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씨네21>(979호)의 '반이정의 예술판독기'109회.
글쓰기의 막다른 길에서
의사소통의 비중을 문자 7% 청각 38% 시각 55%로 구분한 머레이비언 법칙을 수면에 잠긴 빙하에 빗댄 그림.
현대미술은 어렵다고 한다. 작품의 표면에 내용이 선명하게 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대미술을 글로 풀어낸 비평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가 되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비평의 태반은 미술 작품을 보다 난해하게 만드는데 가세할 때가 많다.
<침묵의 메시지>(1971)를 출간한 저자의 이름을 딴 ‘머레이비언 법칙’은 의사소통에서 시각 정보가 차지하는 절대 우세를 공식화 했다. 저자 앨버트 머레이비언에 따르면, 문자 메시지가 의사소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7%일 뿐, 38%는 음색과 목소리 같은 청각 정보의 몫이며, 절반이 넘는 55%는 눈빛·표정·몸짓 같은 시각 정보가 차지한단다. ‘머레이비언 법칙’에 관해 이미 알고 있지 않았어도 의사소통에서 시각 정보가 차지하는 영향력에 관한한 실생활에서 쉽게 체감할 수 있다.사정이 이러하니, 난해한 현대미술마저 비평이라는 문자의 도움을 받느니, 미술의 시각정보를 직감으로 파악하는 편이 현명한 감상법일 때마저 많다.
문자의 취약한 의사 전달력에 비하면, 글을 쓰는 과정은 정신적 통증을 동반한 노동의 연속이다. 텅 빈 모니터를 응시하며 글을 구상하는 시간은 길고 쓸쓸하며 무력하다. 모니터의 텅 빈 화면은 문자로 깨알 같이 채워야하는 ‘공백 공포’의 여백이다. 모니터의 여백을 어렵게 문자로 채워간들, 문자보다 시각정보에 좌우되는 의사소통의 현장에서 글쓰기의 무력과 무상은 실로 깊어진다.
글쓰기의 무상함을 일깨우는 외부 요인은 ‘머레이비언 법칙’ 외에도 차츰 늘어나는 추세다. SNS처럼 잠언보다 짧은 글이 의사소통의 새로운 플랫폼으로 각광을 받는 시대상도 그렇고, 글보다 그림 의존적으로 재편되는 인터페이스(GUI)도 그렇다.소통의 국제 언어는 긴 문장에 의존하는 필자를 불리한 환경으로 몰아간다. 전업 필자의 전의를 실추시키는 게 매체 환경의 변화만은 아니다. 여론조사와 임상 실험에 따르면 독자와 청중 나아가 유권자는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으로, 논리적 평결보다 마음을 흔드는 감성적 선동에 마음을 내준단다.
상처받은 자의식에 대처하는 필자의 선택지는 몇 가지를 나뉠 것이다. 의사소통의 막다른 길 앞에서 절필 선언을 하는 것.위축된 출판시장에 아랑곳 않고 독불장군처럼 문자의 진검술을 계속 연마하는 것. 시청각 미디어와 글쓰기 사이의 혼용을 실험하는 것.
글쓰기의 막다른 길에서 전업 필자가 어떤 선택지를 고르건, 모니터 화면과 언어라는 필자의 주 무대는 인생의 지평을 담기에는 너무 비좁은 게 사실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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