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5일 금요일

이지현 작가리뷰 (월간미술 4월)


* 지난 3월13일(수) 본 이지현 개인전(엮인글)에 관한 글. <월간미술>(4월)에 '작가리뷰'에 실렸다.






Threshold-Mirror, 2012, Oil on canvas,


문지방을 넘어선 체험기




반이정 미술평론가

두산 갤러리 네 벽면을 두른 캔버스의 도열로부터 친숙하게 이지현의 브랜드를 유추해 낼 수 있다. 한 화면 내에서 상호 무관한 이미지들의 병치, 병치된 구성이 파생시키는 화면의 비원근법적 분할 구도, 스냅 사진 기록의 페인팅 전용에 이르기까지. 작가 브랜드는 익숙한 작업군이 쌓여 각인 효과가 생기면서 형성된다. 이번 개인전에서 2010년 이전 작업군과 작은 편차나마 느껴진 건 소품들을 벽면 한곳에 비균질적으로 몰아넣은 <Fantasma>였다. 한편 친숙하게 이지현 브랜드를 각인시키며 눈에 들어온 출품작은 <National G.+Sand castle>이었는데, 후일 확인해 보니 이 작업의 제작 연도는 작가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한 해 전인 2009년 제작되었더라. 

모국에서 활동하며 남긴 작업 연보 중에, 국외 유명 미술관의 빈 벽면에 엉뚱한 이미지를 난데없이 삽입시킨 작업 연작이 연상되었기 때문에 그 작품에서 친근감을 느낀 탓도 있을 테고, 미국 거주 기간에 제작한 화면들이 백사장 패턴이 강조된 해변 그림이 많아서, 도회적 질감이 높은 미술관 연작이 시각적 변별력을 띠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전시장에서 2009년의 회화가 쉽게 식별되었던 데에는, 이지현을 환기시키는 단서가 고대 유적과 유수의 해외 미술관 같은 공적 공간의 여백 안에 사적인 시공간의 일부를 삽입한 일련의 작업이 잔상으로 오래남아서 일 것이다. 관련 없는 둘 이상을 한 화면 속에 충돌시키는 병치 구성, 공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관점을 다뤄온 점, 작가 자신이 실제 체험한 시공간을 재현 대상으로 선별한 점, 기억을 기록으로 옮기는 매체로 스냅 사진을 이용한 점, 붓질의 질감이 살아있는 화술을 유지한 점, 그리고 선형적 이야기의 흐름을 훼방하는 혹은 이야기보다 단편 이미지에 방점을 둔 구성에 이르기까지 2010년 출국 이전과 출국 이후의 포맷은 큰 틀에서 바뀌지 않았다. 

미세한 차이점은 작가의 이동시점(한국민으로 들뜬 시선으로 본 해외 명승지 →미국 거주민의 익숙한 시선으로 보는 현지)으로부터 나온다. 그 이동시점은 동일한 시공간을 안과 밖으로 나누는 문지방을 닮아 있다. 안과 밖이라는 다른 기운으로 같은 공간을 가르는 문지방의 경계처럼, 작가가 유랑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명승지나 미술관의 경관은 유랑자의 설렘을 간직한 관객 일반에게도 동일하게 반복 체험 될 것이다. 그러니 2010년 이전 작업(한국에서 활동한 기간)은 스펙터클 지수가 높고, 반쯤은 이방인 신분이 된 2010년 이후 작업(미국 거주 기간)은 선망의 시선이 여과되어 현지와 자신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응시하는 자기 몰입적인 시선이 지배한다. 그림 역시 사색적이고 침잠된 화면으로 나타난다. 유아론적 고민이 밴 화면 속으로 관객 일반이 개입할 틈은 상대적으로 좁아진다.



National G.+Sand castle, 2009


Bird Mobile, 2011-2012, Oil on Canvas


무관한 이미지를 병치시킨 화면은 어떤 효과를 만들까?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은 이질적인 대상들의 공존으로 시각적 참신성을 증폭시키는 효과다. 이런 기법을 초기 전위 예술가 집단이 선택한 데에는 회화가 줄곧 지켜온 관행과 시대 변화 사이의 시차 극복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훨씬 유능한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서사를 담는 회화의 권위가 위협당한 시기도 그 무렵의 사정이었다. 회화의 직무와 매력을 둘러싼 회의감과 자성은 지난 시절 회화 기술을 익히는 지식정보사회의 예술가에게는 더 절실할 것이다. 이때 저항감이 생겨난 화가의 자의식은 규칙을 위반하는 실험을 잔잔하게 시도하고 싶을 것이다. 파편으로 나뉜 작은 화면들로 최종 화면을 구성하여, 선형적 이야기의 명료함을 훼방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다. <Colosseum+Dressing Table 1>(2006)은 연간 4만여 순례자가 방문한다는 현대 로마의 랜드 마크가 된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을 다룬 그림이다. 압도적인 공공의 스펙터클과 보석 액세서리와 의류 더미를 데페이즈망 시켰다. 관광지로 복원된 원형 경기장의 아치형 입구 테두리마다 보석과 화장품 용기들을 채워 넣었다. 

2000년대 중반 완성된 ‘미술관 연작’의 구성은 대개 이 작품과 유사한 전철을 밟는다. 서구 미술관의 실내외 공간의 여백에 누군가의 소지품으로 보이는 개인 사물을 뜬금없이 개입시킨 구성. 한데 그 첫인상부터 압도적인 볼거리다. 설령 직접 가본 적이 없는 관객이어도 누차 사진자료를 통해 접한 유수의 미술관 스냅 장면은 친숙하게 응시할 수 있는 볼거리이다. 그렇지만 다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리라. 유한 취미의 산물인 해외 여행지 스냅사진 이미지만으론 싱거운 직설법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이때 개입하는 것이 공공의 구경거리에 슬그머니 끼어든 사생활의 단편이다. 연관 없는 둘이 결합하면서 비대칭적 긴장감이 발생한다. 더군다나 연작들을 면밀히 뜯어보노라면 공적 공간들마다 간섭한 그 문제의 소지품 주인이 바로 작가라는 추정에 이른다(확인 결과, 맞다고 한다). 공공의 구경거리에 사사로운 엿보기의 유혹이 덧붙는다. 그림에 포함된 엿보기의 사물은 소유자의 사생활을 노출시키거나 선정적인 소지품이 아니다. 명품 레이블이 슬쩍 보이는 옷가지와 화장품 보석류 액세서리 그리고 전공자 신분을 노출시키는 (아마도 미대생 신분일 때 집중적으로 구입한 듯한) 무심하게 한구석에 쌓인 미술서적과 미술잡지가 전부다. 이런 구성은 성공한 예술가에 대한 작가의 선망과 자기애가 투영된 것일 게다. 세계 예술의 전당들의 빈 여백마다 개인 소지품을 틈틈이 끼워 넣은 데페이즈망의 낯선 화면들은 화면의 무질서를 증가시키지만, 오히려 볼거리와 호기심을 배가시키는 역설도 지닌다.

<National G.+Sand castle>(2009)은 2010년 이후 미국에 거주하는 동안 많은 연작 속에 포함시킨 백사장 해변을 내셔널 갤러리 내부 벽면에 기입하고 갤러리에 상설 설치된 작품으로 보이는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이 화면 정중앙에 드리워진 모습을 담았다. 이런 병치 구성은 현대 화가 데이비드 살르가 시도한 바 있지만, 이지현(세대의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병치 구성은 선배 세대와는 다른 두 가지 배경이 작동한 결과 같다. 병치된 화면은 이야기의 연속성을 훼방하는 이미지 파편들로 구성되기 마련인데, 단속적인 파편 이미지들 외에는 이야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든 화면으로 종결된다. 그렇지만 이야기를 분산시키는 파편 이미지들의 총체를 익숙하게 체험하는 것이 동시대의 현재적 삶이다. 우리 세대가 이미지와 텍스트를 접하는 주요 채널은 인터넷으로 수렴 된지 오래인데, 인터넷은 하이퍼링크들로 연결된 단속적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되어 있다. 

선형적 흐름에 따르는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하지만, 웹사이트 이야기 재현 방식은 상호연관성이 낮은 무수한 이미지와 텍스트들을 무작위로 병치시킨 세계를 통해 구현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지현 세대가 구사하는 병치된 화면은 지식 정보 사회의 일상적 경험과 대등한 시각 체험일 수 있다. 병치된 화면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가능한 해석은 정해진 프레임 안에 재현의 상상력을 가두는 회화의 오랜 관행을 넘어서는 노력으로 보는 것이리라. 고전적인 액자로 짜인 거울 위에 창틀과 인물을 그려 넣은 <Window 1- Interactive>(2003)와 벽 모퉁이에 변형 캔버스들을 마주보게 붙여서 평면 회화의 관례적인 모양새와 위치를 비튼 <Inner space-Dressing table>(2004)나 <Met+Rm>(2004)같은 초기 형식 실험들은 창작자의 자의식에서 비롯한 것일 텐데, 유사한 구성이 신작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난다. 

<Fantasma>(2010-2012)는 20점 이상의 회화 소품들을 벽면에 나열한 회화 설치물이다. 이 작품은 미국 전시에서 동일한 제목으로 설치된 바 있는데, 그때와 지금은 배열 순서와 선택된 작품의 개수에서 차이가 난다. 정해진 배열 규칙 없이 무작위로 병치했다는 얘기이다. 설치할 때마다 육감을 믿고 맘에 드는 구도로 소품들을 배열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무작위적 배열은 한 화면 안에서 무관한 이미지를 병치시켰던 종래의 자기 브랜드를 설치물로 연장시킨 것일 게다. 이 작은 소품들 사이로 미미한 유기성은 있을 테지만, 기본적으로 각 소품마다 독자적인 존재감을 갖는 그럼처럼 보였다.

빈틈없이 전면을 채우는 공백공포(horror vacui)는 빅토리아풍 장식 문양, 이슬람 아라베스크 양식 같은 구시대 예술에서 모티브가 되었고, 현대 예술에서도 여전히 자주 관찰된다. 이지현의 화면에서도 차용되어 살아나는데, 유한 취미와 자기애로 빽빽이 채운 장식적 화면의 공백공포는 2010년이라는 문지방을 넘어서면서, 백사장 위에 무수한 발자국으로 움푹 팬 패턴으로 연결되거나, 벌집 모양 육각형 패턴이 중첩된 화면으로 계승되었다. 벌집의 망사형태, 모래사장의 패턴, 씨실과 날실로 엉킨 뜨개질의 패턴은 “시작점을 알 수 없는 생각의 단서로부터 연쇄적인 연상을 이어가는 평소 습관을 화면으로 구성한 것”이라고 한다. 예의 벌집 패턴과 계단으로 뒤엉킨 공백공포의 화면에서 종래 화면들이 지닌 스펙터클보다 추상성이 느껴진 이유는, 작가의 브랜드를 제조한 공식과 원점을 풀어놨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로운 결과물은 문지방을 넘어선 체험이 낳았으리라.


Fantasma series_Installation view at DOOSAN Gallery, Seoul, 2013






이지현: 197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신여대 서양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아라리오 갤러리 베이징(2006), 두산갤러리 뉴욕(2012)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2000년부터 수 십회의 그룹전에 출품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벽산 엔지니어링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뉴욕 두산 레지던시(2012)로 있으면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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