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과 몸의 관계'를 특집으로 다룬 <월간사진>(3월 vol.774)에 기고한 글. 잡지를 받아보니 내가 보낸 원고의 제목이며 본문의 지문 따위가 마구 편집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황당할 때가. 아래는 내가 보낸 원문이다.
몸을 보는 관점의 변화. 여성의 위상 변화
반이정 미술평론가
래리 클락으로부터
2013년 북유럽에서 열린 두명의 거물 사진가의 회고전으로부터 이 글의 단서를 찾을까 한다. 두 회고전은 관능적 육체를 사진에 담는 태도에 어떤 변화가 초래되었는지 보여주는 것 같아서다. 스웨덴 스톡홀름 사진 박물관 포토그라피스카Fotografiska에서는 일본 작가 모토히코 오다니의 사진 작품과 헬무트 뉴튼의 회고전이 열렸다. 현존 작가인 모토히코 오다니가 십자가 책형도라는 오랜 도상을 어린 소녀의 인체와 결합시킨 구성은 소아성애증(小兒性愛症, pedophilia)의 매혹이 포함된 것이리라. 헬무트 뉴튼의 연출 사진은 남성 사진가와 여성 모델 사이의 종속관계에 관한 모범적 공식을 보여주는 것일 게다. 헬무트 뉴튼이 사진의 방점을 육감적 여성 나체의 대상화와 그걸 촬영하고 관람하는 남성의 응시라는 고정된 구도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알몸을 사진에 담는 교과서적 태도는 노르웨이 베르겐의 KODE미술관에서 열린 래리 클락의 회고전에서 도전을 받는다. 래리 클락이 육체를 응시하는 1970년대식 접근법은 우연히 오늘날 정서에 훨씬 근접해 있는 것 같다.
래리 클락은 ‘내부자 시선’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촬영에 도입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1971년 사진집 <툴사 Tulsa>는 마약 총 섹스에 빠져사는 친구와 자신의 모습을 서슴없이 담아 주변인을 피사체로 간주하던 태도와 모델과 촬영자 사이의 공식을 파괴했다. 사진가 듀안 마이클이 “래리 클락의 사진은 전에 없이 품위 없는 장르를 개척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평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래리 클락의 사진은 아마추어가 일상에서 재미삼아 찍은 사진으로에서 발견된 고유한 미학이라는 점에서, 버내큘러 장르 사진(vernacular photograpy)의 한 지류일 것이다. 버내큘러 장르 사진 고유의 비문법적이고 정제되지 않은 화면은 작위적인 회화주의 사진과 변별되는 매력 포인트였다. 사진가의 자질보다 사진기 자체의 가능성을 조명해준 버내큘러 장르 사진처럼, 래리 클락이 주목받는 이유도 촬영자의 예술적 소질과 무관하게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멋대로 피사체를 촬영하는 사진기의 돌발성에서 온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마틴 파가 래리 클락을 두고 “그에게 사진기는 그냥 갖고 노는 장난감이었을 겁니다.”라고 추측한 것도 버내큘러 장르 사진의 돌발성을 염두에 둔 발언일 것이리라. 누드 사진의 전통이 남성 사진가라는 외부자가 여성 모델을 일방적으로 대상화 시킨 것인 반면, 버내큘러 장르 사진이나 마약중독에 빠져 사는 자신의 공동체를 내부자 시선으로 응시한 래리 클락은 몸을 응시하는 사진가의 태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자발적으로 자신의 벗은 육체를 제3자의 카메라 앞에 드러내는 내부자들과, 더 나아가 작가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나르시스처럼 담는 사진의 전통이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분명히 밝혀둘 점은 버내큘러 장르가 그러했듯 이런 내부자 시선으로 인체를 담거나 자발적인 자신의 인체 노출을 감행한 사진은, 촬영자의 독보적인 의지의 산물이기 보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초래한 독창적인 결과에 가깝다는 점이다. 회화 조각 공예 퍼포먼스 같은 다른 장르에선 당도하기 어려운 결과이다.
래리 클락의 전시, 노르웨이 베르겐 KODE미술관
내부자 시선의 극단, 자기 인체를 대상화하는 여성 사진가
낸 골딘은 그녀의 연작들이 내부자 시선으로 비주류 공동체의 사생활을 담은 래리 클락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자신이 속한 사회를 기록한 <성적 종속에 관한 발라드 The Ballad of Sexual Dependency>에서 마약과 폭력으로 물든 자신과 동료의 삶을 조명했다. 내부자 시선으로 관음적인 광경을 폭로하는 사진의 전통은 신디 셔먼과도 맥락을 같이 할 거다. 신디 셔먼은 내부자 시선을 살짝 뒤틀어서 내부자 가운데 내부자인 바로 자신을 촬영했다. 정도 차는 있지만 생면부지의 성소수자들의 집을 찾아가서 상의를 벗은 채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질리언 위어링Gillian Wearing의 <윗옷을 벗어 Take Your Top Off>(1993)도 내부자 시선과 자기 인체 노출을 결합한 시도 일 것이다. 래리 클락 이후, 내부자 시선이나 자신의 인체 노출을 자청한 사진은 탄탄한 연대기를 형성하는데, 여기서 특히 유의할 점은 촬영 주체가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점이다. “가족 없이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고백한 여성 사진가 샐리 만Sally Mann이 직계 가족 중에서 미성년 친딸의 농염한 육체를 연달아 공개한 것은 내부자 시선의 극단으로 자리매김한 경우이다.
래리 클락과 낸 골딘이 형성시킨 내부자 시선이 하위문화 공동체의 사생활을 가감 없이 드러내서 충격을 준데 반해, 신디 셔먼은 자신의 육체를 관음적 피사체로 간주한 경우이나 신디 셔먼은 그녀의 인체를 카메라에 포착하되 그녀의 사생활까지 노출하진 않았다는 점에서, 내부자 시선의 사진들과 차이가 있다. 매 사진마다 그녀는 혼자서 다양한 캐릭터로 출연한다. 때문에 사진 속 캐릭터들은 신디 셔먼 자신이기 보다 대중문화가 지배한 세상이 만든 전형적 여성상들이다. 때문에 자화상처럼 신디 셔먼이 ‘연기한’ 다양한 여성 전형들은 유명 여배우를 동경하는 동시대 여성들의 일반 정서를 대변하는 것이리라. 때문에 사진에는 신디 셔먼의 육체가 노출되지만, 정작 사진의 메시지는 동시대 여성의 이상형에 관한 것이다.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데뷔작 제목이 괜히 <무제 영화 스틸 Untitled Film Stills>(1977~1980)이겠는가. 4,50년대 허리우드 영화의 배경 속에서 다양한 페르소나로 자신을 연출한 흑백 독사진 69점이 <무제 영화 스틸>의 기본 구성이다. 그런데 이 화제작에 앞서 대학생 신분이던 1977년 <무제 A~E>를 통해 어릿광대처럼 자기역할극으로 분장한 다양한 얼굴을 촬영하면서, 그녀의 대표작을 예고한다. 특히 대표작 <무제 영화 스틸>은 대중미디어가 반복해서 쏟아내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스스로 연기함으로써, 자기애에 빠진 자아 혹은 대중적 스타를 향한 동시대 여성의 선망을 대변한다.
미술계 남성 전문가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그들 앞에서 여성 작가가 옷을 벗고 그 과정을 초대받은 남성 미술인이 촬영하도록 유도한 여성작가 재미마 스텔리Jemima Stehli의 <스트립 Strip>(1999) 시리즈는, 시각예술에서 여성과 남성이 각각 응시의 주체와 객체라는 고정된 성 역할을 자청해서 환기하는 작업이다. 사회적으로 고정된 성역할의 공식 속에 여성 작가 스스로 가담함으로써 남녀 성역할에 대한 비판적 환기를 일으킨다. 사회가 이상화 시킨 다양한 여성 페르소나에 자신을 투영시킨 신디 셔먼과 남성 미술인 앞에서 옷을 벗어서 남녀 성역할의 고정성을 반어적으로 비판한 재미마 스텔리가 여성주의 견지에서 논평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여성 작가의 알몸 노출이 시각문화 안에 고착화된 남성의 일방적 시선을 비판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Cindy Sherman, Untitled A-E, 1975
Jemima Stehli, 스트립 Strip, 1999
Sally Mann, Venus After School, 1992
장지아, 오메르타, 2007
한국 여성 사진가의 육체
가부장제가 서구보다 견고한 한국사회이니 만큼, 신디 셔먼이나 재미마 스텔리처럼 자기 육체를 대상화시킨 작품이 한국 예술계에서 출현할 때 여성주의적 해석이 따라붙는 건 자연스럽다. 본디 어떤 주장을 관철시킬 때 언어보다 사진이 훨씬 강력한 시각적 주장이 된다. 사진은 분산된 주의를 흡수하는 블랙홀처럼 흡인력이 높은 시각적 주장이다. 2000년. 상의를 탈의한 채 새벽 도심을 걷는 자신을 촬영한 장지아의 <자화상>은 자신의 알몸을 남성의 시각에서 대상화시키되 당찬 기세로 자의식을 지키는 모습을 보여준다.
2007년 장지아는 여성 지원자들이 벌거벗은 채 서서 오줌 누는 장면을 연출한 <오메르타>를 내놓는다. 여성주의 운동에서 양성평등의 메시지를 공격적으로 전달할 때 쓰는, 남성처럼 여성도 서서 오줌을 눈다는 제스처를 그대로 차용한 <오메르타>는 관음적 볼거리와 정치적 메시지를 함께 담고 있다. 내부자 시선으로 여성 문제를 투영한 한국 여성 사진가를 떠올리자면 인효진도 연상된다. <High School Lovers>(2007)는 입시 교육의 울타리에 갇힌 한국 청소년의 불안한 도상을 교복차림의 미성년 커플들로 유형화시켰는데, 정작 사진 속 주연은 남학생이 아닌 여학생이다. 같은 성이기에 여학생에게서 동질감과 연민을 더 느꼈을 것이다. 날렵하게 고쳐 입은 교복으로 몸매를 드러낸 인효진이 찍은 여학생들의 육체는 동시대 여학생/청소년의 억압된 욕구를 대신 증언한다.
자기 육체를 관음의 재물로 삼다
자기애와 자기노출의 최전선에 낸시랭이 있다. 낸시랭의 미학은 물화된 그녀의 작품들이 아닌 그녀의 몸 자체이다. 전략적인 자기 노출은 낸시랭이 대중스타와 대등한 반열에서 활동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학적 완성도 여부를 떠나서 노출된 인체와 매스미디어를 결합했을 때 어떤 효과를 얻을지 가장 영민하게 활용하는 작가가 낸시랭이다. 사진에 담긴 낸시랭의 몸은 연예인을 향한 대중의 선망을 대리만족시키는 매개체이다. 낸시랭의 존재감이 전시장보다 모니터에서 관찰될 때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낸시랭이 대중스타의 정형성에 그녀의 인체를 끼워 맞춘 경우에 가깝다면, 비슷한 선상에 있지만 자기애적 셀프 촬영이라는 시대정서에 집중해서 변별력을 확보한 여성 작가들이 드물게 보인다. 김쎌과 장선아는 미모와 몸매까지 겸비한 보기 드문 여성 작가로, 둘 다 자기 인체의 관능적 면모를 연출 사진으로 내놓는 공통점이 있다. 대중 만화나 예능물이 만든 여성 미모의 허구적 캐릭터를 모범 삼은 점에서 낸시랭과 다르지 않지만, 김쎌의 자기 인체 노출수위는 허용치를 웃돌 만큼 높다. 김쎌의 평균치 이상의 노출 때문에 사진의 표면은 고도의 섹스어필로 번들거린다. 누드에 가까운 김쎌의 자화상 사진들은 증폭된 자기애의 결과 같지만, 세상 도처에 존재하는 무수한 익명들의 자기애를 대변한다.
정신분열적 드로잉들로 가득 찬 방안에 혼자 들어선 나르시스 여성. 자기 관심에 몰두한 히키코모리의 정서를 담고 있는 이 광경은 장선아가 자기 방에서 완성해 나간 작업들의 전말이다. 화면에는 작가 자신과 관계를 맺는 그 어떤 제3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독보적인 자신에 집중된 화면. 색테이프와 색종이로 어지럽게 채운 벽면 패턴이나, 방안 가득 수북이 쌓인 형형색색 풍선들은 장선아가 구사하는 화술(話術)인데, 이 모두는 장선아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과 나눈 대화의 결실이다.
저항과 자기애를 관철시키는 사진
온라인 여론몰이는 자발적으로 자기 인체를 과도하게 노출시킨 사진들의 몫이 되었다. ‘페북여신’이라는 별칭을 얻은 채보미는 SNS라는 플랫폼에 관능적인 자기 인체를 반복적으로 공개하면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기 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다. 얼짱 여성 파이터 송가연도 스마트폰으로 거울에 비친 그녀의 복근과 몸매를 찍어 공개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유명세를 타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적 버내큘러 사진의 화두는 인체를 촬영하는 권한을 전문 예술가의 손에서 여하한 종류의 카메라를 손에 쥔 불특정 다수의 손으로 넘겼다. 사진 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자기애로 충만한 육체를 관음적 시선으로 담아 자발적으로 공개하는 집단 문화가 만들고 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매료된 나르시시즘 신화의 과거사는 거울에 비친 또는 스마트폰으로 촬영된 관능적 자기 인체에 열광하는 동시대 집단 정서가 이어받아 현재가 되었다. 나아가 자기 인체를 촬영해서 네트워크에 노출시키는 ‘공개된 사생활’이 공인된 문화로 자리 잡자, 사진 예술의 주도권은 불특정 다수에게도 열렸다. 버내큘러 장르 사진의 맥락 안에서, 카메라가 대폭 보급된 시대상은 아마추어의 자기 인체 노출 욕구와 만나면서 거스를 수 없는 유행을 낳았다.
지난 사진사에서 여성의 육체를 재현하고 관람하는 주체가 남성인데 반해, 내부자 시선이 도입된 후 그 장벽은 느린 속도로 허물어졌고, 이 흐름은 여성 촬영자가 정치적 목적(페미니즘)이나 순수한 인정 욕구의 충족을 위해 제 육체를 촬영하고 공개하는 새 지형을 만들었다. 사진이 회화나 조각과 달리 네트워크와 접속하기 용이한 매체인 점도 관능적 육체 촬영을 자청하는 시대정서를 낳았다. 이 현상은 촬영자의 독창적인 의지이기 보다 카메라라는 기계의 속성이 초래한 예상치 못한 미적 현상이다.
김쎌, K.Cell Syndrome, 2012
장선아, 사파이어, 어둠의 천국_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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