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림 '잘 알지도 못하면서' + 일반·특이 행동: 4개의 퍼포먼스 (2013.0716~1013 서울시립미술관)
1005(토)
진경 (2013.0912~1027 OCI미술관)
금호창작스튜디오 8기 입주작가 비평워크샵 (2013.1005 금호미술관)
진마이어슨 (2013.0828~1006 학고재)
1006(일)
2013 다빈치 아이디어-블루아워 (2013.0925~1030 금천예술공장)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 (2013.1004~1006 문래예술공장 박스시어터)
1007(월)
비평가 이일 컬렉션+비평워크샵 (2013.1004~1031 최정아갤러리)
1012(토)
미디어 퍼포먼스 프로젝트 (2013.0905~1022 정미소)
칼리토 카르발료사 (2013.1012~1110 국제갤러리 k3)
1016(수)
이동기 '성난 얼굴로 돌아보지마' (2013.0925~1031 송원아트센터)
윤석남 '나는 소나무가 아닙니다' (2013.1016~1124 학고재)
김구림 + 일반·특이 행동: 4개의 퍼포먼스(서울시립미술관)
벽면에 적힌 해설에 따를때 김구림은 실험적 최초 시도자일 것이다. 국내 최초 누드 영화 <문명 여자 돈>(1969)제작, 국내 최초 실험 영화 <1/24초의 의미>(1969) 제작, 국내 최초 메일아트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 제작, 국내 최초 일렉트릭아트<공간구조 A,B>(1968) 제작. 김구림같은 최초의 실험 예술가와, 이른바 최초의 형식 미학 모더니스트들이 후일 받은 예우의 지위의 편차는 크다. 후자가 비교할 수 없이 큰 대접을 받았다. 둘 다 후기식민적 문화 조건이 초래한 최초였을 가능성이 농후한데도 불구하고. 누구의 발상인진 모르겠으나 김구림의 연보를 큰 벽면에 세계사 세계미술사 한국사 한국미술사의 연보 사이에 끼워넣어 비교한 건 과하게 느껴졌다. 서정추상부터 실험영화 대지예술....등을 단 세월안에 압축해서 실현했다? 후기식민적 조건이 만든 결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대와 후대에 높은 평가를 못받은 이유일 것이다.
김구림 전시와 연계된 퍼포먼스 행사는 개천절 개최되었고, 동시대 젊은 작가 4팀이 순서대로 꼬박 2시간을 채웠다. 두 댄스 씨어터(공영선_곽고은)+건축사사무소 SOA「주름, 짓다.」 이행준+유운성「강연 A Lecture」 양아치「칠보시(七步詩), fullbore metal version」 권병준「김구림의 그림자」이 그들. 4팀 모두 집중하기 힘든 행위 실험이었는데 특히 두번째 그룹이 행한 「강연」은 이론적 무게감이 실린 지문을 무거운 어조로 시종 강연하는 행위였고, 보는이의 진을 빼놓기 충분했는데 퍼포먼스 일반에 대한 거부감을 만들 만큼 내용 형식 모두 교조적인게 맘에 걸렸다. 이처럼 자기애적 탐구의 수혜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자기애와 인정욕구가 진하게 밴 점에선「강연」이 김구림을 가장 온전히 동기화한 퍼포먼스 같기도 하고.
진경 (OCI미술관)
2층 전시를 보지 못하고 돌아간 <진경>을 다시 들러서 보고 갔다. 임택의 출품작은 이끼가 낀 실제 '녹지'의 일부를 떼어온 설치물이다.
비평워크샵(금호)
금호 입주작가 8기 비평워크샵.
진마이어슨(학고재)
흠... 이러면서 봤던, 안정되고 긴 평면회화.
2013 다빈치 아이디어(금천예술공장)
2013 다빈치 아이디어(금천예술공장)
이 전시는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하나.
미디어 아트를 전시장의 굴레에 머물게 하지 않고, 사업 확장성/상품화 가능성의 여지를 시험하는 것이 다빈치 아이디어 공모다. 괜찮은 취지인데 이런 전시장에서 만난 당선작들은 손쉬운 자극-반응의 인터랙션에 예속되기 쉽고, 곧잘 간과되지만, 미작동 상태로 방치된 작품도 많다. 아마 이 모두가 뉴미디어 시대임에도 미디어아트가 진전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레일웨이 트레블러스 핸드북(문래예술공장)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또 다른 하나.
공연장에서 제자 2명을 우연히 만났다. 사진에 잡힌 제자와 그녀의 절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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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매체를 참조하는 창작이 시각예술 분야에서 대세를 이룬 현재, 미디어 아트가 해결해야할 난문제는 기존의 전문 매체의 분야(음악, 영화, 연극, 사진....)를 참조는 하되, 각 매체에 밀리지 않는 각별한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다. 전문 분야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드는 건 난문제이고 그동안 현장에서 발표된 무수한 미디어 아트가 공정한 견제를 받지 않아선지 다매체를 그저 참조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은 다매체 참조를 넘어 분야별 전문가와 협업을 도모하면서 다원예술로 이행 중인 한국 미술(시각예술)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활성화 되진 않았지만 수년전부터 국내 기획전에서 관찰되는 사운드 아트에 라이트 아트를 결합시키고 소리와 빛을 잇는 매개로 기차를 택한 구성이다. 기차는 여전히 근대성 담론을 저변에 깔 수 있는 유리한 소재이고, 앞에서 뒤로 전진하는 기차의 직선 운동은 미디어 아트의 시간성과 부합 되는 면까지 갖췄으니 말이다.
이 같은 기차의 속성은 <레일웨이 트래블러스 핸드북>의 도입 본론 그리고 마무리에 차용된다. 이 소리극의 도입부는 중앙등 하나를 빼면 암전된 실내에서 시작되며, 소리극의 종결은 전원을 모두 켠 조명과 고음의 기차 경적으로 무대를 채워지면서 마무리 되는 식이다.
이 공연의 차별점은 30분 동안 암전된 무대를 음과 빛이라는 2가지 단순 요소에 예속시킨 점일 것이다. 기차의 이동, 환승, 정착과 중요한 극의 전환을 조명의 미묘한 변화로 암시한다. 아나운서 목소리를 차용한 정치 논평(브로셔에 따르면 19~20세기 신문 광고 사료에서 따왔다고 함)도 조명의 미묘한 변화와 나란히 동기화 된다. 상업적 광고 멘트는 랙타임 피아노 반주와 동기화 된다. 이런 내러티브들은 철도에 대한 고증(이 기획전의 한 축이다)이 투영된 셈인데, 사운드와 빛의 압도 때문인지 철도를 둘러싼 그런 내러티브는 도드라지지 않는다. 철도와 근대성에 관한 이 기획의 서사는 빛과 소리라는 미니멀리즘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그리고 철도에 관한 내러티브를 강조하지 않은/못한 게 더 나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이 공연에서 기차는 빛과 소리를 매개하되 중요한 서사를 담은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미끼 혹은 영화로 치면 맥거핀 정도로 관객이 받아들이면서 보는 것이 낫다. 관객 대부분도 철도에 관한 서사보다 빛과 소리의 무대에 집중했으리라고 본다. 진지한 내러티브를 앞세우다가 지루함에 빠져버린 미디어 아트가 얼마나 많았던가.
--- 내가 쓴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시각예술 전문평가위원 평가.
비평가 이일컬렉션(최정아)
‘이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성사된 <비평가, 이일 컬렉션>은 두 개의 결과물로 이뤄졌다. 생전 발표된 비평문을 선집으로 묶은 출판기념회와 이일의 소장품 가운데 유족 대표인 장녀 이유진이 소장한 소품으로 구성된 컬렉션 전시회가 그 둘이다. 출판기념회와 전시회는 각각 아르코의 평론 출판 지원과 서울문화재단의 전시지원금을 받았다.
전시회 출판물 그리고 비평 워크샵은 모두 한 인물을 중심으로 매개된 행사여서 상보적인 성격이 있다. 그렇지만 생전 이일이 비평적으로 지지를 보낸 작가군과 미학적 흐름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히 반복적으로 노출된 형편인 점을 감안할 때, 소품으로 구성된 비평가의 소장품 전시를 통해 고인의 비평세계를 재확인하는 건 놀라운 발견도 각별한 기획도 아니다.
전시회 출판물 비평 워크샵의 진행 주체가 모두 이일이 교수로 재직한 홍익 미대 동문이 중심이 점이나, 당초 심포지엄으로 잡혔던 행사가 비평 워크샵으로 규모를 축소한 점이나, 비평 워크샵이 이일에게 사사한 후대 홍대 동문 평론가들이 모여 방담에 가까운 대화를 나눈 자리였던 점등을 고려하면 <비평가, 이일 컬렉션>는 공공성보단 사사로운 추모행사의 성격이 강하다. 특별한 준비 없이 즉석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청중에게 들려주는 자리가 무의미할 턱은 없다. 설령 그것이 비평 워크샵이라는 칭호에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말이다. 어쩌면 학술적으로 느슨한 그런 분위기는 1세대 이론수업의 일반적 학풍이었을 것이다. 이일은 생애 이룬 공로만큼 권세도 많이 누린 1세대 평론가다. 이번 추모 사업이 동문 제자 세대들로 편성되어 연대감이 강조된 점이나, 동문들의 사적인 회상을 이론전공 청중(대개 홍대 예술학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과 나누는 비평 워크샵의 성격으로 볼때, 공공기금보다는 동문 차원의 지원으로 조촐하게 진행하는 편이 적합했을 것 같다.
추모행사의 또 다른 진성성은 전대 비평가의 자료가 실현가능한 보급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리라. 그 점에서 상.하 2권 분량의 두툼한 <비평가 이일 앤솔로지>는 고전적인 ‘아카이브’ 자료의 관점에선 노동집약적 성과이지만, 후대 전공자들의 접근성은 차단하는 낡은 방식을 택한 셈이다. 대개의 앤솔로지는 찾아보지 않고 사문화되는 문서에 머물기 때문이다. “타계한지 16년이 흐른 지금, 비평가 이일을 기억하는 젊은 작가들이나 비평가들, 미술계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이일 앤솔로지 발간의 배경도, 낮은 수요에 직면한 오늘날 비평의 형편을 환기시키는 지문이지, 앤솔로지 발간의 정당성이 될 것 같진 않다.
--- 내가 쓴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지원사업-시각예술 전문평가위원 평가.
ps. 평가서에 적긴 어울리지 않지만 <비평가, 이일 컬렉션>의 '비평 워크샵' 참관에서 느낀 점:
- 지난 성과는 평가 정리 하되 발목 잡힌 현주소를 털어내야 하는 건, 한국 화단에서 올드 스쿨을 대할 때 직면하는 딜레마다. 작가 그룹이건 비평가 그룹이건 장유유서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 올드 스쿨은 딜레마다. 긴 문화 식민 상태를 통과한 1세대는 독보적인 성과를 냈기보다, 국외의 미학적 유행 가운데 일부를 국내에 기계적으로 이식했다는 의심을 줄곧 받아왔다. 그럼에도 1세대는 지나친 예우를 받아왔다. 현재 1세대의 영향력이 매우 미미하다는 건, 반어적으로 1세대의 자체 동력이 약하다는 걸 의미할 게다.
- ‘지는 장르’의 예술 분야가 자기 생존을 위해 꺼내드는 진부한 카드가 선대를 우상으로 만들어 거기에 빌붙는 것이다. 이런 생존법은 예술의 본질과도 거리가 멀다.
- 비평 워크샵을 듣고 있자니, 준비 안 된 만담으로 수업시간을 채우던 미술이론계의 오래된 학풍이 떠올랐다. 이러니 세대가 교체되어도 ‘젊은 구시대 미술이론가’가 반복해서 양산되는 거다.
미디어퍼포먼스(정미소)
매체예술 담론 수업에서 함께 논의하려고 학생들에게 보고 오라고 알려준 전시 서넛 가운데 또 다른 하나.
장르적 경계파괴, 다원예술, 준 관객모독적 해프닝은 이 바닥의 한 추세.
칼리토 카르발료사(국제)
칼리토 카르발료사(국제)
벽면을 침엽수 통나무가 뚫고 있는 설치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문뜩. 이런 초대형 설치물이 상업갤러리에게 어떤 미적, 경제적 효과를 발휘할지 궁금했다.
이동기(송원)
이동기(송원)
이동기의 2013년 신작 개인전. 전작 가운데 이동기의 대표 마스크인 아토마우스는 단 한점 뿐. 아토마우스의 의도적인 누락과 스프레이로 비형상회화를 차용한 페인팅 몇점의 포함에 주목해야할 거다. 아토마우스는 새로운 실험을 가로막을 만큼 이미 압도적인 원점이 되었으므로. 상호 무관한 광고사진과 텍스트를 중첩시킨 신작들에선 의도야 어떻건 제프 쿤스가 연상되기도 한다. 불투명한 원색과 만화적 구성이 만드는 작가들이라면 그 귀결 또한 비슷할 수밖에 없을 거다. 아토마우스의 팝아트의 적통을 잇는 직계 후신은 한류 붐이 만든 한국 드라마의 장면 일부를 옮긴 아래층 작업 같다. K-pop은 K-pop으로.
윤석남(학고재)
윤석남(학고재)
전시장에서 도판으로 내가 요긴하게 쓸만한 작품 한점을 발견했다. 전시를 촘촘히 보긴했는데 촬영하는 걸 잊어버렸다. 아주 오래된 나무 기와 위에 그린 평면 설치물이 이번 전시의 방점이다. 총출동까진 못되어도 왕언니들 일부가 참석한 오프닝 광경은 변화된 지형를 보는 듯(그럼에도 방문자의 연령대는 높았다).
뒷풀이 자리에서 소주를 너무 마셨는지 깜박 선글라스를 두고 나왔다. 선글라스 회수하러 다시 삼청동에 들러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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