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종문화회관에서 발행하는 <문화공간>(5월호. 통권362호)의 '말말말' 코너에 기고한 글.
지난 4월1일 내가 자초한 만우절 소동(엮인글)에 관해 정리한 글.
만우절 해방구
반이정 미술평론가
“만우절이긴 한데, 혹시 진짜에요?” 알고 지내는 언론사 기자에게 확인 전화가 걸려왔다. 이 전화를 전후로 “장관 되신 거 정말 축하합니다.^^:”처럼 진지한 인사를 담은 문자나 메일을 수두룩 받았다. 사실 관계의 나열과 냉정한 분석으로 구성된 비평문을 쓰는 직종 탓도 있고 평소 농담 섞인 유희를 즐기는 성품도 아닌 탓에, 전에 없는 나의 거짓말에 많은 사람들이 속았다. 만우절로 넘어가는 4월1일 자정을 기해, 중앙일간지의 로고와 뉴스의 포맷을 고스란히 흉내 낸 “[속보] 박근혜 정부, 후임 문화부장관에 40대 미술평론가 반이정 파격 인선”이라는 가짜 기사를 작성해서 개인 블로그에 올렸다. 블로그 방문자들을 순수하게 웃길 목적으로 제작된 이 가짜 기사는 SNS로 삽시간에 일파만파 퍼지더니 만우절 당일 방문자의 수가 평소 블로그 방문수의 20배를 넘겨버렸고 내 이름의 연관검색어로 ‘문화부장관’이 나란히 잡힐 정도까지 됐다.
놀라운 사실은 이 거짓말 기사를 읽은 적지 않은 이들이 진짜 보도로 오해했다고 털어놨다는 거다. 기사가 엉터리임을 암시하는 여러 장치를 나름 마련했지만 무용했다. 내가 문화부 장관에 인선되었다는 오해가 일파만파 퍼져갔다. 평소 일 관계나 대인 관계 모두 ‘용건만 간단히’ 원칙에 안주하며 농담과는 거리를 두며 살던 내게, 스스로 자초한 만우절 장난은 해방구 같은 체험이 되었다. 만우절 장난의 흥분은 최소 5일은 가더라. 나의 악의 없는 거짓말 소동 때문에 이번 만우절이 재밌었다는 인사말도 주변에서 여러 차례 들었다.
만우절의 단발성 소동은 내 삶의 고정된 패턴을 돌아보는 시간도 되었다. 내 일과는 거의 예외 없이 대상을 골라 구상하고 집필하는 패턴을 반복한다. 이 같은 생활 패턴은 후에 강연장이나 지면에서 생계 수단으로 발현된다. 현대 미술을 주로 다루는 글과 강연은 오직 한정된 수의 독자와 청중을 나와 연결시킨다. 비평과 우스개 농담을 동일선상에서 대등하게 비교할 순 없는 일이나, 평소 나의 원고나 강연이 이번 만우절 소동처럼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은 아마 없었을 게다. 그 지당한 사실을 환기하자 허구적 이야기의 자기 만족도와 중독이 새삼 살갑게 느껴졌고, 반면 비평의 지평 위에 놓인 내 활동영역은 초라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필두로 대중문화가 대중을 상대하는 원리도 아마 만우절 농담과 비슷할 거다. 일상의 나른한 생리에 균열을 내고 주목을 끄는 건 항상 경천동지할 사고 소식이거나, 비일상적인 판타지인 경우가 그래서 많지 않겠나. 허구적 이야기에 군중이 집단 중독되는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리라.
현대미술이 불편하고 불친절하다는 투정은 긴 세월 이어져서 더는 새로운 불평 축에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미술을 향한 천편일률적인 불평을 늘어놓는 대중 가운데 현대미술을 대면하려고 노력한 이는 거의 없으리라고 본다. 한편 현대미술에 친숙한 전공자들이 유독 좋아하는 작품 중 대중들이 불친절하다고 여기는 작품이 퍽 많다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런 대조는 왜 생길까? 전공자들의 환심을 사로잡는 고도의 자기 풍자와 썰렁한 농담 같은 미술작품이 완전무결한 미적 감성으로 서열화 된 예술의 경직성을 전복시키기 때문이다. 즉 일견 불편하고 불친절한 미술품이 오히려 해방구의 체험을 안긴다는 얘기이다.
내 만우절 거짓말로 큰 재미를 봤다는 주변 지인들의 맞은편에, 그 소동으로 불편함을 느낀 사람이 있다는 걸 안다. 확인된 건 극히 소수였지만 더 있을 수도 있다. ‘책임감 없는 유모’라거나, ‘개병맛’이라거나 ‘기분 엿 같다’는 게 그들의 투정이었다. 대부분 대놓고 얘길 꺼내지 못하고 이름을 숨긴 채 글을 남겼더라. 고작해야 하루살이 농담마저 화를 씩씩 내는 이들의 투철한 소신을 내가 말릴 의사는 없다. 이제껏 살아온 가치관대로 계속 살면 된다. 악의 없는 상상력에 한계치를 높게 허용하는 사회일수록 건강하고 유연하다. 상대적으로 관대함이 낮은 한국 사회 공동체는 정서적 해방구를 체험할 기회마저 매우 적다. 한시적인 일탈의 해방구로 만우절이 꽤 쓸모 있다는 걸 알았다. 매년 만우절을 시큰둥하게 지나쳐온 내가 올해 거짓말 소동으로 깨달은 바는 그렇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