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사가 공개 등록된 날은 거의 같지만, 시기적으로 '교보북스' 인터뷰(엮인글) 보다 훨씬 앞서 진행된 '도서11번가' 인터뷰 기사. 작년 12월23일(월) 신사동 '카페포엠'에서 인터뷰를 했다.
작성일 2014-01-15 | 조회수 8
아기가 태어나면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 옷을 입힌다. 결혼식은 보통 웨딩홀에서 한다. 사람들은 이런 일상적인 일들을 당연하게 여기며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이미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미술평론가 반이정 씨의 《사물 판독기(세미콜론)》는 이런 상투적이고 평범한 현상을 향해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시사주간지 <한겨례 21>에 2년에 걸쳐 연재된 ‘반이정의 사물 보기’ 91편을 한 데 묶고 9편의 원고를 새로 더해 독자 곁을 찾았다. 저자는 예술작품에서 의미와 가치를 찾아내는 평론가의 특기를 살려 검정 비닐봉지, 면 사리, 벽지, 횡단보도 등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주변 사물들로부터 온갖 의미와 생각거리를 꺼내놓는다. 500~1000자 남짓한 짧고 압축된 글과 강렬한 사진이 주는 여운은 저자의 톡톡 튀는 발상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자들까지 사색으로 이끈다. ‘진중한 사색과 순발력 있는 농담 사이’라 말해지는 반이정만의 글쓰기 방식이 감칠맛은 덤이다.
미술평론가의 감식안에 걸린 소소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평범한 일상에서 남다른 면모를 찾아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신사동 카페포엠에서 반이정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사물 판독기》라는 제목이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현재 제가 씨네 21에서 <예술 판독기>라는 제목으로 예술비평 칼럼을 연재하고 있어요. 《사물 판독기》도 사물에 대해 논평을 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목으로도 좋고 그 칼럼과 연결되기도 하지 않겠느냐고 편집자가 제안해주셨어요. 원래 저는 100가지 사물을 다루니까 ‘사물 백과사전’이 어떨까 했는데 그건 낡은 제목이라고 하더라고요. (웃음)”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각각 핑크색과 파란색 물건이 가득한 방에 앉아 있는 표지도 독특하고 눈에 띄었는데요. 표지 사진에도 의미가 들어있나요?
“표지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표지에 실린 사진은 사진작가 윤정미 씨의 작품인데요. 몇 십 몇 백 개의 사물이 우르르 모여 있는 사진이 《사물 판독기》라는 책 제목이나 내용과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미술작품인 만큼 시각적으로도 보기가 좋고요. 원래는 본문 중에 색에 관련된 내용을 다루는 파트에 삽입하고 싶었던 사진이었는데, 내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결국 책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하지만 표지에는 꼭 쓰고 싶었어요. 처음 책을 내기로 마음먹은 2007년부터 표지에는 이 사진을 써야겠다고 혼자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소재가 되는 사물들은 어떻게 고르셨나요?
“상투적이거나 양면성을 지녔는데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사물들에 대해 쓰려고 했어요. 칼럼 연재를 할 때 맨 처음 떠올린 소재가 ‘검정 비닐봉지’와 ‘여자아이들이 입는 분홍색 옷’이었는데요. 흔히 보이지만 사람들이 딱히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들이죠. 그런 사물들에 대해서,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내용을 풀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표적인 예가 예식장 건물이에요. 예식장이 후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람들은 거기에서 결혼을 하잖아요. 또 ‘여대생과 남자교수’의 관계는 실제로는 단순한 사제지간이지만 다른 식의 함의가 담기기도 하죠. 이런 것에 대해서는 보통 논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짧게 압축해서 논평하면 문화적으로 의미가 있겠다 싶었어요. 연재 형식이 원고지 2.5매 분량으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책을 내시면서 연재 당시와 달라진 부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단행본 작업을 하실 때 어떤 부분에 중점을 두셨나요?
“연재 당시의 칼럼 원고가 다 해서 91편이었는데 책에는 9편을 더 추가해서 총 100개의 사물을 다뤘어요. 연재 이후 시간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맞춰 CCTV, 아파트, 블로그/SNS 등 9개 원고를 추가했어요. 연재했던 원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고쳤고요. 덕분에 분량이 많이 늘어났어요.
책에 실린 사물 사진들도 공중화장실 한 점을 빼놓고는 다 바꾸었어요. 연재할 때는 원고 내용에 맞는 사진을 출판부에서 찾아 넣었는데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책을 낼 때는 사진을 다 바꾸겠다고 결심하고 있었죠. 출판이 좀 지연된 김에 찾아보니까 주제가 된 사물들을 다룬 예술작품들이 많이 있어서 작품사진 중심으로 도판을 넣었어요. 책 속 사진의 70% 정도는 미술작품이에요.”
목차를 보면 각양각색의 사물이 6개의 카테고리 안에서 분류되고 있는데요. 저마다 다른 사물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셨나요?
“연재하면서 소재를 택할 때는 책을 낼 생각을 못했는데, 책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몇몇 사물들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이더라고요. 그래서 좀 더 세분화를 시켜서 총 6장으로 나눴어요. 색깔, 섹스, 공간은 아주 명백하게 분류가 되는 내용들이고, 미물예찬은 문자 그대로 사소한 것들. 키치와 미신 이 두 카테고리는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다루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그리고 반대로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뜯어보면 형식적인 의례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에요. 실은 이 두 개의 카테고리는 다른 카테고리에도 혼재되어 있어요. 포괄적으로 보면 6개 장에 들어있는 사물 전부를 키치나 미신으로 분류할 수 있어요.”
‘반이정’은 본명이 아닌 필명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의미가 담겨있나요?
“이름만 보고서는 여자인 줄 아는 분들이 많은데, 예전부터 필명을 쓸 때는 여자 이름을 쓰자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제 본명이 좀 촌스러워서 전업 필자가 되면 이름을 바꾸자고 생각했는데, 여자가 강한 표현으로 비평을 하면 사람들이 ‘이 여자는 뭐야?’하고 자극을 받을 것 같았거든요. 치기 어린 생각이었죠. (웃음)
반이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어감만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필명을 고민하던 당시 만나던 사람 중에 반 씨 성을 가진 분이 있었는데 희귀한 성이기도 하고 발음이 참 예뻤어요. 또 이름은 연예인 이의정 씨 이름이 참 예쁘다고 생각해서 이정으로 정했고요. 큰 의미는 없어요. 미술에 무의미함을 지향하는 ‘다다이즘’이라는 사조가 있는데, 이 ‘다다(Dada)’라는 말에도 실은 별 의미가 없어요. 저는 그런 게 좋더라고요. (웃음)”
연재 당시의 컨셉이 ‘500자 이내의 압축된 글’이었는데요. 짧은 글의 장점, 그리고 또 한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책을 내면서는 원고를 수정해서 2배 가까이 분량이 늘었지만, 연재 당시에는 원고지 2.5매 500자를 딱 지켰어요. 짧은 지면 안에 원고를 집약시키는 작업을 2년 정도 했는데 참 괜찮은 글쓰기 훈련이 됐어요. 이제는 100매를 쓰더라도 그 이전에 쓰던 원고와는 다른 면이 있어요. 짧게 압축해서 단락을 나눠 써요. 《사물 판독기》에도 서문이나 <긴 댓글> 코너 같이 장문의 글이 들어가 있는데 자세히 보시면 한 단락 단위로 이야기가 끊어져요. 물론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지만 단문으로 구성된 글이에요.
짧은 글의 장점은 속도감이 있다는 거죠. 취향 차이는 있겠지만 저는 짧은 글에 장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지금 시대의 의사소통 플랫폼은 비주얼과 짧은 글의 조합을 통한 전달이에요. 그렇게 플랫폼이 짜인 지 한 몇 년 된 것 같은데 이 흐름이 앞으로도 한동안 계속될 거라고 봐요. 그렇기 때문에 짧은 글을 잘 쓰는 능력은 그 사람의 장점이 될 수 있죠.
짧은 글의 한계를 굳이 말하자고 한다면 분량 면에서 구구절절한 사연을 담을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요. 그건 긴 글로 쓰면 되겠죠.”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가지고 계신 원칙이 있나요?
“원칙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글은 재미있게 읽혀야 된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 미술은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잖아요. 그래서 더욱 미술평론은 재미있게 읽히도록 해야 하죠. 재미있게 쓰면 글이 가볍고 내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정보량이 많으면서도 재미있게 읽힐 수 있는 글이 좋은 글이라고 봐요. 아직 그 단계에 완전히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그게 제가 지향하는 글쓰기예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새삼 새롭게 바라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데요. 남과 다른 관점으로 사물을 바라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그냥 자연스럽게 보는 거라 설명을 잘 못할 것 같은데... (웃음) 오래된 버릇인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많이 해요. 예를 들어서 길 위에 천이 놓여 있으면 로드킬이 연상되고, 그게 하나의 단서가 돼서 로드킬당한 동물과 버림받은 옷이 떠오르죠. 계속 여러 가지 공상을 하기 때문에 혼자 있어도 심심할 틈이 없어요.
아주 어릴 때부터 혼자서 이것저것 공상에 빠져서 생활 속에서 많은 의미를 찾아왔어요. 이렇게 오래 누적해 온 버릇 덕택에 조금 더 쉽게 일반적인 사물을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분홍색 옷은 여자아이가 파란색 옷은 남자아이가 입는 건 왜 그럴까? 녹색은 평화의 색이라는데 과연 그럴까?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어 가다가 어떤 관점을 찾아내면 그 내용을 글로 풀어내는 거죠.”
미술 평론가에게는 어떤 능력이 요구되나요?
“뜻밖의 질문이네요. 요구되는 자질이라... 말과 글로 승부를 보는 직업이니까 전문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말과 글이 읽히고 들릴 수 있도록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또 한 가지, 보통 미술 평론을 할 때 이론에 맞춰서 작품을 분석하는데요. 너무 이론에 예속되어서 글을 쓰는 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시민뿐만 아니라 미술가와 미술계 비평 사이에도 큰 강을 만들거든요. 미술가들이 미술 비평을 많이 읽을 것 같나요? 전 안 읽는다고 봐요. 글이 읽히지 않는데 어떻게 읽겠어요?”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1월부터 일정이 많아요. 지금 케이블 방송에서 <아트 서바이벌: 아트 스타 코리아>라는 미술가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제작중이에요. 지금 1~2차를 다 마치고 본선 진출자 15명을 뽑아서 합숙을 시작했는데 거기에서 제가 멘토링을 맡게 됐어요.
또 현재 《월간 미술》에 투고중인 <9809 레슨> 이라는 연재가 있어요. 한국도 하고 있어요. 1998년부터 2009년까지 12년간의 현대 한국 미술사를 한 해씩 주제를 정해 이야기하는 내용이에요. 오는 3월이면 연재가 마무리될 것 같은데 이 내용으로 청담동 송은 아트스페이스에서 무료 공개강연을 할 거예요. 1월에 3회, 2월에 2회, 3월에 3회 총 8회 강연이에요. 이 원고를 책으로 내려고 준비도 하고 있고요.
《사물 판독기》와 이 책을 포함해서 2013년부터 10년 동안 총 10권의 책을 내겠다는 목표가 있어요. 2013년에는 《사물 판독기》를 냈고 2014년에도 1권 이상 낼 생각이에요. 책이 안 나오는 해도 있고 2권 나오는 해도 있겠지만 2022년까지 총 10권의 책을 내려고 계획 중이에요.”
10년간 10권이라니 대단한 목표네요. 결심하시게 된 계기가 있나요?
“원래는 제가 단행본을 많이 안 냈어요. 책은 오프라인 매체인데 이제는 온라인 시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2006년에 《새빨간 미술의 고백》이라는 책을 냈었는데, 그 책에 제 생각에 아주 좋은 책도 아니고, 큰 출판사에서 낸 것도 아니고 홍보도 안 했는데 호응을 얻었어요. <TV 책을 말하다>에도 나오고 라디오에도 소개되고 서평도 받고요. 저는 제가 비평을 씀으로써 제 존재감이 유지된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지만 사람들은 책을 통해 저를 많이 기억하시더라고요. 온라인상에서 유지되는 것도 의미가 크지만 출판시장, 오프라인 책도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행사한다는 것을 많이 느꼈어요. 그 책이 아주 좋은 책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좋은 책을 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리고 《새빨간 미술의 고백》을 냈을 때도 그랬고 이번에 《사물 판독기》를 내면서도 좋은 의미로 들뜬 기분이 느껴지더라고요. 오만하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책을 내는 게 제가 심기일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정도 의미를 담는 책이라면 내는 게 좋겠다고 느꼈어요.
현재 <9809 레슨> 외에도 또 하나 우리나라 미술의 흐름에 관한 책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 책은 제가 중장기적으로 바라보고 특히 주력하고 있어요. 미대에 강의를 나가보면 학생들이 우리나라 미술에 대해 너무 몰라요. 거기에 대한 문제의식도 별로 못 느끼고요. 학생들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부에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교과과목이나 교재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속도감 있게 읽히면서 정보가 많이 담긴 교재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2010년부터 했어요. <9809 레슨> 연재도 그 작업의 일부예요. 미대생뿐만 아니라 한국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접근하기 괜찮은 책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마지막으로 독자분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예술과 실제 삶이 떨어져 있으면 안 돼요. 그러면 예술이 성역화 되거든요. 《사물 판독기》는 예술을 해석하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주변에 널린 자기 삶과 밀접한 대상을 분석한 책이에요. 그래서 독자들이 부담 없이 읽으면서 비평의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연재 때와는 달리 책 속 사진을 미술작품으로 채워서 보는 재미를 보충하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즐겁게 읽을 수 있지만 거기에 들어 있는 정보는 가볍지 않으려고 노력한 책입니다. 이상입니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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