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1일 토요일

류장복 개인전 '투명하게 짙은' 서문 (일민미술관)

​* 류장복 개인전 '투명하게 짙은'(2014.1017~1207 일민미술관)의 서문으로 쓴 글. 
   10월31일(금) 17시 일민미술관에서 부대행사인 작가와의 대화(엮인글)가 있었다.  



2013년 6월1일 11시49분, oil on linen, 90.9x72.7cm, 2014


류장복 프레임


반이정 미술평론가 

프레임 이론은 의제를 효율적인 처리하기 위해 사람들은 인식의 틀을 정한 후 세상을 바라본다고 풀이하는 이론이다요컨대 자기만의 창문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한다는 거다비단 남다른 자기 고유성을 보유한 인물이 아닌 그 누구건 자기 프레임에 따라 주어진 상황을 해석하고 대처한다탄광촌이 밀집한 철암을 필두로한남동이나 성미산 등지의 장소를 정해서 현지 순례를 떠나는 류장복의 기행도 그가 고집하는 프레임 가운데 하나일 게다.

거의 매일 일기에 가깝게 습작을 쏟아내는 창작 일과 또한 그가 취한 미학 프레임의 한 귀결일 것이다그림의 개수를 능가하는 단문 또는 장문의 글을 써나가는 습관도 그의 프레임이리라작가의 그림과 그가 쓴 글이 한 묶음의 연속체가 되도록 배려하는 건어쩌면 류장복을 규정할 수 있는 가장 상징적인 프레임이라고 본다.

급기야 틀/액자를 뜻하는 프레임을 가시적인 결과물로 연결한 것이창문 18을 늘어놓을 류장복의 21번째 개인전으로 구현된 게 아닌가 싶다이번 개인전에 소개된 창문은 2013년과 2014년 두 해의 여름 동안 관찰하고 연출한 창문들이다긴 세월 고집해온 류장복의 미학 프레임은 누구의 방도 아닌 자기 방에서 완결 되었다작가의 방 창문을 상이한 시점과 연출로 재구성한 거다공공의 창이 아닌 작가의 방 창으로 프레임을 잡은 게 관건일 것이다이를 테면 자기 방에서 재구성한 작가의 시점 쯤 될 터이니.

균일한 작가의 방 창문 사이로 이국 취향의 창문 점이 끼어드는데여행을 떠난 통영의 어느 숙소 창문이란다자기 시선을 안정적으로 담는 자기 방의 무수한 창문들 사이로 바깥세상에서 바라보는 창문의 사소한 간섭을 수용한 거다.

무수한 창문의 나열이 작가 관점의 제시라면이번 개인전의 큰 그림은 작가 관점을 반영하는 무수한 창문들과 그 사이사이 틈틈이 간섭하는 외계의 사건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외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대하는 작가의 관점을 병행시키려는 의도이리라단번에 알 수 있는 세월호 침몰 같은 동시대 사건이 작가의 창문 사이에 난데없이 개입한다세월호 침몰을 단독 사건으로 뽑아내기보다 일기의 흐름 속에 은연중 삽입하여 일기의 연속체의 일부로 동참시키는 식이다.

회화의 자기 지시성에 대한 류장복의 확신에서, 20세기 중반 평면회화의 독보적인 미학을 형상회화로 반복 계승하는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때문에 회화 공간의 투명성같은 미적 도그마를 고지식하게 지지하는 작가치고류장복은 과도하다 싶을 만큼 많은 글로 작품을 해설한다흡사 일과로 굳은 그리기가 일기의 대용인양 보이는 것과 별개로방대한 글로 그림들을 보족한다세월호 그림이 창문 연작 전체에서 단독적으로 행사하지 않듯류장복은 그림 한 점의 단독 승부수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 같다동일한 주제의 그림의 연작과 그 연작을 보족하는 글의 연작이 총체를 이뤄 제시되는 식이랄까그래선지 류장복의 형상회화가 작가가 쏟아내는 방대한 에세이로 자기 철학을 보강되는 닫힌 구조 안에 놓인 점마저, 20세기 중반 평면회화의 노선을 연상시킨다.


 2014년 6월27일 오후 2시2분, oil on linen, 90.9x72.7cm, 2014


두 개의 침몰, charcoal, graphite powder on linen, 90.9x72.7cm, 2014



2014~2  7월15일_13(1)


2014년 7월17일 저녁 8시57분, oil on linen, 90.9x65cm, 2014



작가가 쓴 글은 날씨에 관한 단조로운 품평풍경에 둘러싼 기계적인 관찰, “계단 끝에 녹슨 녹색 철문이 천국으로 가는 이승의 마침표 같았다.”(2008)와 같이 현지의 풍광을 멋 부려 시적으로 묘사한 글 등이 뒤엉켜 있다자기의 예술관을 장황하게 나열한 지문 역시 자주 눈에 띤다기자의 보도수첩마냥 촘촘한 연대기로 기록한 철암 작업의 묶음은 책 제목마저 숫제 <철암에서 그리고 쓰다>일 만큼 그림과 글의 관계에 대한 신뢰가 보통 이상이다.

류장복의 글과 그림이 일기에 가깝다는 건표면적으로도 손쉽게 확인되는데 그 대표적인 게 <2009.2.25. 20:10>처럼 연원일시와 요일 따위를 기계적으로 나열한 작품 제목 짓기다내용과 메시지를 투명하게 만드는 이런 제목의 무감동함 때문인지그림에 동반되는 에세이의 길이는 짧지 않고 시적인 묘사가 유독 많다.

그의 창작이 일기에 가깝다는 것은 연례행사에 가깝게 열리는 부단한 개인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매 개인전은 일기의 중간정리 쯤 되리라강력한 한방을 날리는 화면보다 무덤덤한 묘사로 삶을 스케치한 작업의 양이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도,외부 유행에 더디게 반응하고 내면의 고집에 집중하는 그의 성향 탓인 듯하다무심한 제목과 조응하는 덤덤한 화면을 표현주의적 글로 해설한다대상인 선탄장과 동기화된 재료를 택한 건지는 알 수 없으나목탄으로 표현주의를 정점까지 끌어올린 철암’ 연작마저 장문의 글로 그림을 보조한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대표작 두어 점이 아니라, ‘그림+글 패키지로 구성된 연속체가 류장복의 창작 주기를 형성해온 것 같다동일 연작 속에도 작품마다 질감의 편차야 존재하지만연작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연속체로 관람할 때 작품이 온전히 읽히리라그것은 장점이 될 수도 단점이 될 수도 있다그림 감상의 일반 관성에 저항하는작가 개인주의에 편중된 화면 구성이기 때문이다류장복의 프레임은 여하튼 그렇다.

그림+글 패키지로 구성된 연작은 관찰 지역들의 순례기로 구성되어 있다철암한남동성미산 등이 순방한 장소 중 일부다현지에서 섭외된 듯한 인물이 그림의 모델로 등장한다묘사된 인물은 쉽게 인지하기 어렵게 그려졌는데이것이 역설적으로 인물의 평범함을 간직하게 만든다그 결과그린 이와 모델만이 재현된 인물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그가 취하는 의사소통의 폭은 제한적인 것 같다.

류장복을 50대 한국 중견 미술인의 일반론이라 할 순 없어도, 50대 중견 평면 화가의 한 징후로 읽을 순 있으리라화단의 시류를 선도하는 뉴미디어 세대와는 상이한 미적 층위를 형성하는 세대 말이다어찌 보면 자기 고집의 고지식한 관철 같기도 하다뉴미디어를 창작의 도구로 간주하지 않는 50대 중견의 일반 평면 작가와 류장복 사이의 갈림길은 서넛 이상 잡힌다그 가운데 몇을 고르면그가 장르 회화의 원점에 천착하는 인상을 준다는 거다그는 예외 없는 하루의 일과처럼 방에서 바라본 창문 밖이라는 정물이라는 근작 이전부터보편적인 정물과 인물상을 그려왔다또 어쩐지 소싯적 단어처럼 느껴지는 스케치 여행을 떠나서현지와 현지인을 풍경화와 인물 초상화로 사생했다회화의 원점에로 숭고하게 귀환하는 모양새다사진에 의존해서 회화적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대적 공감에도 동참하지 않는다사진을 참조해서 그리지 그러냐고 묻는 누군가의 무심한 물음에, “그러면 사진처럼 돼서요실물보고 그려야 실감나요.”라고 응수하는 식이다.

2013년 이후 류장복의 습작에도 갤럭시노트같은 뉴미디어가 도입되었다그렇지만 여전히 뉴미디어는 습작을 돕는 보조 장비에 머물 뿐완성작을 만드는 프레임은 여전히 즉물적 사생과 직감에 의존하려 든다.

회화라는 프레임을 열린 창문에 빗대는 건 전통 회화 이론에서 곧잘 발견할 수 있다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건축가와 미술가은 2차원 면(화폭)에 3차원을 옮기는 방안을 고심하다가열린 창밖으로 내다본 세상처럼 그림을 완성하려 했고그 결과 선 원근법이라는 아주 오래된 눈속임 방법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재현 대상을 정교하게 옮기는 프레임으로 창문을 사용한 것이 전통 회화의 미학이었다면한국의 어느 50대 중견 화가는 창문을 자기가 고집하는 세계관과 미학을 고정시키는 프레임으로 사용하고 있다.

때문에 류장복이 자신의 작가관과 세계관을 나란히 투영하는 프레임으로 창문을 선택한 이상그가 그린 창 그림의 거개가 자기 방 창문인 건 자연스런 귀결일 게다.



* 10월31일(금) 개인전 부대행사 작가와의 대화 기록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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