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수진 개인전 '다차원존재의 출현'(2014.0408~0518 갤러리 스케이프)리뷰. <월간미술>(5월)에 실렸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입체·나선형 변증법>이란 제목을 세운 3년 전 개인전에도 허공에 둥둥 떠 있거나 가지런히 나열된 두상의 모습이 자주 보였지만, 정수진의 올해 개인전은 유독 기호로 처리된 얼굴 형상에 대한 각인이 크다. 유사성을 빌미로 도형들이 유기적으로 반복되고 나열된 화면들의 총합. 두뇌를 닮은 호두의 나열(일부는 진짜 두뇌처럼 보인다), 게임 캐릭터 팩맨Pac Man처럼 생긴 도형, 팩맨과 유사한 토끼 두상의 출현, 토끼 두상은 다시금 오리처럼 보인다. ‘보는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는 현실’을 설명하려고 비트겐슈타인이 인용한 오리와 토끼를 나란히 닮은 ‘오리-토끼 환영’ 도상 말이다. 뿐만 아니라 줄넘기 소녀의 줄은 우연히 얼굴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마주한 거석 두 개 사이로 얼굴 윤곽이 보이는 듯도 하다.
이런 얼굴 형상은 ‘오리-토끼 환영’ 공식처럼, 필연적인 결실이기 보다는 보는 사람에 따른 임의적인 발명품에 가깝다. 그래서 화면을 둥둥 떠다니는 두상은 어느 때보다 화면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처럼 느껴졌고, 균질한 화면으로 기억되는 <뇌해>이후 정수진 스타일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최소 단위들로 구현된 화면’이라는 제작 공식에 훨씬 역점을 둔 전시회라고나 할까. 때문에 <뇌해>처럼 화면 속으로 나른한 유영을 시도하게 되기보다는, 작가의 이론 앞에 얼어붙게 될 수도 있겠더라. 경직된 불투명 채색 모자이크로 구성한 인물상의 출연도 그 이론을 따르는 것일 테다.
정수진의 이번 개인전은 신작과 더불어 <부도(符圖)이론>이라는 단행본을 함께 선보인 자리였다. ‘의식 세계를 가시화하는 시각이론’으로 소개된 이 책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의식을 그림을 통해 해독하려는 작가의 오랜 의지를 반영된 이론서다. 지문을 살펴보면 부도가 부호와 그림을 모두 의미하는 점, 신체 감각과 의식을 나란히 대상화시키는 점 등 시각정보 일반에 관해 답을 내줄 이른바 시각이론의 통합모델을 부도이론에 기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창작의 근간을 이론으로 정립하려한 1세기 전 현대 예술가를 우리는 안다. 칸딘스키. 인간의 정신세계를 피라미드에 빗대어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는 걸 예술가의 고차원적 임무로 믿은 그는 관련 이론을 세웠고, 그 후로도 화면을 구성하는 기하학적 요소를 분석한 이론서까지 집필했다. 그렇지만 칸딘스키의 이론은 객관적인 과학 이론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주관적 사유의 산물’로 평가되기에 칸딘스키의 이론과 그의 작품이 유기적으로 일치한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시각예술을 체계적으로 이론화 하려한 그의 진정성과 학구열이 높게 평가받는 것이다.
연관성 낮은 파편들의 총합처럼 보이는 정수진의 고유한 화면에는 도형과 이와 어울리기 어려운 유기체가 나란히 마주보며 나타난다. 데페이즈망 기법이 자주 동원되는 이유다. 그렇지만 이런 화면이 사물의 우연적 배열이 아닌 부도이론에 입각한 결과라면 감상자의 태도는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라. 부도이론이 전적으로 자의적 발명품은 아니어도 작가가 원하는 주장을 선취해서 구성한 자기이론화의 결실일 공산이 크다. 부도이론이 타당하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커지고, 작품과 이론 사이의 유기성 때문에 감상의 질도 확장될 게다. 이론의 타당성이 낮다면 이론의 확산력은 감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되 작가의 창작 동력으로 한정될 게다. 칸딘스키의 경우도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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