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미술> 4월호 'artist review' 코너에 기고한 작가론 원고.
한경우의 개인전 I MIND (2014.0228~0412 송은아트스페이스)를 매개 삼아 작가론으로 다룬 글.
정교한 계산, 절제된 귀결
반이정. 미술평론가
개인전 제목과 동명의 작품 <I MIND>(2014)는 얼핏, 의심할 수 없는 명제, ‘생각하는 나의 존재감’에 이른 데카르트의 근대적 사유를 차용한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시의 얼굴 마담 격인 <I MIND>의 면모가 파편화된 시점들의 총합을 확인할 때 가늠할 수 있는 점에서, 확실한 명제에 도달하려던 데카르트의 세계관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이 작품의 정면은 암전된 전시장에서 상영 중인 흑백 비디오 작품을 닮았다. 혹은 점증적인 흑백 채색을 나열한 추상회화의 전형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근접 거리의 측면에서 바라본 작품은 백색 구조물을 비스듬한 각도로 나열한 입체 구조물로 확인된다. 결과적으로 비디오 아트의 모니터나 추상회화의 캔버스 같은 평면 작품을 수공으로 시늉한 입체 작품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시점 이동을 통해 또 다른 위상을 얻는다. 작품이 놓인 전시공간의 위층에서 내려 본 작품은, 영단어 ‘I MIND’의 3D 입체 텍스트로 작품 제목을 자기지시 하는 개념 미술의 모양새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전시장에선 내러티브를 제거한 환원주의적 추상 예술에 충실한 외관이라면, 전시장 위층에서 본 작품은 ‘생각하는 나의 존재감’을 명시하는 내러티브를 품은 작업으로 변신한다. (듣자하니 MIND를 동사형 ‘거절하다’로도 중의적으로 사용했단다. 그러니 데카르트적 사유와는 역시 무관함 셈이다)
복수의 상이한 존재들을 단수의 존재 속에 다시점으로 구현하는 기술은 한경우가 꾸준히 애용하는 시점 계산의 연장선 위에 있다. 이 계산법이 적용된 단순한 원점은 정삼각형 정사각형 원형을 다면체 하나 속에 구현시킨 비디오 설치물 <Triangle, Circle, Square>(2008)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전시의 대표작 혹은 전시의 표제이기도 한 ‘I MIND’는 외관상 추상화, 비디오 아트, 자기 지시적 개념미술 등 상이한 매체의 예술 행위들을 하나의 백색 입체 조형물 안에 합체한 경우다. 이 같은 다층적 착시가 가능한 건 다시점에 대한 정교한 계산에서 오며, 다시점 계산법은 한경우의 거의 전작을 중의적으로 해석하게 만든다.
I MIND, 2014 Site specific installation, Plywood, paint 600x400x380cm
Triangle, Circle, Square_플라스틱_40x40x40cm_2011
A Reclaiming a Hat, 2013_Live video installation, mixed media_Various dimensions
Plastic Rorschach-Mix 1 & 2 2014 Digital C Print, 170x113cm
화단에서 흔히 만나는 미디어 아트의 일반론으로부터 한경우가 빗나가는 지점에는 항상 단순한 전략이 있다. 장황한 러닝타임으로 관람의 피로를 높이는 비디오 아트의 생리에 비추어, 한경우의 작업은 3~6분의 러닝타임에 압축적으로 담기기 일쑤이고 고정된 카메라를 쓰지만 화면에서 진행되는 극적인 반전 때문에 관전의 긴장감을 놓칠 수가 없다. 또 흔히 비디오 아트가 시간예술의 매체성에 집착한 나머지 무거운 스토리텔링으로 치우치는 반면, 한경우의 비디오 아트는 수수께끼를 숨긴 평면 회화의 전통에 오히려 가깝다.
일테면 눈속임회화, 트롱프뢰유trompe-l'œil의 긴 전통을 따르되 뉴미디어로 변환시킨 경우에 해당된 달까. 때문에 동일한 눈속임이지만 트롱프뢰유와 한경우가 걷는 노정은 정반대다. 정통 트롱프뢰유 그림이 캔버스 화면 안에 실물이 있는 것처럼 속이는 민첩한 수공 재현 능력에 의존한다면, 한경우의 눈속임은 모니터 화면 속에 예술이 있는 줄 알았는데, 종국에 가서는 예술을 닮은 실물들의 나열일 뿐이라는 귀결에 이르는 점에서 시점 계산의 능력에 의존한다. 거의 예외 없이 작가는 원근적으로 교란되게 배열된 일상 집기의 조합을 영상 촬영해서 흡사 평면을 보는 것인 양 오인하게 만든다.
응시의 집중력이 곧잘 흐트러지기 쉬운 비디오 아트를 짧은 러닝타임으로 붙든 것만큼이나, 그가 집착하는 전략은 손쉬운 아이콘을 작품의 진입로에 두는 것이다. 이 대표 아이콘들은 미학적 중의법을 관철 시킬 때도 유효하다. 초기작에 해당할 <Red Cabinet>(2005)은 구시대 컬러TV의 화면 조정시간화면을, <Tableau with Objects>(2008)는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화를, <Star Pattern Shirt>(2011)는 성조기를 썼는데 모두 익숙한 도상들이다. <Sky Hill>(2011)의 언덕은 필시 컴퓨터 운영체계 윈도의 철지난 버전 바탕화면을 차용한 것일 테다. TV 화면 조정시간, 윈도 바탕화면은 시각체험이 모니터로 수렴된 동시대에서 피할 수 없는 화면이 되었고, 재스퍼 존스가 회화와 사물 사이의 관계를 평면성으로 일갈할 때 동원한 단골 아이콘이 성조기임을 감안한다면 몬드리안과 성조기는 시각예술 종사자라면 피할 수 없는 화면이다. 또 몬드리안과 재스퍼 존스가 결과적으로 평면성의 도그마에 일정 부분 관여한 선배 미술인이라면, 한경우는 선배의 평면 미학을 교란시키는 작업을 통해 세대 격차를 확인시킨다.
짧은 러닝타임과 미디어 시대의 도상들을 통해 미디어 아트를 전에 없이 친숙하게 만들었다면, 한경우가 가장 자주 애용하는 화면 구도는 좌우대칭 또는 뉴미디어 데칼코마니다. <Merge>(2006)의 4등분된 CCTV화면, 수면 위로 집기들이 반사된 듯 착시를 일으키는 <Green House>(2009)의 상하 대칭, <Ten 46 inch monitor soccer field>(2012) 등은 모두 대칭 구도 속에 착시 기술을 숨긴 작품들이다. 좌우대칭의 범주를 느슨하게 잡는다면 <Black Chair & White Objects>(2007)와 <Construction barrier>(2007)까지 대칭 구도로 착시를 견인한 사례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송은 아트스페이스의 이번 개인전에도 좌우대칭의 불문율은 <Plastic Rorschach>(2014)가 계승하고 있다. 로르샤흐 테스트란 우연적으로 발생한 좌우대칭 화면에서 피험자들이 발견하는 문맥을 분석하여 그들의 심리를 검사하는 심리 테스트이다. 로르샤흐 테스트 검사지가 우연적으로 형성된 좌우대칭 이미지인 반면 <Plastic Rorschach>는 작가가 인위적으로 좌우대칭 형상을 집어넣은 경우랄 수 있다. 해당 분야에서 오랜 권위를 누린 도상을 차용해서 멋대로 문맥을 변형시킨 점에서, 몬드리안과 성조기(혹은 재스퍼 존스의 해석)의 미학을 멋대로 변형했던 선례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셈이다.
로르샤흐 테스트는 심리분석 분야에서 긴 전성기를 누렸다. 그렇지만 검사 결과에 대한 정확성과 신뢰성이 검증 불가능한 것이라 피험자가 조작된 답을 내놓거나 실험자가 주관적 견해를 덧붙일 위험을 견제할 수 없다는 비판을 줄곧 받았다. 경험적으로 입증되지 못한 로르샤흐 테스트를 의사과학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회의주의도 완고하게 남아있다. 그럼에도 심리 분석 영역에서 퇴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게 로르샤흐 테스트다. 검증 불가한 권위의 지속성, 모호한 해석에 대한 공동체의 묵인, 해당 분야에서의 장기집권 등 로르샤흐 테스트의 생리는 화단에서 추상미술이 겪은 전력과 닮은 데가 많다. 로르샤흐 테스트에서 피험자의 진술이나 실험자의 해석의 근거는 오로지 그들의 주관성일 뿐이다. 실제 로르샤흐 검사지에 우연히 찍힌 형상은 추상적이기도 구상적이기도 한 모양새인데, 그 중 상당수는 성기의 모양새를 연상시키는 게 사실이다.
이 검사법을 고안한 헤르만 로르샤흐가 스위스 프로이트 학파 출신인 점과 연관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적 메타포를 연상시키는 로르샤흐 검사지는 왠지 특정한 답변으로 피험자들을 몰아가는 인상마저 준다. 로르샤흐 테스트를 둘러싼 심리학계의 회의야 어떻건, 한경우가 검정 비닐과 색채 비닐들을 인위적으로 구겨서 내놓은 좌우대칭 비닐의 절대 다수는 성기 모양을 띠고 있다. 아마 작정하고 성적 코드를 연상시키는 모양으로 형성한 걸 테다. 심리학계에서 장기 집권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권위를 의심받은 이 검사법의 약한 고리를 시각적 농담으로 고의로 부풀린 것이리라.
사진이건 입체건 비디오건 매체를 가리지 않고 한경우가 당도하는 곳에는 거의 예외 없이 무정부주의적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재현된 예술이 일상으로 극적으로 귀환하는 스토리라인을 따른다. 그런 결말은 더러 화면 속에서 작가의 등장과 퇴장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성조기 화면은 한경우가 착용한 채 퇴장하는 별무늬 재킷으로, 화면조정시간은 집기들의 재배열을 통해 빨간색 캐비닛이라는 일상 사물로 환원되는 식이다. 예술이 사물로 둔갑하는 대반전은 언제나 원근감과 사물의 비율 사이를 정교하게 계산한 결과이다. 한편 현란한 예술이 일상 집기로 환원되는 여러 작품들의 결말을 포함해서, <I MIND>의 원점이 백색 구조물일 뿐인 점, 초기작 <Black Chair & White Objects>(2007)의 마무리가 검정색과 흰색으로 구분된 투 채널로 끝난다는 점 등, 결론과 본질이 언제나 절제된 표현으로 수렴된다. 이는 시감각 자극의 과잉시대에 응하는 작가적 태도의 확인인 것 같다.
ps.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난달 끝난 전시 <사진과 미디어 : 새벽 4시>에서 초대 작가들 가운데 최소한 3명(이문호, 원서용, 한성필) 이상은 착시 효과에서 기민한 안목을 발휘한 경우다. 그 점에서 한경우와 상통하는 부분도 크다. 일군의 주목받는 작가군이 착시의 변주에 집중하는 까닭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환영주의를 날로 강화시키는 뉴미디어 시대에 전업 시각예술가의 농담어린 응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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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우(1979~). 총 4회의 개인전과 삼성미술관 리움의 <아트 스펙트럼 2012> 등 다수의 기획전과 그룹전에 참여. 제11회 송은미술대상 수상자(2011), 서울과학기술대 조형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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