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9일 화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동물사랑 (씨네21)


* <씨네21>(899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70회분. <씨네21>이 이번 달 창간 개편 예정이어서, 이 원고가 연재 최종회가 될 것으로 얘기가 마무리 된 상태였다. 4년째 연재했으니 오래쓴 거다. 한데 어떤 사연인지 연재를 계속하는 걸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아무튼 내가 염두에 둔 마지막 주제는 쓰기가 쉽지 않았다.
  


Heart to Heart



상좌. 새앙토끼를 모델로 가공한 피카츄와 깜찍 셀카를 찍은 손연재
상우. 애견과 찍은 기념사진
하좌. 손바닥으로 움켜 쥔 프레리도그
하우. 고양이의 기호를 빌려와 귀여움을 돋보인 인터넷 얼짱 김윤교




예술의 전당 바깥에서 탄성을 자아내는 무엇과 만날 때, 그 훌륭함을 상찬하기 위해 “거의 예술이다.”라는 찬사를 망설임 없이 가져온다. 시각적 쾌감, 독보적인 기교, 능수능란한 수완, 그리고 관람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일련의 체험들이 예술과 진배없다고 느껴서다. 무한 기능의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초소형 스마트기기, 순발력 있게 즉문즉답을 해치우는 예능인, 혹은 고층건물을 맨손 등반하는 한 모험가의 도전까지, 예술에 준하는 감동을 안기는 변방의 맹주들은 수두룩하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을 쏟아내는 이 무한 감동 연주자의 대열 속에 동물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초롱초롱한 눈매를 중심으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배치된 동물의 인상은 창작물이 의인화 시킨 표정과는 차원이 다른 원본의 질감을 자랑한다. 인간처럼 안면근육을 섬세하게 이완시켜서 감정을 표시하지 못하는 동물의 표정은 실상 중립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중립적인 인상이야말로 동물의 순정 매력 포인트다. 순박한 눈매의 개는 성품도 순종적이며, 표독스러운 눈매의 고양이는 성품도 얌체를 닮았는데, 성품을 정직하게 증언하는 동물의 표정은 오히려 가산점이 된다. 마찬가지로 원초적 본능에 거리낌 없는 동물의 순수한 반응도 문명 이전 인간의 원시성을 환기시키면서 잃어버린 것에 대한 향수와 현재의 억압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동물에 대한 인간의 애착이 모든 류(類)에 공평하진 않다. 어류 조류 파충류보다 유독 포유류를 편애하는 이유는 신체 접촉 면적을 넓힐 수 있는 반려 동물 중 포유류가 많다는 점, 그리고 영장류 인간과 감정 교류를 하기에 포유류가 적합하다는 경험칙 때문일 것이다. 동물이 발산하는 매력 포인트는 공감각적이고 입체적이다. 동물의 눈코입을 좌우대칭으로 모아놓은 정면 표정은 앙증맞은 시각적 기호로 박제화 되었다. 특히 포유류의 코언저리를 약호화 시킨 무수한 표시들(=^ㅅ^= 'ㅅ')은 귀여움의 액세서리가 되어 인간 얼굴 위에 널리 차용되는 실정이다. 

한편 탁구공처럼 통통 튀듯 이동하는 네 발의 리듬감은 키네틱 아트의 미학을 넘어선, 동일한 유기체로서 느끼는 동질감을 안긴다. 털로 덮인 동물의 몸통을 품에 안을 때면, 이성애적 밀착감과 유사한 감정을 체험한다. 이 외에도 자잘한 애정의 액세서리는 무수하다. 뒤집어 본 동물의 발바닥, 몸에서 피어오르는 고유한 노린내, 털 속에 숨어있는 연분홍 살색까지 동물의 몸은 공감각 자극의 총체다. 반려동물과 인간 사이의 감정적 동기화는 피붙이에 대한 조건반사적 애착과는 유전적인 출발점에선 다르지만, 그들이 분신처럼 느껴지는 점에선 같다. 이처럼 한없는 충족 요건에도 불구하고 동물이 예술처럼 숭앙되진 않는다. 희소가치를 느끼기엔 너무 많고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일 것이다. 예술은 전시장에 박제되어 불특정 다수에게 관람되지만, 동물은 사라진 후 가슴에 박제되어 특정 소수에게 기억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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