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르웨이 현지에서 올해 열린 뭉크 탄생 150주년 기념전시 Munch 150에 관한 리뷰.
세종문화회관에서 간행되는 <문화공간>(11월호)에 기고한 원고.
반복된 모티프와 뭉크 탄생 150년
반이정 미술평론가
오슬로 공항에는 지난 10월까지 노란 바탕에 검정색으로 Munch 150이 적힌 초대형 배너가 걸려있었다. 세계 도처에서 모여든 입국자들은 이 큰 배너를 바라보며 노르웨이로 들어왔다. Munch 150이란 노르웨이 태생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 탄생 150주년을 뜻하는 약자로, 뭉크를 기념하는 여러 행사들이 Munch 150란 명칭 아래에 기획되었다. Munch 150의 홍보는 노르웨이 전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서울 도심에서도 드물게 관찰될 만큼, 뭉크 탄생 기념행사는 올해 노르웨이가 주력을 쏟은 문화상품이다.
뭉크는 반 고흐(네덜란드)와 나란히 현대미술사의 초석이 된 북유럽 태생의 양대 화가일 텐데, 반 고흐가 전성기를 프랑스에서 보낸데 반해, 미학적 성장과 여생의 많은 세월을 고국에서 보낸 뭉크는 노르웨이와 지연적 관련이 훨씬 깊다. 뭉크는 가히 노르웨이의 국보급 현대미술가인 것이다. Munch 150 행사의 정점은 단연 뭉크미술관과 국립미술관에서 개최된 회고전이다. 뭉크의 작품 연대기는 초기 작업(1882-1903)을 전시한 국립미술관과 후기작업(1904-1944)을 모아놓은 뭉크미술관으로 구분되어 있다. 특히 뭉크의 초기 작업에선 뭉크다운 표현주의가 아닌 북유럽 인물화 전통의 영향이 깊이 밴 1882년 자화상도 볼 수 있다. 한편 <생의 프리즈> 연작은 과거 전시 되었던 당시의 작품 진열 순서를 그대로 재연하기도 했다. 5개월 넘는 긴 기간 동안 250여점의 작품으로 뭉크를 포괄하는 이 대형 전시회에서 어떤 관전 포인트를 찾아야 할까?
동시대를 함께 산 반 고흐와 뭉크 사이의 유사점은 정규예술교육의 수혜를 받지 않고, 사실상 독학으로 자수성가한 경력이리라. 유수의 유럽 미술관들을 순방하며 거장들의 작품을 따라 그렸던 반 고흐처럼 뭉크 역시 앤트워프 파리 니스 베를린 코펜하겐을 방문하면서 유럽미술의 선배와 동시대 예술가들의 미학적 흐름을 지속적으로 접촉하면서 간접 학습의 길을 열었다. 덕분에 뭉크의 화풍에서 사실주의 표현주의 점묘주의 종합주의가 두루 관찰되는 건, 특정 유파에 예속되지 않았던 배경 때문일 것이다. 반 고흐가 신인상주의의 점묘주의와 물감을 두텁게 올리는 몽티셀리의 임패스토를 수용해서 독창적인 기법을 발전시킨 것처럼, 세기말에 유행한 미학 실험을 두루 섭렵한 뭉크도 독자적인 주제와 양식을 수립할 수 있었을 게다.
지난 2012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 뭉크의 <절규>가 매물로 나와 1억1992만2500달러(1355억원)에 낙찰되면서 역대 경매 최고가 기록을 깼다. 인구에 회자된 당시의 매물 <절규>는 우리가 익히 봐온 <절규>(1893)보다 2년 뒤 제작된 파스텔버전이다. <절규>는 현재 다양한 버전이 남아있다. 가파른 사선구도에 유기적인 빨간색과 파란색 곡선으로 화면의 상하를 구분한 ‘절규의 구도’의 효시는 <절규> 이전에 이미 제작되었으며, ‘절규의 구도’는 이후 여러 변형작을 낳았다. <절망>(1892)이 바로 우리에게 친숙한 ‘절규의 구도’의 맹아 쯤 되는 작품으로 <절규> 이전에 그려졌다. ‘절규의 구도’는 후일 여러 제목으로 반복되어 차용되었다. 그 중 <불안>(1894) <다리 위의 소녀들>(1901) <니체의 초상>(1905)처럼 ‘절규의 구도’를 쓰되 등장인물만 교체하면서 <절규>를 계승한 작품은 퍽 많다.
같은 모티프의 반복은 비단 <절규>만의 것이 아니다. 뭉크의 연대기를 다각도로 볼 수 있었던 Munch 150 전시에 따르면, 뭉크는 그가 애착을 보인 모티프를 평생 반복해서 채택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사춘기> <마돈나> <키스> <뱀파이어> <성스러운 어둔 밤> <여성의 세 시기> <병든 아이> 등은 모두 여러 변형을 낳은 그의 단골 주제들이다. 뭉크가 반복적으로 다룬 건 비단 작품의 주제 뿐 아니라, 수면 위에 막대처럼 길게 늘어진 달빛처럼 형식상의 패턴도 많다. 그는 그가 애착을 보인 패턴에 몰두했다.
모티프의 반복은 뭉크에게 어떤 성취감을 되돌려줄까? 동일한 모티프의 노출빈도가 잦을수록 그 모티프는 화가의 브랜드로 굳기 쉽다. 다리 난간의 역동적인 사선과 대기의 불안정한 유선형이 서로 부딪히는 <절규>의 구도를 전적으로 뭉크만의 것이라고 우길 순 없겠지만, 그 모티프가 반복되면 결국 그 불안정한 구도는 뭉크의 고유 브랜드로 굳는다.
뭉크 탄생 150주년 회고전을 관람하러 오슬로에 집결한 세계 각지의 관람객 행렬, 즉 근대 초기 거물 화가를 향한 동시대인의 집중된 수요를 보노라니, 현대미술이 처한 자기 고립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동시대인이 근대 초 화가에게 빠져드는 까닭은 뭉크가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올린 모티프들이 그림의 명시적인 주제야 뭐건, 일생에서 피해갈 수 없는 본능의 희로애락과 연관되어 선지도 모른다. 그래선지 불안과 죽음을 지목한 뭉크의 그림에서조차 대체로 에로티즘이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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