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5일 일요일

후각/미각 상실의 모와 도 (서강대 학보 624호)

* 현재 진행 중인 불완전한 후각/미각 체험에 관해 썼다. 서강대학교 <서강학보>(624호)에 수록 됐다.  
지난 9월26일 종합병원의 비기능 검사 결과 정상 판정을 받아서, 괜한 우려였나보다 하는 글을 남긴 적이 있는데(엮인글) 여태 불완전한 후각/미각이 회복되질 않아서 나날이 근심이 크다. 다시 내원하려고 한다. 



승인 2014.10.01  00:13:16
반이정(미술 평론가)  



성미가 급하다. 예상한 결과가 신속하게 도출되지 않으면 초조와 스트레스를 많이 느낀다. 호오도 분명하여 주어진 상황을 모 아니면 도로 판단하는 때도 많다. 작품 비평에 빗댄다면 어중간한 미적인 승부수를 던지는 예술작품에 평자로서 마음을 뺏긴 적이 적다. 논평 방식마저 우회로가 아닌 직행로를 선호한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의사표현법은 비평에 강인한 색을 입힐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성품에는 맹점도 많다. 순조로운 흐름을 방해하는 예상 밖의 장애물 앞에서 나는 때로 허둥댄다. 장애물에 미숙하게 대처하다가 짜증이 나서 다 된 일을 죄다 뒤집어엎은 예도 많다. 얼핏 진보적인 성향 같지만, 돌발 변수에 유독 적대적인 태도는 내 안에 똬리 튼 보수성향의 증거인 듯하다. 흔히 있을 수 있는 사태의 흥망성쇠에 쉽게 일희일비하고, 급기야 자포자기 상태로까지 나를 몰아세울 때가 있다.

이런 다혈질 성미에 외부의 도전이 가해진 건 4년 전이다. 나는 사고로 뇌를 다쳐 현실을 비현실처럼 느끼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겉으론 멀쩡해도 불편과 불안이 지배하는 내면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막막한 하루하루가 쌓여갔다. 그런 날이 한 달, 두 달, 그러다가 1년, 2년이 지났지만 차도는 답답할 만큼 더뎠다. 나를 가둔 비현실의 감옥에서 탈출할 방도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성미 급한 내가 강제로 입 다물고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회복 속도는 초저속으로 진행 됐으나, 결국 지금의 나는 거의 불편 없이 지내고 있다. 다만 원상복귀가 안 됐을 뿐. 변화된 현실에 익숙해지는 게 치유라는 걸 어렴풋이 알았다. 

경우는 달라도 겉으론 멀쩡한데 표현 못 할 불편을 홀로 느끼는 또 다른 체험을 지금 하고 있다. 후각과 미각이 실종된 지 한 달쯤 돼간다. 감기의 합병증으로 따라온 급성 부비동염 때문에 후각과 미각이 백지에 가깝게 마비됐다. 감각이 마비된 초기 증상은 병원치료를 거치면서 서서히 회복됐지만, 불완전한 후각과 미각 체험은 4년 전 사고를 상기시켰다. 겉으로 표시 나지 않고 당사자만 아는 주관적인 불편 말이다.

그래도 후각과 미각의 실종은 4년 전과는 다른 질감의 패배감을 안겼다. 식욕이라는 본능적 쾌락이 불완전하게 충족되기 때문에 전에 없던 상실감을 맛보고 있다. 미감이 사라진들 주린 배야 채워지지만, 음식의 고유한 맛이 불완전하게 전달되기 때문에 초라하고 무력한 심경에 빠진다. 후각과 미각이 사라진 초반에 나는 언제고 회복되리라는 당연한 전제 하에 무감각의 날을 짜증으로 대했다. 그러나 후각과 미각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주변의 경험담을 더러 전해 듣자 두려워졌다. 내 후각과 미각은 정상으로 회복될까? 알 수 없다.

 미각이라는 원초적 쾌락이 제약되자 사는 게 무의미해졌고 자포자기 심정에까지 이르렀다. 몇 달이 소요돼도 괜찮으니 원래의 미각만 회복되길 바라는 겸허한 단계에 도달했다. 아니 최악의 경우를 더 자주 고려한다. 내 손으로 어찌할 바 없는 신상 변화는 결국에는 적응하게 되더라는 4년 전 경험 때문인가 보다.

이 글을 쓰기 직전 마지막 내원한 병원 진단에 따르면 처방된 약물을 모두 복용한 후에도 유의미한 개선 조짐이 보이지 않으면 그때는 종합병원에 가보란다. 그런데 미각이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이게 유의미한 개선인지 아닌지 당사자인 나도 잘 모르겠다. 종합병원의 내원 결과를 ‘모 아니면 도’ 식으로 예측해봤다. 후각 상실로 진단하는 ‘모’의 경우, 본능을 자발적으로 제한하는 수도사와 승려의 사례를 떠올리며 불완전한 후각과 미각에 익숙해진 자신을 격려할 것이다. 수도사와 승려처럼 다채로운 본능을 포기하는 대가로 그동안 눈 밖에 두었던 대안적 즐거움을 발견하라는 선택압(selective pressure)이 작동할지도 모른다. 

새 삶을 설계하느라 가슴이 벅찰지도 모른다. 약물치료로 회복될 경미한 질병이라 진단하는 ‘도’의 경우에는 팽팽했던 긴장이 풀리고 안도가 찾아올 것이다. 미각의 고마움을 잊은 채 또다시 느슨한 일상이 반복될 것이다.

 여기서 후각 상실까진 아니어도 손상이 커서 꾸준한 관리로 느리게 회복되리라는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닌 진단이 있을 수 있다. 분명히 제한된 선택에 집중하는 ‘모 아니면 도’의 세계관은 포기하기 힘든 매력이 있다. 그렇지만 삶의 위기는 모도 아니고 도도 아닌 상황인 때가 많고, 이를 통한 해법들로 위기에서 헤어날 때도 많다. 나는 유연하고 관대해지고 싶다. 후각과 미각의 상실을 체험하는 지금이 그 기회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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