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4일(수) 14시. UPI 내부시사실. <그녀 Her>(2013) 시사회.
별점: ★★★★☆
낭만적인 편지를 대필해주는 '아름다운 손편지닷컴'이라는 미래의 서비스 업체에서 근무하는 이가 겪는 미래의 사랑 이야기다. 인공지능의 전지적인 발전으로 인격체와 거의 대등한 수준의 인공지능 컴퓨터 운영체제OS가 개발 되었다는 가설 하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OS는 단순한 맞춤형 대화 상대자가 아니라 진짜 사람처럼 대화를 나눈다. 영화 속 OS자체의 자기 진술에 따르면 '직감'을 갖고 있으며 잦은 대화의 경험이 쌓여 '진화'를 하는 미래형 컴퓨터란다. 요컨대 사용자에게 수신된 이메일의 내용을 미리 검토하고 '해석'해서, "깜짝 놀랄 소식이 왔는데요?"라고 사용자에게 알려주는 식이다.
우리가 오늘날 실제로 직면하고 있는 IT기술의 압도적인 발전을 영화적 상상력으로 풀이한 작품은 그동안 줄곧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쏟아질 예정이리라. 하지만 <그녀>는 IT주제를 다루되 기존에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진일보 시켜서 내놓는데 과장되다고 느껴지질 않는다. 미래의 OS와 사용자가 맺는 관계는 실제 인간관계와 거의 대등해서 다른 점이 있다면, 운영체제를 사람처럼 만지고 볼 수 없다는 점. 물론 이게 가장 중요하지만, 그 점 하나 빼곤 사실상 거의 유능한 인간과 대화를 하고 해법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OS의 기능에 대해 영화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어선지, 미래형 OS를 탑재한 영화 속 컴퓨터의 존재감에 놀랍긴해도 말도 안되는 상상력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실제 오늘날 인류의 삶이 IT기술의 결과물로 섬세하게 직조되고 있어서 일 거다.
OS와 사용자 사이의 마지막 공백인 '접촉 면적의 부재'는 영화에서도 결국 사이버섹스의 형태로 발전하는데, 인간이 보여주는 성적인 반응을 OS가 성적으로 자각하고 감정 표현하게 되는 수준으로 진행된다. 즉 컴퓨터OS가 사용자로 인해 성적으로 고양되는 단계의 피드백을 보인다는 것. 영화 속 OS는 보통 진화한 OS가 아니어서, OS와 그걸 사용하는 인간 사이의 결별도 사용자인 인간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OS가 인간과의 결별을 선택할 만큼 우월한 감정과 이성을 지닌 OS로 묘사된다. 그런데 그런 묘사가 하나도 어색하게 느껴지질 않는다. 우리의 현실적 삶이 OS에 얼마나 의존하면서 그런 묘사가 자연스럽게 느껴질까.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가장 자주 내뱉는 대사는 'I don't know'였던 걸로 기억된다. 이별로 상처받는 흔한 사람들의 에피소드가 소개 되는데, 인간 관계가 만들어내는 애증과 변덕 앞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지 못할 때 사람들은 '나도 이유를 잘 모르겠어'라고 답을 한다. 인간관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려고 진일보한 IT기술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인데(영화 속에서는), 인격체에 가까운 최첨단 인공지능 OS조차 결국 인간에게 상처와 허망함을 남긴다. 이런 영화적 결말은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라는 메시지 일 것이다. 없는 감정을 지어내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온 '대필 편지 작가'라는 주인공의 직업도, 영화에서 '그녀'로 설정된 직감과 감정을 지닌 인격적 OS의 본질을 통찰하게 할 목적이었을 것이다.
진일보한 OS(혹은 그것에 비유된 대필 편지)의 한계를 '접촉의 숙명적 부재'에서 찾는 것 같진 않다. 비록 단순한 결론이어도, 미래의 OS를 매개로 해서 현실에서 유지되기 힘든 인간관계의 어려움과 인간관계의 진정성에 대해 성찰하려 한 것 같다.
* 크레딧이 전부 올라올때까지 지켜봤는데 크레딧 속에 '상하이 유닛'이라는 팀이 뜨더라. 촬영장 중 일부 공간은 중국에서 했단 얘기인가 본데, 영화에 나오는 거대한 현대적 마천루가 혹시 중국 상하이였을까?
** 주인공이 거대한 여객기가 땅으로 곤두박질 치는 모양의 공공미술을 지켜보는 장면이 있다. 이게 진짜 존재하는 공공 조형물인가 싶어서 검색을 했지만 찾지 못했다.
** UPI 시사실에 어제 처음 가봤다. 작은 스크린과 아담한 극장 내부 그리고 편한 의자. 원래 <그녀>의 시사회장은 롯데시네마 에비뉴엘이었으나, 참석 인원이 넘쳐서 임시 방편으로 UPI 시사실에서 추가 관객을 받은 거다. 규모는 작지만 화질은 물론이고 사운드도 받쳐준다. 여기까지는 다 좋은데 늦게 입장한 시사참관 기자(?) 하나가 관람 내내 스마트폰을 켜고서 그걸 보고 있는 통에 짜증이 나서 혼났다. 내가 결국 핸폰 좀 닫으라고 얘길 했는데 첨엔 말길을 못알아 듣더라. 나의 지적에 무안했던지 혹은 자기 취향의 영화가 아니었던지, 영화 종료 직전에 슬쩍 자리에서 뜨더라. 언론/배급 시사회장에는 진지하게 영화를 보질 않고 단지 무료니까 객석에 앉아 시간 보내다가 가는 이런 저질 관객이 항상 있다. 어젠 좀 화가 나더라. 그런 작자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영화가 니 취향이 아니거든, 더 남아서 민폐 끼치지 말고 속히 자리에서 떠라."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