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55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97회분. 아래가 보낸 제목(아래)이 딱딱했던지 책에는 '가발,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라는 제목으로 인쇄되었더라. 그런데 내 글은 가발이 아니라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다룬 거라 원제를 단다.
헤어스타일과 예술의 관람 가치
좌. 앤디워홀 미술관의 워홀 가발 기념촬영 행사 2013년
중. 더글라스 고든 <커트 코페인, 앤디 워홀, 미라 핸들리, 마릴린 먼로로 분한 나의 자화상> 1996년
우. 록밴드의 보컬이 된 여배우 줄리엣 루이스
건널목을 교차하는 순간 아델과 엠마가 나눈 시선은 촌각에 불과했으나, 두발 전체를 파랗게 물들인 엠마의 헤어스타일은 아델에게 깊이 각인된다. 두 여성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라는 제목을 쓴 데에는 둘의 사랑에 엠마의 파란 머리털을 도화선으로 상정해 볼 법해서 일거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여배우 줄리엣 루이스의 난데없는 돌변은 파랗게 물들인 머리 염색으로 확인되는 것 같다. 파란 빛은 어지간해서는 엄두조차 내기 힘든 머리 염색이라 파란 머리의 개인은 남다른 아이덴티티를 얻는다.
피츠버그의 앤디워홀 미술관은 관객 참여 행사를 마련했다. 앤디 워홀이란 고유명사로부터 삐죽삐죽한 튀어나온 헤어스타일이 쉽게 연상되는 점에 착안한 행사다. 앤디 워홀의 헤어스타일을 크게 부풀린 가발을 허공에 매달고 관객이 그 밑에서 기념 촬영을 하도록 유도한 게 이 행사의 골자다. 찍힌 사진 속으로 흡사 앤디워홀 헤어스타일의 관객들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담긴다. 스타 예술가 앤디워홀과 관객이 과장스런 가발 밑에서 잠시 동기화되는 해프닝을 노린 거다. 앤디 워홀의 괴이한 헤어스타일은 실제 두발이 아닌 가발이었지만 그의 아이덴티티로 부족함 없는 분신이었다.
<커트 코베인, 앤디 워홀, 미라 핸들리, 마릴린 먼로로 분한 나의 자화상>이라는 긴 제목을 한 사진 속에서 영국 아티스트 더글라스 고든은 금발 가발을 뒤집어쓴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관객은 그의 얼굴로부터 금발 머리 아이콘으로 후대에 기억되는 4명의 명사를 손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금발 머리를 한 단 한명의 남성을 통해, 얼터너티브 록 밴드 너바나의 자살한 보컬, 팝아트의 간판스타, 아동 연쇄 살인범, 50년대 섹스 심벌을 모조리 소환할 수 있단 말이다. 이 단순한 사진(혹은 작품 제목)은 한 개인의 정체성을 좌우하는데 헤어스타일이 기여하는 비중을 방증한다.
머리색은 유전된 멜라닌 색소에 지배받는 만큼, 두발의 변색은 정상적 삶에서 벗어나는 인위적인 변신술이다. 과격한 헤어스타일이 하위문화의 아이콘처럼 계승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멜라닌 색소가 안배하는 두발 색의 천편일률, 정상 사회의 두발 문화가 남긴 헤어스타일의 통일된 무개성.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전혀 상이한 삶을 대변할 만하다. 보통 사람이 그런 헤어스타일에 대해 거리를 두고 구경만 할 뿐, 그 세계에 투신하는 건 애써 주저하는 이유이다. 앤디 워홀 가발 기념 촬영 행사가 보여주듯, 예술은 천편일률적인 일상에 변화를 꾀하기 위해 등장할 때가 많지만, 정작 대중에게 그 변화를 수용하게 만들기보단, 일시적인 동참과 관람에 머물 때 쉽게 수용된다. 이런 현상은 사회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적인 예술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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