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1일 금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묻지마 범죄 (씨네21)

* <씨네21>(949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94회분.



묻지마 범죄의 모순된 흡인력


상좌. <다크 나이트 라이즈> 총기 사건 생중계 영상 2012년
상우. 아키하바라 살인범의 체포 당시 영상 2008년
하.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난사를 소재로 만든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 2003년




<다크 나이트 라이즈>를 상영하던 미국 콜로라도의 극장 안에 괴한이 침입하여 관중석을 향해 무차별 총기를 난사했고, 그 결과 12명의 무고한 사망자가 발생했다. 현행범으로 붙잡힌 괴한은 병적인 환상에 빠진 인물로 진단되었고 체포 당시에도 영화 속 악당으로 묘사된 베인과 유사한 복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일본 아키하바라의 차 없는 거리를 향해 질주한 2톤 트럭은 8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체포된 범인은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로, 범행 이전부터 인터넷 게시판에 생활고를 비관하는 글을 꾸준히 남기다가 급기야 살인을 예고하는 구체적인 계획을 게시하기 시작했다. 그가 진술한 범행 동기는 “생활에 지쳤다. 세상이 싫어졌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아키하바라에 왔다. 누구라도 좋았다”였다.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에는 중무장한 고교생 2명이 그들이 재학 중인 학교 안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12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었다. 흔히 무차별 살인, 묻지마 범죄 등으로 불리는 이런 대형 재앙은 희귀한 범죄의 양상이어도 세계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보도된다. 묻지마 범죄의 사회적 파장은 어지간한 흉악범죄를 능가하는 폭발력과 주의력을 지닌다. 원인을 찾을 수 없는 범행 동기는 흔히 가해자의 과대망상이나 개인적 불행이 애먼 화풀이 대상을 물색한 결과로 해석되곤 한다. 사회적 관심에서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대외적으로 환기시키는 반인륜적인 존재감 과시가 묻지마 범죄로 재현된 것이다.

묻지마 범죄자는 자신의 불행이 무형의 사회 구조에서 오는 것으로 직감한 나머지 정확히 지목할 수 없는 분노의 원인에 대한 답답함 때문에, 소외된 자기 자존감을 요란하게 알리는 방법으로 불특정인의 제거라는 강수를 택한 것일 게다. 흉악 범죄보다 묻지마 범죄가 큰 이목을 끄는 이유는, 인명 피해의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부조리를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또 명확한 인과관계가 누락된 묻지마 범죄의 전말은 다른 범죄 사건보다 극적인 효과도 높여준다. 

범죄의 일반 공식은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한다. 즉 어떤 원인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다는 식의 서사를 따른다. 하지만 묻지마 범죄에서 피해자는 범행의 동기와 무관하다. 범행은 서사적 흐름을 역행하면서 전개되기에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가 초래된다. 예술의 감동도 곧게 진행되던 이야기가 무질서-엔트로피-를 만날 때 상승한다. 묻지마 범죄가 지닌 예측불허의 조건은 미스터리를 개입시키며, 엄청난 피해규모 또한 호기심 어린 스펙터클이 되어주고, 가해자도 사회의 희생양이라는 인식은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성찰하게 만든다. 무차별 살인사건을 허구적 드라마로 차용한 작품이 출현하는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작용할 것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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