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9월 23일 월요일

양대원 작가론(사비나미술관)

* 양대원 개인전(2013.0925~1030 사비나미술관) 서문으로 쓴 글. 네이버 캐스트 '한국미술 산책' 코너에 이번 개인전이 개최 되기 훨씬 전에 별도로 포스팅 되었다.  



양대원 - 신종 단색조 독백의 회귀


반이정 미술평론가 dogstylist.com



자화상-눈물   Self portrait-tears   148×102cm   2011




위장 무늬처럼
전투복이 취하는 위장 무늬 패턴은 양대원의 작업 전개 양상에 견줄 때 요긴하게 비유될 자격을 갖췄다. <난-벙커315020>(2002)나 <푸른 만찬(의심) 135060>(2006)처럼 그의 작품군 전체를 통틀어서 군복의 위장 무늬가 명시적으로 인용된 횟수는 지극히 적지만, 위장 무늬의 속성은 양대원의 미학과 근친성이 높다. 양대원 작업의 연대기를 추진시킨 일관된 동력으로 나는 크게 셋을 꼽는다. 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은 색을 혼합하지 않고 배색을 통해서 단색(들)의 고유성을 훼손하지 않은 채 제시된다.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에는 작가의 내면과 분노가 직설법으로 노출되지 않은 채 어딘가 숨은 모양새로 제시되곤 한다(커튼이나 벽면 뒤에 숨은 무수한 동글인들을 떠올려보자). 위장 무늬처럼 그의 화면은 고유한 모노톤 채색으로 각인되어 있다. 위장 무늬 전투복을 착용한 군인처럼, 무언가를 향한 분노 어린 공격성을 그의 그림들은 담고 있는 것 같다. 가면 차림으로 단검을 쥔 동글인의 분노는 어디를 지향하고 있을까? 그때그때 다른 것 같다. 부조리한 동시대 정치 사회상을 향한 불평 같기도 하고, 작가가 속한 제도권 미술계의 무사안일에 대한 한탄 같기도 하다. 자객(刺客)을 닮은 동글인은 자연스레 작가가 고안한 자기 분신처럼 보이며, 세상과 작가 사이를 잇는 거의 유일한 대리인처럼 보인다.


2011-2013년 독해
2013년 공개하는 신작은 2011년부터 2012년 프랑스 노르망디 레지던시 체류 기간 그리고 2013년 초까지 햇수로 3년여 준비 기간 동안 완성된 작품으로 구성되었단다. 신작 역시 위장 무늬의 고유한 논리를 유지하고 있지만, 눈에 띠는 변화도 보인다. 대여섯 개의 원색으로 구성된 도안을 닮은 기존의 화면들이 검정 모노톤으로 차분하게 수렴 되었다. 또 분노의 지표였을 동글인의 눈에 고이거나 또는 흘러내리던 표현주의적 눈물 묘사도 완결된 물방울 모양으로 도식화 되어 한 화면에 가득 찼다. 거칠게 요약하면 눈물방울이 신예로 떠올라 전진 배치되면서 종래 작업 연대기에서 가장 활약상이 컸던 가면을 쓴 동글인(들)은 2선으로 물러난 형국이다. 끝으로 양식화된 모노톤 눈물방울 화면은 양대원의 작업 연보에서 시종일관 관찰되었던 자기완결성의 환원주의적 귀결처럼 보인다. 신작이 모노톤 기본 도형들의 변형으로 수렴되었기 때문이다.


양대원 브랜드
양대원의 작품이 손쉽게 각인된 까닭은 그의 브랜드가 이목구비를 갖춘 캐릭터였던 데 있을 것이다. 동글인으로 명명된 캐릭터는 작업 동력의 3요인(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 가운데 분노의 메시지를 위장의 제스처로 전달하는 매개체였다. 그렇지만 이 분노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가면의 사내는 자기 완결성을 지향하는 양대원의 기질과 더러 충돌하는 것 같았다. 동글인 캐릭터의 강인한 인상 탓인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오히려 교란하는 역효과도 있는 것 같다. 이런 저런 여건을 따져보면 3가지 창작 동력 가운데 자기 완결성에 대한 작가의 강박은 다른 무엇보다 선행적이고 압도적이다. 자기완결성을 향한 결벽증을 살피기 위해 그림의 기초인 화면부터 보자. 한지와 천을 배접해서 만든 캔버스는 양대원의 자체 제작 시스템의 산물이다. 작업 연대기마다 황토색 질감이 살아있는 배접한 캔버스가 등장하는데, 캔버스를 흙물로 씻어내면서 요철이 있는 표면의 재질감이 생겨난다. 두께나 부피보다 표면의 질감에 강조점이 놓인 캔버스 위로, 불투명한 단색 안료가 그래픽 도안처럼 올라가는데, 은은한 황토색 재질감 때문에 그래픽 디자인과는 다른 변별력이 유지된다. 원형(circle)같은 도형들을 변형시킨 기본 단위들로 구성된 양대원의 화면은 기본 단위인 그리드(grid)를 무한히 변형시켜서 화면을 채워나간 몬드리안의 자기 완결적 화술을 연상하게 한다. 작가가 외계에서 차용하는 아이디어도 자기완결성에 대한 그의 편집증을 느끼게 한다. 그가 작업의 모티프로 화면 위로 불러오는 것은 성경의 구절, 고전 회화의 도상, 고증적 가치가 높은 한자(漢字) 따위다. 이미 검증받은 대상을 모티프로 불러온 것이다. 그의 그림은 선명한 의중을 담고 있지만, 작품 해설을 접하기 전까지 내용 파악이 더딘 까닭은 자기 완결성을 위해 화면 위로 조형적 긴장감이 내용을 압도하기 때문이기도 하며, 기성 문자의 모양새를 따라서 만든 글자 조합이 판독하기에는 너무 도안에 가깝기 때문이다(작품 해설을 접한 후에조차 <가라사대Ⅰ613040>(2004)에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찾아내긴 간단하지 않으며, <Love>(2013)에서 알파벳 Love를 찾아내기도 매한가지로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자의식이 강한 자체 제작된 화면 위로, 분신에 가까운 인물 캐릭터가 출몰하는데 이들의 존재가 표면 위에 남겨지는 방식은 붓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결벽증적인 마감을 따른다. 가까이서 표면을 확인해도 기계적인 작도의 흔적만 관찰될 뿐이다. 구상 단계부터 제작 과정을 거쳐 완성에 이르기까지 양대원은 미학적 청교도주의에 지배된 듯이 보인다.

 애(愛)   Love   54×44cm   2012



합(合)   Combine   148×110cm   2013



삼위일체(분노, 위장, 자기완결성)
작업 연대기에 일관되게 관찰되는 세 가지 단서(분노, 위장, 자기 완결성)의 시원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외부 세계를 향한 작가의 분노나 그것을 표출하는 과정에 위장을 개입시킨 건 자기 완결성의 파생적 결과로 보인다. 자기 완결성을 향한 강박은 이미 5회 공산미술제 공모에 당선되었던 1996년경 작업(당선작 발표는 1996년에, 수상작가의 개인전 개최는 1998년에 성사된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수상작가 양대원의 작업 과정을 ‘농사’에 비유한 김학량(당시 동아갤러리 큐레이터)은 “그(양대원)가 세상과 자기 작업에 임하는 태도는 거의 종교적...(중략)...조형적으로는 장인적 수공성이라는 전통적 미덕”이 그림 속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고 분석한 바 있다. 집요한 수공적 가치를 고수하는 작가적 외골수는 자기애의 분신처럼 보이는 가면 캐릭터로 제시된다. 이 가면 캐릭터는 세상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고립된(마치 서울 중심지로부터 대략 40km 가량 떨어진 변방, 덕소에서 20여년을 살고 있는 작가의 거주 환경처럼) 그의 심신을 방어하고 대변하는 분신처럼 보인다. 그 때문일까, 뿌리 깊은 허무주의와 절대적 해법을 향한 무익한 소신이 뒤엉킨 양대원의 세계관은 조형적으로 빈틈없이 꽉 찬 화면과 그 위로 변검(變瞼)을 닮은 가면 캐릭터의 자객(刺客)들이 형성하는 긴장감과 등가를 이룬다. 세속을 향한 그의 불신이 자기 세계관과 자기애를 강화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때문인지 작품 연보를 통틀어 인식 불가한 형상이나 가면을 쓴 캐릭터에 ‘자화상’의 타이틀을 단 작품들은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 중 어떤 것은 숫제 자기애에 빠진 신화, 나르시스를 차용하기도 했다(<의심-자화상(나르시시즘)823090>(2009)).

 의심-나르시시즘, 2009

 의심-노란 계단501090_광목천에 한지, 아교, 아크릴 물감, 토분, 커피, 린시드유_150×149cm_2009

 푸른 운동회Ⅴ(가라사대) 034050_광목천에 한지, 아교, 토분, 커피, 올리브유, 아크릴채색_180×215cm_2005


 검은 눈물   Black tears   77×49cm   2011



신작(2011-2013) 해석
양대원의 오랜 브랜드, 동글인 캐릭터가 그간의 작업 연보에서 보여준 요란한 시위와 선명하고 원색적인 호소가 잠잠히 자제된 채, 검정 모노크롬으로 귀결한 이번 신작은 양대원의 내면을 깊이 지배하는 절대적 관념가치와 자기완결성을 향한 관성을 감안할 때 예상 가능한 결론처럼 보인다. 기본 도형을 무수히 변형시켜서 화면 위로 확장해온 그의 오랜 미학적 반복은, 그리드(grid)의 반복으로 회화 언어를 재구성한 몬드리안을 연상할 만하다. 결국 그의 신작은 검정 모노톤으로 마감된 절대주의(Suprematism)의 조형 문법과 근접거리에 놓였다. 원형(circle)의 변형으로 해석될 눈물방울의 전면 배치나, 화면의 전체 프레임을 정사각형(square)에 귀결시킨 여러 작품의 구성이 그러하다. 물론 그렇다고 지난 작업이 담아온 분노와 메시지가 사라졌을 턱은 없어서, 화면 위로 작은 단서처럼 남아 있다. 비록 순수 조형이라는 궁극 목표를 지향한 서구의 절대주의와 양대원의 출발선은 서로 달랐어도, 가면 캐릭터와 동글인이 화면에서 축소되고 분노가 눈물방울로 양식화된 것은 작가의 미적 비중이 자기완결성과 새로운 회화 존재론에 대한 고민에 놓여있어서 일 것이다.


모노크롬 모놀로그의 의미
새로운 회화론에 대한 고민은 지난 작업부터 일관된 창작의 추진 동력으로 보인다. 초기 작업에서 시도된 문자와 이미지를 통합시킨 작업들은 꾸준히 지속되었고 근작에도 다시 발견되고 있다. <가라사대Ⅰ613040>(2004)에서 "모든 것이 헛되도다"를 구성하는 무수한 동글인의 조합처럼, 무수한 문자 실험을 한 <랭귀지 스터디>(2012) 연작이나 <아모르1 Amour1>(2013) <애(愛) Love>(2012) 등은 기하학적 도형의 조합으로 한자를 표상하지만 단번에 식별하기 어렵다. 의미를 내포하면서 장식적 가치도 병행하는 도안처럼 제시된 탓이다. 이전 작업이 그러했듯 메시지의 전달보다 도안의 자기완결성이 한결 중시된 작업인 것이다. 알파벳 문자의 의미 전달 기능을 조형 단위로 용도 변경한 파울 클레처럼. 첫 개인전을 발표한 1991년부터 2013년 사비나 미술관 개인전까지 양대원의 개인전 발표 주기는 해를 거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꾸준한 독백의 연대기는 금년 단색조 독백으로 한 차례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한국의 지난 화단사에는 서구 모노크롬을 흉내 낸 긴 계보가 있고 오랜 헤게모니를 쥐기도 했다. 그러나 미적 독창성은 줄곧 의심 받아온 권위였다. 반면 지난 시절 국내 모노크롬 화단의 계보와는 무관하게 양대원이 독자적인 회화 시험을 통해 일견 러시아 아방가르드와 비슷한 조형적 귀결에 도달한 건 고유한 성과로 보인다. 그것이 단순한 형식 실험의 결과가 아니라 작가 내면의 분노와 자기완결성에 대한 강박이 착종된 귀결인 만큼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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