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월) 20시. 아트나인. <The act of killing>(2012) 시사회.
별점: ★★★★☆
살인을 유사하게 재현한 영화도 아니고, 잔인한 살해 장면을 극적으로 부각시킨 영화도 아니지만, 인도네시아의 양민학살때 관여한 살인 집행자들 자신들의 과거를 미숙하게 재연한 영화임에도 관람 내내 무거운 감정을 털어내기 힘들다. 실제 사건의 재연이라는 리얼리티가 차지하는 압박감이 그만큼 무거운 모양이다. 1965~66년 사이 인도네시아에서 실제 벌어진 양민학살의 사망자가 무려 10만명 수준에 이른단다. 악의 상대성이라고 할까, 광주양민학살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다. 인도네시아 군사정부도 불법으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반대 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민심을 얻은 점에서 한국이나 전 세계의 군부 집권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의 현재는 과거 군부의 법통이 여전히 이어지는 것 같았고, 당시 학살에 가담한 민간인 폭력단체 '판차실라 청년단' 역시 현재 건재한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학살을 벌인 국가가 21세기의 국가공동체로 존재할 수도 있는 거다.
<액트 오프 킬링>는 인도네시아 북수마트라 지역의 살해 가담자들에게 그들의 과거를 재연하자고 감독이 제안해서 만들어진 영화란다. 그래서 학살자들의 과거를 재연하는 픽션과, 그 과정을 담는 논픽션 다큐멘터리의 병행로 구성되어 있다. 출연진은 1965년 무렵 인도네시아 학살에 가담한 극우단체 '판차실라 청년회'의 멤버들로 채워져 있는데, 영화에 따르면 이 단체의 회원은 현재에도 3백만이나 된단다. 영화에 출연한 판차실라 청년단회의 원로 가운데 다수는 지난 시절의 자신들의 학살을 자랑스럽게 대놓고 영웅의 회고담처럼 털어놓았다. 반면 판차실라 청년회를 설립한 영화 속 주인공 안와르 Anwar Congo을 포함한 소수는 양면적 감정을 오가며 정신적 혼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보도에 따르면 안와르는 철사로 목을 졸라 1천명을 살해했다고 한다. 그는 철사로 교살하는 건, 속전속결로 무수한 무고한 사람들을 처치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었기 때문이란다. 안와르는 영화에서 과거에 저지른 셀 수 없는 살인이 매일밤 악몽의 연속으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또 다른 청년단 일원은 '과거사에 대해 정부차원에서 사과를 한다면, 그것이 진통제 역할을 할 거'라고 말하는가하면 다른 자리에선 '전쟁 범죄는 승자가 규정하는 거여서, 진실을 알아내는 것이 꼭 좋은 건 아니다. 파헤칠 거면 카인과 아벨까지 거슬러 가야지, 왜 인도네시아 학살만 따지냐'고 자신이 가담한 과오를 태연하게 정당화하기도 한다.
<액트 오프 킬링>에서 묘사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는 이루 형언이 불가능할 정도로 형편 없고 무능한 국가공동체였다. 현대적 인류가 범할 수 있는 타락의 최대치를 보여주는 나라랄까. 카메라가 보는 앞에서 과거의 학살을 자랑하는 주지사와 폭력의 정당성을 공개석상에서 주장하는 인도네시아 현직 대통령, 공직 후보자에게 대놓고 '선물/뇌물도 없이 표를 호소하냐'고 되묻는 인도네시아 유권자들의 반응, 공산주의자(이기보다 반정부인사)를 대량 학살한 것을 두고 자랑이라고 방송에서 추켜세우는 국영 방송 진행자의 정신 상태, 극우단체 수장이었던 인물이 '민주주의가 넘쳐나서 사회가 혼란에 빠지는 거여서 군사독재가 필요하다'는 발언, 대량학살에 과거에 가담했던 노인이 사람 후세인이 대량학살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에 부시의 결정은 옳았다고 주장하는 것 따위. (이라크와 후세인은 대량학살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후일 판명되었다).
영화가 인도네시아 정부 관료의 집이나 민간인 폭력단체를 보여줄 때, 그들의 가정에는 놓인 기념비적 동물 박제 장식물은 이들의 학살의 과거사를 박제해서 보여주는 의도였을 것이다.
<액트 오브 킬링>안에는 과거에 가담한 학살을 재연하는 또다른 픽션이 담긴 액자형 구성이다. 영화 속 영화는 비전문 배우들의 조악한 연기력, 엉성한 분장 때문에 엉망진창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싸구려 구성이야말로 학살에 가담한 이들의 과거와 현재의 정신 상태를 재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극장에서 반공영화를 상영하고 국민들을 대규모로 동원해서 관람하게 했단다. 이런 부분마저 한국의 군사정부 시절과 유사하다. 군사정부 때 한국 일선 학교 학생들은 반공 만화책을 읽고 독후감을 제출하는 과제를 받았다.
<액트 오브 킬링>의 주연인, 극우 정부가 비호하는 비정부 민간단체, 인도네시아 극우 폭력단체 판차실라 청년회의 모습에서 한국의 극우정부가 비호했던 과거 서북청년단이나, 그들을 계승한 오늘날의 무수한 극우단체와 보수 대학생 단체를 떠올리기는 쉽다. 아시아 정치사의 비극은 동형적으로 반복되는 실정이다. 판차실라는 '프레만' (자유인이라는 뜻이란다)으로 불리는데, 전세계 어디서건 정치적인 극우가 내세우는 가치는 '자유'다.
* 후진국에서 곧잘 관찰되는 현상이지만, 공정한 분배를 주장하는 정치세력보다 포악한 완력으로 집권하는 정치세력에게 유권자들이 표를 던지는 이해할 수없는 정서를 이 영화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포악한 살상 행위로 연명했을 인류의 오랜 역사를 감안하면, 잔혹한 살상이나 약육강식에 대한 진화적인 선호 경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택도 없는 소리지만, 영화 후반부에서 마음이 흔들린 안와르의 마지못한 회계 장면에서, 극우 단체들이 과거의 폭력성을 그대로 혹은 더 과격한 방식으로 시위에 사용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과거의 과실을 지우려고 당시에는 떳떳하게 행했을 지난 시절 과실을 오히려 극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정당화하려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 <액트 오브 킬링>의 다큐멘터리 부분에서 지난 시절 학살을 영웅적으로 회상하는 이들에서 '연기자 같다는' 인사을 받았다. 미국 서부 개척영화나 갱스터 영화를 보면서 살인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고 털어놓는 이들의 고백으로 볼 때, 이들은 지난 시절 그들이 무감동하게 행한 살인에서 드라마처럼 연기를 했던 게 아닐까.
* 영화가 품고 있는 또 다른 인상적인 화면은 마지막 크레딧이다. 현재 인도네시아 정부 하에서는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신상보호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에 무수한 anonymous(무명)가 마지막 크레딧을 채운다.
* 영화 포스터에도 쓰인 거대한 물고기 조형물 앞에서 분홍색 의상을 차려입은 원로 살인마들과 무희의 대비적인 모습은 비현실적이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더라. 아마 이래서 비주얼이 중요한 모양이다.
* '판차실라 청년단'에서 리더 이상으로 활약한 극중 주인공은 놀랍게도 노벨평화상을 받은 넬슨 만델라랑 외모가 닮았다.
* 40여년 전의 학살을 태연히 즐겁게 영웅적으로 회상하는 무수한 학살자의 태도나, 완력으로 집권한 인도네시아 정부가 현재까지 유지되는 형편이나, 공정한 분배보다 군사정권을 지지하는 다수 유권자들의 경향을 영화를 통해 확인하면서, '결정적인 해결 방안' 에 관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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