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9일 일요일

0601 문지혜(정다방) 0605 한수정(소소) 0606 아직 모르는 집(풀) 조습(팔레드서울) 0607 이경(에무)

0601(토)
문지혜 '잊어버린, 잃어버린' (2013.0525~0609 정다방 프로젝트)

0605(수)
한수정 'Flower' (2013.0606~0707 갤러리 소소)

0606(목)
'아직 모르는 집' (2013.0516~0628 아트스페이스 풀)
조습 '달타령 II: 해를 품은 달' (2013.0606~0620 팔레 드 서울)

0607(금)
이경 '형용사로서의 색채' (2013.0607~0630 복합문화공간 에무)




문지혜(정다방)





 (아마도 2009년 제자였을) 문지혜의 개인전. 문래동에 있는 '정다방 프로젝트'는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가보긴 처음 가봤다. 
미술창작의 동력으로 창작자 개인의 기억이 차지하는 비중을 재차 확인할 수 있는 전시. 개인의 추억 중 한조각으로 공간 하나를 다 채울 수 있다. 설령 다수의 공감을 얻지 못한들 창작자 한 사람만 의미를 찾는다면, 즉 작업이 작가 자신을 향한 것이라면 이런 고백/기록/치유가 혼합된 미술을 견제할 자격은 누구도 갖지 못할 것이다.     



한수정(소소)




 허윤희, 금혜원(소소 관장), 김정욱 


 한수정이 자초한 제한된 인맥. 개인전을 보러 헤이리까지 찾아준 손님들의 면면을 쭉 둘러보니, 한수정이 화단 활동을 막 시작한 90년대 초반의 여러 전시 개막식의 풍경들이랑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상단은 서울예고 동기들 + 하단은 왼쪽부터: 허구영, 홍명섭, 이인현, 김형관, 이윤희, 김해민) 

꽃그림 전시. 갤러리 실내 공간과 화폭이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전시 뒷풀이 식당 위치에 관해  "쭉 가다가 마지막 모텔을 끼고 돌라"는 언질을 받고 이동했는데, 정확히 묘사하면 마지막 모텔이 아니라 집합모텔촌이라고 해야 옳다. 요란한 네온 광고를 뒤집어 쓴 유사한 구조의 모텔들이 다닥다닥 붙은 모텔집합체가 등장하는데 왠지 소유주마저 한명일 것 같다고 느껴질 만큼 통일된 옴니버스형 건축물이었다.   




아직 모르는 집-강정석 권용주 김영글 이은우 이정민(풀)





 '아트 스페이스 풀'로 이름을 교체한 대안공간 풀은 한국 화단의 대안공간 운영 주체가 관과 사기업체로 넘어간 현주소를 보여준다. 구기동 언저리로 자리를 옮긴 풀은 아늑한 실내와 수풀이 자란 실외까지 소수를 위한 코뮨 거점처럼 느껴졌다. 

해설 없이도 독해 해볼 만한 전시나 작업이 있는가 하면, 해설을 읽고도 전시의 지형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전시나 작업이 있는데, '아직 모르는 집'은 뒷쪽에 가깝고 상당수 중요한 현대미술 기획전이 차츰 뒷쪽에 가까운 기획 흐름을 따른다. 기획안만 두고 볼땐 쓸 만한데 출품작들과 기획안을 연관지어 보려고 들면 해설에 맞춰 작업 하나하나를 읽게 된다. 뭐 꼭 그래선 안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이런 기획이 차츰 느는 걸 텐데, 이런 기획전이 하나의 조류를 이룰 때 비평이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조습(팔레드서울)



 벽에 걸린 사진마다 과장된 분장에 소품을 들고 신파조 연기에 임하는 조습의 몰입된 장면을 반복해서 만나게 된다. 그런 사진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당장 호응을 얻지 못하더라도, 저런 연기에 몰입하면 진짜 즐거운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뒷풀이 자리에서 작가에게 내 궁금증을 털어놨더니, '그렇다'고 답했다.   

 강영민, 최범

 카메라를 들이대면 포즈를 미묘하게 변화 시키면서 촬영에 임하는 '카메라 의식형 인간' 조습.

 결코 이 정도 사이가 아님에도 카메라 의식형 인간과 기념사진 촬영하다보니 초래된 '강압형 허그 포즈'. 
예상대로 고깃집을 뒷풀이 식당으로 잡았길래 나는 '밥 찌개 소주'를 세트로 먹다왔다.




이경(에무)



 이경.

 전시장 안에 마련된 틈새 공간을 못 보고 나간 관객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전시장에 둘러보다가 자칫 놓칠 수 있는 틈새 공간. 

 함께 전시를 본 2011년 제자&작가 이진아.

곰돌아~. '에무'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걸린 사진. 

각 색채가 특정 형용사와 연관을 맺을 거라는 믿음은 이 전시를 거론하지 않아도 연원이 퍽 길다. 괴테는 말년 역작을 20년 이상 손을 봤는데 문학이 아닌 사이비과학에 가까운 <색채론 Zur Farbenlehre>(초판 1810)이었다. 색채이론가로 변신한 괴테는 노랑과 파랑을 축으로 색채이론을 전개한다. 미술가 칸딘스키도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의 한 장을 색채이론에 할애한다. 노랑과 파랑을 대비시킨 점에선 괴테와 같다. 현대 신경심리학자 쿠르트 골드스타인은 인체에 작용하는 색의 기능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고, 병리적으로 빨간색이 파킨슨병 환자의 상태를 악화시키는 반면, 녹색은 개선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90년에는 제이콥스와 후스트마이가 색과 생리 및 심리 반응에 관한 공동 연구를 발표하기도 했다. 사이비과학적이지만 보편적으로 널리 수용되는 민간의 색깔론에 관해선 나도 2005년께 <한겨레21> 연재물 속에 수차례 다룬 적이 있는데, 후일 간단한 단행본으로 연재물을 묶어내려고 몇차례 다듬었지만 오늘날까지 출간하지 못했다. 이 전시도 주관적인 색채론의 주관적인 위력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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