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세계>(11월) 특집에 기고한 사진 전성기에 관해 다룬 원고.
탈사진 시대의 사진 친화 유전자
반이정 미술평론가
노순택, 빨간 종이 #01, 종이 위에 글씨, 28x20cm, 2014년
“지금, 사진이 갑이에요.”
이같이 단도직입적인 평가를 미술 강연 때 나는 주저 없이 쓰곤 한다.
2000년 개막한 제3회 광주비엔날레가 그전에 열린 1, 2회 광주비엔날레 때에 비해 사진 작품의 비중을 30% 늘렸다는 감격에 찬 소감이나, "사진예술이 미술의 한 영역으로 확고히 자리를 굳혔다."는 등의 표현을 2000년 전후 사진 비평의 지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사진이 그동안 얼마나 열세였으면 이런 저자세의 문구를 썼을까 싶기도 하다.
미술과 사진을 구분 짓는 공동체의 합의 때문에 저런 감탄들이 나온 셈인데, 동시대 시각예술이 다매체로 재현되는 점을 고려한다면, 미술과 사진을 분리하는 발상은 동시대성에 걸맞지 않는다. 그렇지만 미술계와 사진계가 분리되어 있는 건 한국에선 엄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구분의 기준이 출신학과에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한국의 시각예술 생태계는 출신학과에 따라 미술과 사진으로 구획되어 따로 성장했다.
동시대 미술 최전선에서 사진 매체가 맹활약하는 현실은, 미술계 행사에서 오래도록 소외되었던 사진계의 처지나, 사진의 급성장에 고무된 10년 전 사진 비평의 저자세를 비교해서 보면 격세지감이 느껴질 정도다. 그렇지만 오늘날 미술계 전체에서 전성기를 누리는 사진이, 과연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 같은 사진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잘라 말하면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는 다른 사진이 지금 사진 전성시대의 주역이라고 나는 본다.
지금 사진 전성기는 사진계의 세대교체나 내부의 성장 동력에서 온 결과 같진 않다. 그보다 당대의 매체 환경과 시대정신이 사진에게 유리하게 변화된 탓이 크다.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사진 작업은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는 다른 사진인 경우가 많다. 또 미술대학을 나온 사진 비전공자 출신들이 미대 졸업 후에 사진으로 전향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올해의 작가상’이 최초로 사진가를 선정했다고 보도한 최근 언론을 보자. 대체로 맞는 평가지만, 전적으로 맞지는 않다. 2007년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정연두는 수상 전시에선 미디어아트를 내놨지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그를 선택한 배경은 수상자로 내정되기 전까지 그가 내놓은 스틸 사진 때문이었다. 정연두의 대표작은 거의 모두 사진 작업이다. 그렇지만 정연두의 사진 작업은 우리에게 친숙한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는 질감이 다른 연출 사진이다. 그 점 때문에 인위적인 연출을 배제한 스트레이트, 다큐멘터리, 거기에 흑백 이미지를 간직하여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에 훨씬 가까운 노순택을 두고 ‘올해의 작가상’ 최초의 사진 수상자로 판단하는 건 무리 없는 평가이리라.
나는 2002년을 미술계의 서자처럼 냉대 받던 사진이 도약대로 올라선 시점으로 본다. 2002년을 사진 전성기로 보는 이유는, 인습적인 사진 미학과는 다른 탈사진((post photography)이라는 새로운 사진미학이 공동체에게 선택압을 가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W.J.T. 미첼이 1992년 저서의 부제로 쓴 '탈사진 시대'(post photographic ear)는 디지털 프로세스에 지배받아서 종래의 인습적인 사진 문법을 벗어난 사진의 시대를 의미한다. 객관적인 이미지를 전달하던 카메라의 고전적인 공식은, 디지털 편집 프로그램으로 손쉽게 부정될 수 있었다.
2002년에 탈사진 시대와 관련된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탈사진 시대는 물리적인 필름이 아니라 비물리적인 디지털 파일을 사진의 단위로 삼는다. 네트워크 친화적인 파일 형태의 사진은 손쉽게 전송되고 공유될 수 있었다. 한국이 탄탄한 네트워크 플랫폼을 구축한 동아시아 국가라는 사실이 2002년 자주 발생했다.
2002년 한국의 16대 대통령 선거를 지켜본 영국 언론 '가디언'은 당선자(노무현)를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라는 제목을 뽑아서 취임 소식을 전할 만큼, 한국은 제도 정치의 관행을 견제할 정도로 견고한 온라인 네트워크 플랫폼을 갖춘 동아시아 국가였다.
탈사진 시대의 외압과 무관하게, 국내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인 한미사진미술관의 전신인 한미사진갤러리가 문을 연 해와 동강국제사진제로 이름으로 바꾼 동강사진축제의 1회 행사, 그리고 한 회에 그쳤지만 하남국제사진제의 1회 행사가 개최된 해가 모두 2002년이다. 또 삼성미술관의 전신인 호암 갤러리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 사진을 소개하는 공동 기획전 <미국 현대사진 1970-2000>을 통해 스트레이트 사진처럼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는 달리 연출된 미장센을 강조한 신디 셔먼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 등의 동시대 사진가의 작품을 소개한 해도 2002년이다.
사진예술의 완성도는 장비의 등급에도 의존한다. 그 점을 감안할 때 탈사진 미학을 떠받치는 고성능 디지털 카메라(DSLR)가 본격적인 품질 경쟁을 펼친 해도 2002년이다. 그 해 개최된 한일 월드컵은 카메라 업계의 라이벌 니콘(D1H)과 캐논(EOS1-D)이 광학기술을 다투는 시험장이 되었다. 국제 스포츠 경기는 광학기술력의 시험대로 쓰이곤 한다. 비록 2002년 니콘과 캐논이 출시한 신제품은 터무니없는 고가에 비하면 품질을 보장 받을 수 없었지만, 탈사진 시대를 여는 신호탄의 의미는 지닐 수 있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선 전통 매체에 의존하는 회화나 조각 같은 시각예술에 비하면, 디지털 사진이 유리한 입지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순 없었다. 탈사진 시대는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의 입지를 훨씬 더 좁혀 버렸다.
전통적인 사진학과가 도제식 교육을 통해 기술을 전수한다면, 탈사진 시대는 다양한 사용기법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공유하는 형편이다. 더욱이 탈사진 시대는 외부 스튜디오에서 사용자가 원하는 최대치의 사이즈를 구현할 수 있었다.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튜디오의 디지털 인화 비용이나 디지털 카메라의 가격은 시간이 조금만 흘러도 단가가 큰 폭으로 하락하는 반면, 기능은 오히려 큰 폭으로 향상되어 비전공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창작 매체가 되었다.
올해의 작가전의 노순택 부스 2014년
윤정미 핑크 프로젝트-서현이와 서현이의 핑크색 물건들, 라이트젯 프린트, 2007
사진 전성기를 내가 2002년으로 잡은 외부 이유도 하나 들까 한다. $4,338,500에 판매된 사진작품 <Rhein II>(1999)로2014년 현재 세계 최고가로 거래된 사진 작품의 주인공 안드레아스 구르스키가 미국, 스페인, 프랑스 일대를 순회하는 2년여의 회고전을 마무리 지은 해가 2002년이다. 구르스키의 사진은 외형만 사진에 가까울 뿐 연출된 상황, 초대형 스펙터클 포맷, 이미지의 후기 수정 등 회화에 훨씬 가까운 사진이다. 이렇듯 탈사진 시대의 사진은 허구적 스토리를 화면 위로 연출하고, 사후 디지털 보정을 통해 고해상도의 초대형 화면을 얻어낸다.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는 다른 탈사진 시대의 작업을 확인해 보자.
권오상의 사진 조각은 탈사진 시대에서 사진의 확장성을 보여준다. 구시대적 장르인 형상 조각의 외관은 고스란히 유지하되, 조각품의 모노톤 표피에 총천연색을 입힌 것이 권오상의 사진 조각이다. 잘게 나뉜 사진 단편들을 촘촘히 이어붙인 모자이크 입체 조각이다. 권오상의 사진 조각은 사진의 확장성을 평면 프레임에 가두지 않고, 가용한 범위까지 밀어붙인 예일 것이다. 흡사 고대 그리스 조각이 조각 표면에 색을 입혔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 오래된 방식을 훨씬 동시대적 미감으로 대체한 격이 된 것이다.
발견된 사물(found object)은 미술의 패러다임에 근대성을 부여한 전환적인 미학 용어다. 사물의 원래 용도를 폐기하고,예술가가 임의의 개념을 사물에 부여해서 사물을 예술로 승격시킨 개념미술의 방법론이다. 발견된 사물의 관건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을 재구성해서 다른 결과물로 제시하는 데에 있다. 남자와 여자가 각기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계열화 되리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건 차라리 통념이자 상식에 가깝다. 이처럼 관습적인 문화 코드를 재구성한 것이 윤정미의 사진 연작<핑크 & 블로 프로젝트>(2005~현재)이다. 윤정미의 <핑크 & 블루 프로젝트>는 파란색과 분홍색으로 유형화된 전 세계 소년 소녀의 색깔론을 압도적인 화면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파란색과 분홍색 소지품을 방안 가득 늘어놓은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초상 사진 연작은 사뭇 생각지도 못한 스펙터클을 경험하게 해준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남녀 성별을 구분 짓는 고정된 색채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만, 두 색채로 양분된 소년과 소녀의 압도적인 소지품 사진은 우리 삶을 지배하는 문화 이데올로기를 섬뜩 느끼게 만든다. 그 점 때문에, <핑크 & 블로 프로젝트>은 발견된 사물의 사진 버전으로 '보여주는 사회학'쯤 될 것 같다.
2014 올해의 작가상에 선정된 노순택은 ‘종래 우리가 알던 그 사진’과 어떻게 다를까.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분류되는 노순택의 작업은 ‘종래 우리가 알던 다큐멘터리 사진’과 같을까? 그의 활약은 2000년대 초반 온라인 게시판에 그가 자발적으로 올린 흑백 사진이 첨부된 시위 소식글로 알음알음 알려졌다. 그만큼 사후 기록으로서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실시간 전달력을 겸비한 다큐멘터리이자 시사 뉴스의 대안적 성격을 지닌 사진 작업이었다. 이후 노순택이 천착한 작업은 죄다 한국 사회에서 현재 벌어지는 시사 문제를 실시간 전달하는 성격에 가까웠다. 전시장에 걸린 노순택의 사진도 한국 사회 갈등을 다룬 점에선 다큐멘터리 사진이지만, 갑과 을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부각시키는 다큐멘터리의 일반론을 따르진 않았다. 분쟁 현장을 다룬 노순택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동적이기보다 예외 없이 정적이다. 노순택의 다큐멘터리 사진은 해당 사건의 이해 당사자나 시각예술종사자에게 특히 편향성을 띤다. 때문에 사회 문제를 다루고는 있으되, 노순택의 다큐멘터리는 언론의 기능보다 예술의 본질에 언제나 가깝게 귀결된다.
탈사진 시대는 예술 창작자에게 사진을 진입하기 쉬운 창작 도구로 다가오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예술 수용자에게도 사진 친화적인 정서를 심어줬다. 사진기의 보급은 다만 취미 사진가 인구의 증가로만 그치는 것 같지 않다. 공동체의 대다수가 고화질 사진기를 탑재한 휴대전화 사용자라는 현실은, 그들을 사진 예술가와 동일한 플랫폼에 있다는 동질감을 심어줬다.때문에 일상에서 벗어난 전시공간에서마저 작가와 비평가와 관객은 사진친화적인 정서를 공유한다. 사진 작업에 훨씬 호의를 품게 되는 이유이다. 그것이 사진이 오늘날 시각예술의 갑으로 부상한 배경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