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6일 월요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둘러싼 ‘어떤’ 과잉 대응(문화공간. 1월호 358호)

* 세종문화회관에서 발행하는 <문화공간>(신년호 358호)의 '꼭두머리'에 실린 원고. 작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간담회(엮인글)에 다녀온 직후의 심경을 썼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을 둘러싼 ‘어떤’ 과잉 대응



반이정 미술평론가


2013년 미술계에서 회자된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꼽으라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개관 일 것이다. 본관이 위치한 과천의 지정학적 거리감은 당대 한국인이 현대미술과 맺는 거리감에 빗댈 만하다. 오해 없길 바란다. 미술관이 멀어서 현대미술을 쉽게 접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려는 게 아니다. 해외 유수의 미술관 중 기차로 수 시간씩 떨어진 데 위치한 경우도 많다. 시민이 현대미술을 자발적으로 향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게 현대미술이 어려운 원점이라고 나는 본다. 때문에 서울관 개관이 시민사회와 현대미술 사이의 폭을 좁히는데 가시적 성과를 당장 내진 못하리라고 나는 본다. 미술대중화를 향한 우선 과제는 근접거리에 건물을 세우는 게 아니라, 현대 미술에 관해 시민이 근접할 수 있는 교육프로그램이어야 한다. 2008년께 ‘기무사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서울관 추진 서명운동이 미술계 일각에서 진행되었을 때 나는 서명에 동참하지 않았다. 미술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인구가 태부족인 상태에서 서울에 하부구조만 심는다고 상태가 나아지리라 보지 않아서다.


“나는 평소 서울에만 미술관이 편중돼 있다고 느껴온 터다. (중략) 국립미술관의 지난 성과가 ‘지리적 난점’ 하나만 빼면 공·사립 미술관 및 유수의 갤러리보다 월등히 능가하는 미학적 성과를 내놨는지 따져야 한다. 이게 바로 신뢰 회복의 시작이다. 둘 사이에 큰 편차를 발견하긴 어렵다.” -- <한겨레> 2008년 8월19일 필자의 기고 ‘기무사 미술관’ 중. 

서울관 개관은 시민사회의 관람 기회 확대의 문제이기보다, 미술계의 이해관계와 깊은 관계를 맺는다. 아니나 다를까 개관 직후 미협이라는 국내 최대 미술단체 회원 3백여명이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퇴진을 내건 집단 시위를 서울관 앞에서 진행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시위에 대해 미협 이사장은 “이유는 (개관전) 초청장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11.17자 보도) 그 이유가 옹색하다 느꼈던지, 며칠이 지난 보도에선 “받지 못한 초대장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강조했단다(11.25자 보도). 며칠 새 변화된 시위의 입장 표명만으로도 의전 문제가 쟁점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유교문화가 강하게 남은 사회에서 소홀한 의전이 간과될 문제라 볼 순 없으나, 세를 과시하는 집단시위의 이유였다는 건 명백히 반예술적이다.

작년 말 국립현대 미술관장과 비평가들이 한식당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식사 후에 미술관측에서 조언을 부탁하자, 평론가 한 두 분이 말을 잇더니 이내 말의 홍수가 쏟아져 나왔다. ‘개관전에 담론이 부재했다’, ‘특정 학교 편중이 심했다’ 등등, 종래 충분히 거론된 사유가 여러 입을 통해 동어반복 되었다. 지적해선 안 될 말은 아니지만, 때론 논지가 뭔지 좀체 알 수 없는 밑도 끝도 없는 장광설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마이크를 건네받으면 한마디씩 보태서 자기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평론가가 꼭 있다. 

의전 문제로 초유의 집단 시위까지 벌인 미협의 입장 표명이나, 식당 간담회 자리에서 시시콜콜 반론하기 어려운 세세한 문제를 반복적으로 추궁하는 일부 평론가에게서 진정성을 읽긴 어렵다. 서울관 개선안에 대한 시위자와 비평가의 진정성을 확인할 방법은 있다. 그들이 비판한 화두가 향후 개선될 때까지 반복적으로 문제 제기를 하는지 지켜보면 된다. 다만 문제 제기의 자리는 노상이나 식당이 아닌 공적 자리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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