중앙미디어 장진영)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