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가 변순철 개인전 '전국노래자랑'(2014.1028~2015.0104 북서울미술관- 엮인글)의 서문으로 쓴 글.
지콜론 출판사가 작품집의 형태로 출간했다.
전국 노래자랑.강원도 속초.2013.152X177cm.Digital Pigment Print
전국노래자랑.경북 봉화.2014.102X127cm.Digital Pigment Print
과장된 해방구에서 소외와 역설을 읽는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인물 사진은 고정된 인기를 누린다. 사진기가 고안된 긴 역사와 나란히 할 만큼 인물 사진의 수요도 지속적이었다. 피사체가 유명인사라면 수요는 당연히 급등한다. 근대 이전 나다르가 촬영한 문필가와 예술인 초상이 그 효시 쯤 되리라. 또 2차 대전 후 정재계 거물급 인사를 두루 촬영한 유섭 카쉬의 초상 연작은 인물 사진 인기의 고전으로 기억된다. 필립 할스만은 한발 더 나아가, 점프를 하도록 요청해서 명망가들의 비일상적인 모습까지 연출하면서 독보적인 인물 사진의 경지를 마련했다. 스타의 얼굴값으로 유지되는 대중문화 시대를 오자, 유명 인사의 인물 사진은 견고한 장르가 되었다. 애니 레보비츠와 데이비드 라샤펠이 예능계 셀러브리티를 과대 포장된 스타 이미지로 재현하면서 동시대 관객의 기대감을 충족시켰다. 유명 인사를 촬영한 사진 전시회는 스테디셀러를 보장하는 전형적인 블록버스터로 자리를 굳혔다.
비단 유명 인사의 사진만이 고유한 인물사진 장르를 보유하는 건 아니다. 신디 셔먼을 유명하게 만든 원점은, 다양한 의상과 배역을 떠맡은 무명시절의 자신을 촬영한 <무제 필름 스틸> 시리즈였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계열 영화를 연상시키는 세트 속에서 신디 셔먼이 연기한 여성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고정된 수요를 보장하는 유명인 사진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차용한 신디 셔먼의 연출 사진은 그렇다손 치고, 진부할 만큼 평범한 인물 사진의 계보는 어떻게 봐야할까? 다이안 아버스의 피사체는 평범한 인물이지만, 난장이, 거인, 장애인처럼 주변부를 맴도는 인물에 초점을 맞춰 변별력을 유지했다. 보통 사람의 모습을 통해 시대상을 주목하게 만든 인물 사진들도 있다. 대공황의 경제 불안정을 서민의 표정에서 읽어낸 워커 에반스의 사진이 그렇다. 또 <우리 시대의 초상 Antlitz der Zeit>(1929)에서 직업군을 유형별로 구분시켜 사진의 고증적 가치를 발견한 아우구스트 잔더의 인물 사진도 비슷한 공로가 있다. 그렇지만 당대 보통 사람을 촬영한 이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다큐멘터리 본령에 충실했기보다, 사진가의 연출을 통해 주제를 부각시킨 경우에 가깝다.
무수한 인물의 전신상을 담았으되,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 National Singing Contest>에서 내국인이 남다른 인상을 받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비록 도전자들의 과장된 표정과 몸짓에서 익살맞은 재미를 느낄 진 모르나, 한국에서 34년간 방송된 이 노래경연대회에서 아마추어 도전자들이 구사하는 언어에 내국인들은 충분히 숙달되어 있다. 1980년 첫 방송을 탄 이래 우리나라 방송 역사상 최초로 단일 방송으로 30년 이상의 롱런을 기록했고, 음악 프로그램 전체를 통틀어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스테디셀러가 KBS 1TV의 <전국노래자랑>이다. 때문에 변순철의 사진 프로젝트 <전국노래자랑>가 포착한 도전자들의 익살맞은 포즈는 내국인에게는 낯익은 방송 영상을 스틸 컷으로 옮긴 정도로 수용될 여지가 크다. 공동체의 운명과 긴 세월을 함께 한 나머지, 외부인이 볼 때는 충분히 괴이하고 이국적인 광경조차 내부인(한국인)의 시선에선 정상적으로 수용되는 건 비단 <전국노래자랑> 외에도 더 있다. 서구에선 한철 지난 주거양식인 아파트가 한국에선 중산층 진입의 상징적 건축양식으로 숭앙되는 것도 한 예일 테고, 국적불명의 조악한 디자인을 뒤집어쓴 예식장 외관도 서구인의 시선에선 납득하기 힘든 문화 현상일 게다. 이 저속한 건물 안에서 한국의 커플 상당수가 자신의 혼례를 치른다.
공중파 방송 <전국노래자랑>은 한국인의 보편 취미가 문화현상으로 발현된 경우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정된 시청자의 지지를 받아 무려 34년간 스테디셀러 방송으로 장수를 누리긴 어려울 것 아닌가. 급기야 동명의 극영화까지 제작 개봉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마추어를 대상으로 하는 노래 경연대회가 전 세계에 설마 한국에만 존재할 턱은 만무하다. 그러나 전국 각지를 누비면서 지역 도전자들의 경합, 현지 관객의 열광, 모니터를 바라보는 전국 각지의 지지를 34년간 유지하는 노래 경연대회는 필경 한국이 유일무이하지 싶다. <전국노래자랑>에 도전장을 던진 아마추어들의 과장된 자기 과시는, 역설적으로 그 방송의 언어에 충분히 숙달된 내국인에게는 신비의 요소가 적다. 변순철의 사진 프로젝트 <전국노래자랑>이 내부인에 비해 외부인에게 훨씬 큰 호소력을 발휘하리라 추측 되는 이유다. 외부인에게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은 괴이하고 이국적인 동아시아 어느 나라의 문화 현상에 대한 기록물로 감상될 것 같다.
전국노래자랑.경기도 오산.2014.152X177cm.Digital Pigiment Print
전국노래자랑.인천 연수구.2014.102X127cm.Digital Pigment Print
전국노래자랑.경기도 부천.2013.102X127cm.Digital Pigment Print
2005년 처음 착수된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은 주최방송사 KBS의 협조로 2006년, 2007년 연이어 추진되었고,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의 기록을 담은 이번 개인전까지 중장기 프로젝트로 진행되었다.
사진 프로젝트 <전국노래자랑>은 한국의 아마추어 노래경연대회 도전자들의 무대 밖 모습에 집중한다. 짬을 내서 대기실 밖으로 나온 도전자들은 자기 기량을 과시하기 위해 다듬어지지 않은 감정 과잉의 연기를 선보인다. 아울러 경연대회 주변으로 몰려든 관객을 담은 화면도 있다. 화면에 담긴 도전자들의 수는 많지만, 독보적인 미모나 시선을 사로잡는 포즈를 취한 도전자는 찾기 어렵다. 이들의 포즈는 하나같이 ‘전국노래자랑 도전자 스타일 제스처’로 통일되어 있다. 사진 속에는 유명인사의 모습은 당연히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전국을 순회하는 이 노래경연 방송을 다룬 사진 프로젝트의 관전 포인트는 무얼까?
크게 두 가지인 것 같다.
우리에겐 충분히 친숙한, 아파트라는 주거문화와 예식장이라는 혼례 문화가 외부인의 시선에선 태생과 외관 모두에서 비정상성과 천박성을 띨 수밖에 없음에도, 한국 건축문화의 고유한 현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중파 방송 <전국노래자랑>에 참여하는 아마추어 도전자들의 질박한 코믹 연기와 판에 박힌 연출은, 현지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방송의 롱런 때문에, 막상 현지인은 역설적으로 자각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그 부분이 외부인의 시각에선 괴이하고 이국적인 한국의 문화현상으로 느껴질 것이다. 사진 프로젝트 <전국노래자랑>은 거리두기를 통해 현지 문화를 기록하는 데 있다.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피사체로서 관음 가치를 보장 못하는 경연대회 아마추어 도전자들의 인물 초상을 어떻게 봐야할 것이냐이다. 그들은 정상적인 관객의 관음증을 충족시키는 유명인사도 아니다. 때문에 <전국노래자랑>의 인물 사진은 관객의 관음 욕구 충족이 아니라, 불특정 일반인 도전자들이 평시 숨겨뒀던 과시 욕구를 발현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그들의 미숙련된 과시 욕구는 예외 없이 허황된 표현주의로 발현되고야 만다. 도전자들이 예외 없이 자기 과시를 위해 사용하는 신파조 표정과 몸짓은 필시 대중매체에서 본 프로 연기자들의 모습을 어줍지 않게 흉내 낸 결과일 게다. 때문에 이들의 미숙한 감정 연기는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대중매체의 객체임을 부각하는 꼴이 된다. 또한 도전자들의 신파조 연기는 관객과 시청자의 값싼 웃음을 얻는 요인이라서 방송사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게다.
동일한 아마추어 노래경연대회임에도 서구식 모델인 <아메리칸 아이돌>을 벤치마킹한 <슈퍼스타K>나 <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 같은 대국민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등이, 토종 <전국노래자랑>과 갈라지는 지점도 거기에 있을 게다.
주류 진입을 위한 방송 등용문으로 소개되는 <슈퍼스타K>는 리얼리티 방송을 내세우지만, 정작 촬영 분량 가운데 감각적인 대사와 표정연기에 편향된 편집을 통해, 리얼리티를 충분히 훼손하며, 도전자 스스로도 오버 액션의 자기주문을 거는 것 같다. 반면 <전국노래자랑>의 도전자나 그것을 보는 시청자나 이 방송을 주류 진입을 위해 발판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작위적인 드라마를 방송이 연출할 필요도 없고, 도전자의 남다른 기량을 부각시킬 이유도 없다. 도전자들이 신파조 코미디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게다.
무대에 오르기 전, 도전자들의 자기 존재감을 호소하는 사진들을 묶은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을 보자. 질 낮은 무대의상마저 처음 차려입었을 법한 일반인 도전자들의 전신상에서 의상과 인체 사이의 부조화가 도드라진다. 최소한의 시선을 잡아끌려고 머슴 의상, 슈퍼맨 의상, 구식 교복과 무술 복장 따위를 차려입고 서 있다. 이들의 복장은 한시적인 눈요기가 될 뿐,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쇼맨십의 한계를 역설적으로 부각시키고야 만다.
이처럼 노래경연방송 <전국노래자랑>은 주류 가요계 진입을 위한 치열한 등용문이 아닌, 평범한 생활 리듬에서 일회적으로 탈출하기 위한 일반인의 해방구에 방점을 둔 지역 축제이다. 변순철의 경연대회 도전자 인물상이 관객의 관람보다 도전자 개인의 해방구에 방점을 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미숙한 신파조 쇼맨십이 전국 모든 지역 도전자들에게서 반복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프로 매니저의 숙련된 관리가 닿지 않아서 때 묻지 않은 주변부 문화의 기록, 그것이 한국의 전국 시청자가 34년간 지지한 어느 가요경연대회를 기록한 사진 프로젝트 <전국노래자랑>의 진면모일 게다.
<전국노래자랑>과 적당한 대비를 이룰 변순철의 전작으로 <짝패 Interracial Couple>를 꼽을 수 있다. <전국노래자랑>과 다른 점을 꼽자면 <전국노래자랑>이 아마도 국외 논평자에게 호소력이 클 거라 짐작되는 반면, <짝패>는 국내 논평자에게 훨씬 호소력이 클 것 같다. 선호도 여부를 떠나 두 연작은 부인할 수 없는 접점을 여럿 공유한다. <짝패>에 초대된 커플 가운데 명사는 없다. 더불어 시선을 사로잡을 이목구비의 연인조차 찾기 힘들다. 욕실 안에서 육중한 나체 백인 여성을 번쩍 떠안은 흑인 남성의 사진이나, 깡마른 동아시아 남성과 가슴이 과도하게 발달한 백인 여성이 서로 상의를 탈의하고 선 모습 정도가 그나마 기억에 남는 정도다. <전국노래자랑>의 도전자 초상처럼 관음 가치가 높지 않은 인물 초상 연작이란 얘기이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전국노래자랑>처럼 관람객의 관음 욕구를 배려하기보다, 피사체가 된 무명 커플들의 숨겨진 자기과시의 해방구에 비중을 둔 촬영 프로젝트로 보인다. <짝패>가 인종이 다른 커플들을 모아놓은 모양새이긴 하지만,다인종 커플은 거스를 수 없는 메트로폴리탄적 현상이므로 큰 변별점을 이룰 것 같진 않다. 정리하면 <전국노래자랑>과 <짝패>는 주변부의 무명 인사들에게 드물게 주어지는 자기 현시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다.
관음적 호기심을 기대하기 힘든 평범한 커플들은 촬영자 변순철의 제안에 주저 없이 옷을 벗거나, 작가의 제안과는 무관하게 오히려 자발적으로 상의를 탈의한 채 카메라 앞에 섰다. <전국노래자랑>이 불특정한 일반 시민의 가슴 속에 똬리 튼 과시욕구와 자기 존재감의 확인을 위한 해방구였다면, <짝패>의 관전 포인트 역시 인종이 다른 두 남녀의 결합에만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변순철의 모델 제안은 여러 커플들에게 자신을 주목하게 만드는 매우 희소하고 특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태연한 척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못 극적인 표정과 마음가짐으로 카메라 앞에서 섰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평생 딱 한번 주어지는 특별한 순간을 박제하기 위해 평소보다 자신을 관음적 대상으로 의식한 채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전국노래자랑>과 <짝패>를 묶는 또 다른 교집합은 보통 사람의 초상만큼이나, 단조로운 표제 달기이다. <짝패> 속한 여러 커플들은 그저 <짝패>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분류되고 만다. <전국노래자랑>은 방송사가 방문한 지명과 방문 연도만 기계적인 나열해서 제목으로 쓴다. 과장스런 표정과 표현주의적 제스처로 자기를 알리려는 노래 경연대회 도전자들이나,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한 자기 과시의 기회에 주저 없이 옷을 벗고 카메라 앞에 선 일반인 커플의 비일반적인 포즈들이 모두 단조로운 표제 아래 조용히 분류되고 만다. 사진에 담긴 무수한 무명인들의 과장된 자기 과시를 단순한 표제가 허망하게 삼켜버리면서, 인간 존재의 허장성세와 인생의 소외까지 우연히 환기하게 만든다.
<전국노래자랑>과 <짝패>를 묶는 또 다른 연결점은, 일반인의 특별한 순간을 관찰한 변순철의 사진이 다큐멘터리에 속할 게 분명함에도 다큐멘터리 본령에 충실하기보다, 사진가의 연출에 비중을 둔 리얼리티라는 점일 게다.
<전국노래자랑>과 <짝패>는 인지도가 높은 명망가의 초상사진이나, 당대 직업군을 고증적으로 분류하여 시대상을 통찰한 유형학적 인물 사진과는 상이한 인물 사진의 길을 가는 것 같다. 강한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평범한 인물, 대중문화의 피동적 객체인 익명의 개인들이 보이는 어설픈 자기 과시의 해방구, 단조로운 표제, 사진가의 연출이 관여하는 다큐멘터리.한데 이 4가지 동력의 맹아를 변순철의 90년대 후반 뉴욕 체류 당시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사진은 이 네 요건을 불완전하게 수행하고 있다. 지역명, New York과 촬영 연도만 간명하게 나열한 표제 아래, 등에 새긴 문신을 과시하는 어떤 사내, 단란함을 과장하는 어느 커플, 드랙 퀸 행진에 참여한 어느 무용수, 가슴을 드러낸 채 카메라를 응시하는 해변의 어느 여인, 체형에 간신히 맞는 무대복장을 몸에 걸친 소녀들까지. <전국노래자랑>과 <짝패>가 공유하는 요소들이 무질서하게 분산된, 아주 먼 효시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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