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45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92회분.
국기에 대한 맹세
좌. 록그룹 U2의 라이브 공연 때 무대 LED 커튼 에 떠오른 뉴질랜드 국기
중.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2번째 취임식날, ‘미국 기업 국기’를 펼쳐들고 항의하는 운동가 2005년
우. 광복 60주기를 기념해 건물 전체를 태극기로 도배한 시청사 2005년
3D영화 <U2 3D>로도 제작된 U2의 세계 순회공연 ‘Vertigo Tour’는 영상 시대의 록 콘서트답게 무대 후면에 LED커튼을 설치해서 공연 내내 무수한 영상이 출몰하도록 연출했다. LED커튼 위로 만국기가 순차적으로 떠오르자 청중은 열광했다. 만국기 속에서 용케 찾아낸 자기 나라의 국기에 대한 반가움과 친숙한 애국심 때문일 수도 있고, 만국기들의 찬란한 혼융이 세계 화합과 평화의 메시지인양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국기는 군중의 정서를 쉽게 동요시키고 응집시키는 기호다.
‘국기=국가=국민’ 이라는 낡은 등식을 신봉하는 투철한 애국자가 아니어도 극적인 상황과 국기가 나란히 엮이면 군중의 시선은 쉽게 낚인다. 어느 나라의 국기이건 항상 간명한 조형원리를 따른다. 대략 기하학적 도형과 3원색에 기초하기 마련이랄까. 국기는 지위고하를 막론한 전 국민에게 인지도와 호소력을 갖춰야하니 당연한 귀결이다. 국기의 미학이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국기 디자인은 손쉬운 의사전달의 도구를 지향한다. 그런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반역적 메시지를 싣기 위해 쉽게 변형할 수 있는 게 국기의 디자인이라는 얘기이다.
문화훼방단체 애드버스터가 반-시장 메시지를 위해 미국 성조기를 변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애드버스터가 고안한 ‘미국 기업 국기(American Corporate Flag)’는 반세계화 저항운동의 상징물이 되었다. 성조기에 새겨진 별의 개수는 미합중국을 구성하는 주(州)의 수와 일치하는데, 성조기를 전유(detournement)한 애드버스터의 ‘미국 기업 국기’는 성조기의 별들의 자리에 코카콜라 MS윈도우즈 애플 나이키 워너브라더스 맥도날드 등 다국적 사기업의 로고들로 대체했다. 미국과 전 세계를 주무르는 시장경제의 주역들을 부각시키려고 세계 최강국 깃발의 권위를 잠시 빌린 거다. 애드버스터는 비판적 메시지를 부풀리는 증폭기로 미국 성조기를 차용한 셈이다.
한편 단순한 조형과 애국심이라는 국기의 본령에만 충실한 순정파도 있다. 순정파는 응용을 모른다. 국기의 본령을 향한 원 포인트 충성은 국기의 단순 조형원리나 애국심만큼 단조롭고 융통성이 낮다. 서울 시청사 건물을 태극기로 도배하는 ‘시청사 모뉴먼트’는 이명박 서울시장 재직 당시인 2005년부터 매해 진행된 광복절 설치 이벤트이다. 태극기 3천6백장을 시청사 전면에 도배한 첫해 이벤트가 개중에 가장 조악했다. 건물이 흡사 거대한 영구차를 연상시켰으니까. 그러나 이 태극기 도배 이벤트는 시민 다수의 지지로 계속 지속되었다. 저술가 헤르만 브로흐의 말대로 “키치는 키치인간들의 후원으로 존속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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