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11일 일요일

명함이 말하는 과거사

명함은 상대방의 신상정보에 대한 약술이기보다, 대면할 때 주고 받는 거의 무의미한 세리모니의 흔적으로 남았다. 용도가 무의미한 지경이어서 2012년 신대방동을 떠날 때는 그간 받은 명함들을 산처럼 쌓고 '화형식'까지 치룬 적이 있다(엮인글). 
살던 집으로 돌아온 후 먼지 덮인 자료를 처분하는 중인데, 명함을 모아놓은 명함철이 2권이나 있다는 걸 알았다. 2000년대 초중반때 받아둔 명함을 모은 명함철이다. 추억이 밴 각별한 명함 서너 개를 빼곤 모두 처분할 생각으로 명함철을 빼뒀다. 그런데 선별할 명함을 고르려고 명함철을 넘기다가 예상 못한 재미를 발견했다.


1.  내가 당시 집중했던 일의 윤곽이 상대가 건넨 명함을 통해 환기되는 재미. 
=> 생계 때문에 2000년대 초반 외국인 민박을 운영한 적이 있는데, 외국인 손님에서받은 명함이나 민박 관계자의 명함이 빼곡했다 
=> 2000년대 중반 영화에 관심을 둘 때 영화계 인사들에게서 받은 명함도 많았다.  

2.  인생의 굴곡과 변화를 겪은 상대의 인생사가 내게 준 명함으로 재확인되는 재미. 
=> 학위 파동으로 미술계를 떠난 신정아의 성곡미술관 시절 명함 
=> 정치인 입문 직후 공개석상에서 사인을 적어서 건네준 '개혁당' 국회의원 시절의 유시민 명함 
=> 아토마우스 로고와 개인 홈피를 인쇄한 이동기의 명함 
=> 직함을 무수히 바꾸다가 문득 극우파로 변신한 '빅뉴스'의 변씨의 명함'들' 
=> 작년말 해외에서 사망한 한겨레 구본준 기자의 한문으로 이름을 표기한 명함 
=> 그 밖에 지금은 다른 근무처와 직함을 쓰는 무수한 사람들의 전 직장, 전 직함이 적힌 고색창연한 명함....     

그래서 결론. 명함철에서 일부만 버리고 보관하기고. 오늘부터 받는 명함 중 일부는 명함철에 보관하기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