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6일 일요일

0121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몽상가들> ★★★

1월21일(화) 11시. 롯데 건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몽상가들 The dreamers> (2003) 시사회. 


별점:  







디카프리오를 아주 살짝 닮은 미국 배우가 출연하는 베르톨루치의 2003년 영화 <몽상가들>이 국내 재개봉했다. 서유럽에서 정치 문화의 격변기로 기록되는 68 혁명을 환기시키는 복고풍 구성 속에 파격적인 가족 윤리를 실행하는 어느 프랑스 가정과 디카프리오 필이 도는 한명의 미국인을 개입 시켜서, 궁극적으로 베르톨루치 감독의 지난 영화론을 고백하는 작품 같았다. 시네아스트들에겐 고전으로 숭앙되는 명화들의 장면들을 실제 삶의 규범으로 고스란히 수용하며 사는 60년대 후반 극단적인 영화광들의 모습은 감독 자신의 지난 생에 대한 회상 같다. 당시 프랑스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 앙드레 말로가 68년 독립 예술영화의 거점인 파리 시네마테크의 책임자 랑글루아를 해임하면서 관권 개입을 반대하는 영화인들이 정부와 충돌한 일이 있다. 당시 영화인의 시위는 <몽상가들> 속에서 그 무렵 촬영된 다큐멘터리 화면과 연출된 화면을 교차 편집시켜 보여주는데, 이 역시 허구와 실제가 혼합된 영화의 생리를 '투쟁 장면' 속에 기입한 것일 게다. 

68년의 정감을 간직한 영화광들은 정부 시책보다 그들이 신봉하는 예술 영화를 삶의 기준과 규범으로 간주한다. 때문에 당대를 산 베르톨루치의 자기 고백이 담겼다고 느낀 거다. 실제 68년 시네마테크의 설립자 랑글루아를 복권시킨 영화인 투쟁은 그 해 5월 68 학생 운동의 전조로 해석되고 있단다. 

영화 속 포인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인와 미국인의 대비다. 비현실적인 가족 정서를 지닌 어느 프랑스 가족과 그들의 삶에 우연히 끼어든 정상적 미국인이 주인공인데, 프랑스 가족과 미국인은 영화적 열정을 매개로 상호 교감을 이루지만, 비정상적인 프랑스 가족이 이 정상적 미국인에게 호감을 갖는 계기는 그를 집에 초대한 식탁에서다. 미국인은 식탁보의 무늬와, 반찬을 담은 그릇의 무늬, 그리고 라이터의 높이, 그리고 사람의 콧대가 모두 동일한 길이임을 발견했다고 프랑스인 가족에게 자세히 설명한다. 이 미국인의 괴상한 관찰력 때문에 국적이 다른 두 영화광들의 교감은 더욱 깊어진다. 

미국 영화와 미국 음악을 둘러싸고 프랑스인과 미국인이 견해 차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영화예술의 허구적 설정을 실제 삶에서 반복하는 프랑스 가족에게 문화적 공급처가 되는 원점은 결국 미국 문화였다. 프랑스 가족 집안에 붙어있는 미국 대중음악인의 자료나 재니스 조플린의 음악, 그리고 들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그림에서 여신의 얼굴 부위에 마릴린 먼로의 얼굴 사진을 몽타주로 처리한 포스터 따위는 미국 대중 문화의 그늘 밑에 있는 당시 프랑스 문화의 형편을 보여준다.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방점은 정상 가족에게선 기대하기 힘든 과도하게 개방된 가족들의 성윤리와 생활 방식일 것이다. 과도한 인체 노출과 접촉을 스스럼 없이 이행하는 젊은 프랑스 가족(남매?)임에도 예상과는 달리 이사벨은 성경험이 전무했다는 점. 이는 대중문화의 영향권 아래서 살지만 문화의 허구적 판타지에만 중독되어 정작 실제 삶의 생리는 외면하며 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실제 삶과는 유리된 몽상가였다는 점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다. 그 점은 영화예술에 대한 중독으로 현실 감각과 이상이 혼재된 프랑스 가정의 남매가 결국 절친이던 미국인의 만류를 뿌리치고 시위현장으로 뛰어드는 장면으로 마감되는 것일 게다.  

외부와 차단된 가정 내에서 스스럼 없이 과도한 인체 노출과 인체 접촉을 행하는 비현실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하드코어한 성표현은 흡사 68년 전후 세계 영화계에 화제를 낳았던 숱한 명작들의 극단적 표현주의-스탠리 큐브릭 <시계태엽 오랜지>(1971), 오시마 나기사 <감각의 제국>(1976).... -에 대한 베르톨루치의 향수 어린 복원 같기도 했다. 

영화 오프닝과 클로징 크레딧이 화면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방향성을 띠기 마련인데 반해, 거꾸로 위에서 아래로 낙하시키는 리와인드 방식을 택한 <중독자들>의 크레딧은 고정된 영화 문법을 가볍게 역행시켜서, 영화적 삶과 현실의 삶이 뒤엉킨 (베르톨루치를 포함함) 일부 전업 영화인 혹은 광적 시네아스트에게 보내는 응원가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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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의 '혁명'  


“시네마테크는 젊은 감독들의 가장 훌륭한 학교였다. 그곳은 영화의 성전(聖殿)이었다.”(장 르누아르)
프랑스 파리의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자신의 영화인생에 끼친 영향을 열렬히 설명한 영화감독은 한두명이 아니다. 누벨바그를 탄생시킨 고다르와 트뤼포에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알랭 레네, 니콜라스 레이, 그리고 젊은 감독 레오 카락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감독들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와 그 설립자인 앙리 랑글루아에게 자신의 명성을 고스란히 바쳤다.
한 젊은 영화광에 의해 1936년 만들어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20세기에서 가장 거대한 작가의 산실이자 가장 전위적인 영화운동의 발원지가 돼왔다. 불과 22살의 나이에 ‘영화 필름의 보존과 상영’이라는 목적으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설립한 앙리 랑글루아는 죽을 때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집활동을 통해 6만여편의 영화로 이 공간을 채웠다. 그러나 앙리 랑글루아가 시네마테크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받는 이유가 단지 방대한 자료수집에 있는 것은 아니다. 랑글루아 이전에도 이미 스웨덴이나 영국에 영화자료관이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보관의 기능만을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랑글루아는 일주일에 10여편씩 자신이 직접 짠 프로그램을 상영하며 관객을 토론의 장으로 끌어냈다.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버려진 보석이 재발견되기도 했고, 시네마테크의 젊은이들은 누벨바그와 작가주의라는 영화적 사고의 혁명적인 전환을 만들어냈다. 또한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되었던 장 르누아르의 명작 <게임의 법칙> 같은 작품들이 시네마테크에 의해 복원되기도 했다.
시네마테크와 랑글루아가 영화인들로부터 받은 전폭적인 지지는 68년 대규모 거리시위를 촉발시킨 랑글루아 해임사건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드골 정부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가 랑글루아를 관장 자리에서 해임시키자 르누아르, 레네, 고다르 등이 주축이 된 복권위원회가 만들어져 즉각적인 항의성명을 냈다. 영화계의 거성들이 거리로 직접 뛰쳐나와 서명운동을 벌였고 학생들은 항의농성을 했으며 찰리 채플린, 존 포드, 오슨 웰스 등 100여명의 국제적인 감독들도 자신들의 영화상영을 프랑스 안에서 금지하겠다는 서한을 보냄으로써 프랑스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결국 70여일의 투쟁은 랑글루아의 복권으로 마무리됐지만 이 사태는 68년 5월 학생운동의 전조로 해석되기도 한다.
6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진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여전히 영화광들에게 신선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있다. 영화 상영 외에도 1년에 2차례씩 학술회의를 열고, <시네마테크>라는 계간지를 발행하며 미래의 작가들을 위한 어린이 영화교실도 운영된다. 최근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는 정부의 영화관련기관 통합계획과 마찰을 일으키며 약간의 진통을 겪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진통조차 영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민간인들과 정부쪽의 공통된 의지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프랑스사회는 여전히 행복한 영화선진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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