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01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71회분.
사교(社交)와 사교(邪敎)
상좌. 에릭 휘슬, <중년 남성의 보트와 그의 개>, 1982년
상우. 테리 로저스, <평온의 허무함>, 2006년
하좌. <숏버스> 포스터 2006년
하우. <아이즈 와이드 샷> 1999년
우. 홍대클럽 <짝짓기 파티> 홍보 포스터, 2011년
‘애정 행위자로 연인 둘’을 상정하는 사회적 합의에 도발적 위협 가운데 하나가 난교다. 하지만 난교 파티는 황홀경을 동반한 신성한 의식으로, 고대 사회에서 시원을 찾을 만큼 전통이 유구하다. 여럿이 뒤섞여 혼음을 나누는 난교 파티는 가공된 이야기 속에 틈만 나면 소환되곤 했다. 바커스 축제를 묘사한 고전 회화부터 현대적 영화의 스토리텔링까지 그것은 일상의 사이클을 과격하게 거스르는 반전의 단서로 쓰인다. 이를테면 난교는 반윤리와 반미학을 실행하는 집단 퍼포먼스다. 고풍스런 19세기 대저택에 비밀리에 모여 가면으로 신분을 가리고 집단 난교 파티에 빠져든 <아이즈 와이드 샷>은 공동체 일각에서 소수 특권층이 누릴 베일에 가린 남모를 유희에 관한 풍자인 것 같기도 하다.
난교 파티에 포함된 엄숙한 의식(儀式)도 계급적 연대감을 확인하는 대의명분 때문에 거행된 건지도 모른다. <숏버스>의 난교 장면은 계급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정상인의 인륜에 저항하는 비주류 특유의 자기도취 방편으로 삽입된 것 같다. 전성기 시절 화가 에릭 휘슬이 내놓은 무수한 화면 속에 근친상간이나 무분별한 난교 파티가 연상 되는 설정이 잦은 건 따분한 미국 중산층의 삶을 향한 희화와 자조를 표현하기에 성적 문란만큼 적합한 단서가 없어서가 아닐까. 하지만 후대의 노골적 상업 화가 테리 로저스는 우회적인 사회 풍자보다는 돌직구를 던진다. 어딜 봐도 유명인사의 미모와 육체를 소유한 청춘 남녀들의 흥건한 파티를 파편적으로 모아 한 화면에 담았다. 그 안에는 풍자나 암시 따위는 종적을 감추고 오직 진솔한 관음의 욕망만 가득 차있다.
수준과 규모 면에서 차이를 보일 뿐, 테리 로저스의 난교 파티를 그저 관음적 소비 대상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반복하는 사례는 있다(어쩌면 많을 것 같다). 지어낸 설화에나 나오는 비현실적 난교가 현실에서 시행되다가 ‘부주의’로 발각되는 사건들이 보도되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고위 관리들이 포함된 남녀 여섯의 난교 장면은 그들이 자처해서 촬영한 기념사진 120장이 과실로 유출되는 통에 세상에 알려졌다. 현실 속 난교가 비단 이처럼 비밀에 부쳐진 극소수 멤버의 사교 모임에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고대의 난교 파티는 공개된 파티 문화의 얼굴을 하고 현대 사회에서 속속 출연한다. 현행법과 공동체의 완고한 도덕적 감시망을 피하려고 완화된 형식을 취할 뿐이다. 홍대 클럽데이를 앞두고 참여 고객을 상대로 모텔비를 지급한다는 파격적인 경품 이벤트를 내건 어느 클럽의 전략이 그런 경우이다. 그러나 이 행사는 선정성 논란과 언론의 집중 취재로 결국 무산되었다. 이 행사의 취소 배경에는 외견상 부도덕을 향한 질타가 자리하지만, (준)난교파티 마저 황홀경을 동반하는 소수의 이권이라고 믿는 정상 사회의 집단 시기심이 저지 요인일 것이다. 난교 파티가 통상 가면으로 신분을 숨기고 의례로 엄숙함을 위장하는 이유이리라. 예술적 감식안도 극소수만이 소유하는 법인데, 주변 집단의 몰이해를 피하려고 엄숙한 관념을 부여하곤 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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