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 위에는 머그컵이 2개 있다. 하나는 커피를 담아 마시고, 다른 하나는 필기도구를 꽂아두고 있다. 그렇게 컵은 컵이면서 컵이 아니기도 하다. 그렇다면 책상은? 책상은 책상이기만 한 걸까? 의자는? 갑자기 매일 쓰던 물건들이 낯설게 보인다. 이게 다 『사물 판독기』를 읽고 난 후 생긴 후유증이다.
『사물 판독기』는 우리 주변에 흔히 보는 사물과 현상 100가지를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는 짧은 글들을 엮은 책이다. 미술평론가가 미술이 아닌 일상 사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다, SNS시대의 시대정신이라고 할 만한 ‘이미지 하나에 짧은 텍스트’ 형식의 구성, 그리고 ‘진중한 명상과 순발력 있는 농담의 중간’을 표방하는 경쾌한 문체까지, 구석구석 독특하고 재기발랄한 책 『사물 판독기』의 저자, 미술평론가 반이정과 만났다.
꽤 오래 전부터 일간지나 주간지 등 여러 매체에서 평론가님의 글을 자주 접했어요. 그래서 출간한 책도 많으실 거라 생각했는데, 단행본 출간은 첫 번째 책인 『새빨간 미술의 고백』(2006년)이후 7년 만이네요.
최정화라는 경력도 많고 유명하신 분이 있어요. 이분이 2006년에 전시회를 크게 했는데, 고작 두 번째 개인적이었던 거예요. 개인전이라는 것이 약간 경력 쌓기인데, 이 분은 개인전에 큰 뜻을 안 두고 살아오셨던 거죠. 저도 비슷한데, 비평가로서 그때 그때 시의적절하게 글을 써내면 되는 것이지, 써냈던 비평문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이 경력은 될 수 있지만 독자를 대상으로 한 책으로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사물 판독기』 책을 내면서 새로운 경험을 얻었어요. 사람들이 저를 기억할 때 예전에 냈던 책으로 저를 많이 기억하시더라고요. 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인, 좀 부끄러운 책인데 말이에요. 책을 내면서 중간 성과를 공유하는 것도 비평 활동 안에 둬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고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 단행본 10권을 내기로 결심했어요(웃음).
『사물 판독기』는 미술서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고, 분류가 좀 모호하네요(웃음)
편집자들도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어느 장르에 넣어야 할지 말이죠. 어떻게 보면 제가 앞질러 가는 거죠(웃음). 이제는 기존의 틀에 맞지 않는 이야기들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미술평론가인데, 예술작품이 아닌 일상적인 사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쓴 것도 독특해요.
눈에 자주 보이는 대상들이 있잖아요 사물이 되었건 현상이 되었건. 미술은 아니지만 논평할 만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반적인 사물들도 기본적인 용도 이외의 의미들이 많거든요. 미술작품들보다 사람들의 손 때, 사연도 더 많이 묻어 있고요. 게다가 어떤 형태가 꽤 오랫동안 유지가 되요. 머그컵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형태가 꽤 오랫동안 유지된다는 거죠. 그런 것은 분명히 풀이할 만한 텍스트로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책 속에서도 도판으로 현대 미술 작품들 이미지를 많이 사용했는데요. 어떻게 보면 현대 미술은 인물이나 풍경보다 사물에 더 관심이 많은 것도 같네요.
연재 할 때는 신문사 사진DB에서 이미지를 골라서 넣었는데, 이번에 책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사물을 사진으로 찍거나 설치작품으로 만든 것이 굉장히 많더라고요. 그래서 책에서는 해당 사물을 예술작품으로 다룬 도판들로 많이 교체했어요.
현대 미술이 어려운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이렇게 일반적인 오브제를 전시하는 거예요. 작품이란 감동을 어떤 형태의 정보로 만들어 전달을 하는 것인데, 예전에는 그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유화나 조각이었다면 요즘 시대에는 뉴미디어나 일반적인 사물로 바뀐 거죠. 그런데 역설적으로 일반인들은 그 부분을 더 어려워해요. 왜냐하면 이게 작품이 아닌 것 같으니까.
어떻게 보면 현대미술가들이나 저나 표현 방법이 다른 것이지 똑같은 생각을 한 거죠. 현대미술가는 오브제로 작품을 하고 저는 오브제를 비평하고. 그렇게 해도 충분히 공감이나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책에는 100개의 사물과 현상을 담고 있는데, 사물들을 선정하는 어떤 기준이 있었나요?
『사물 판독기』는 주간지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묶은 것인데, 연재할 때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물들을 선정한 것은 아니었어요. 주변에 자주 보이는 것들을 무작위로 다루었는데 연재가 반복될수록 사물을 바라보는 몇 가지 프레임이 보이더라고요. ‘핑크색’은 아동용품, 특히 여자아이들 물건에 자주 쓰이지만 또 성인용품으로도 많이 쓰이거든요. 그렇게 인간 심리에 있는 모순적인 심성을 반영하는 사물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매일 보는 사물에서 다른 면모들을 발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나름의 노하우나 방법이 있을까요?
책의 서문에서 글을 쓸 때마다 소재로 정한 사물을 두고 1시간 여 명상하면서 글을 쓴다고 했는데, 연재를 오래 하다보니 이제는 사물들을 보면 딱 떠오르는 게 있죠. 그리고 매주 연재를 하면서 훈련이 많이 되었어요. 이제는 강연을 준비할 때도 큰 틀만 잡으면 해당되는 이미지들을 이렇게 배치하고 이렇게 얘기하면 되겠다 하는 걸 훨씬 손쉽게 해요.
책에서 다루는 사물/현상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키치(즘)’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요. 가족 키치, 결혼 키치, 패션 키치, 신앙심 또는 애국심 키치. 어쩌면 가장 일상적인 수준에서 우리 의식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들에서 이처럼 키치가 다수 발견되는 현상이 아이러니하달까요.
키치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감동을 인위적으로 가장하는 것. 원래 대중적인 수요가 가장 많은 곳에 키치가 많아요. 거의 예외 없다고 보는데. 대중적 수요가 많다는 것은 A도 만족시키고 B도 만족시키고 C도 만족시켜야 하니까 여러 사람에게 공히 마음에 드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다보니 아주 고급한 입맛이 나오긴 어려운 거거든요. 그걸 약간 미감에 훈련이 된 사람이 봤을 때는 촌스러울 수 밖에 없어요.
한 사물에 대해서 한 페이지로 짧게 쓰셨어요. 긴 글 쓰는 것도 어렵지만 짧게 쓰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데요.
원래 연재 때는 원고지 2.5매 분량, 500자 분량이었어요. 그 때 쓴 짧은 글도 좋긴 좋은데, 너무 압축하다보니 조사나 수식어도 다 빼고 그랬거든요. 이번에 책으로 내면서는 지면상 넣지 못했던 내용들도 넣고 해서 연재 당시 글보다는 대개 1.2배 정도 늘어났어요.
그런데 압축해서 짧은 분량에 내용을 다 집어넣는 훈련이 되니까 긴 글 쓸 때 굉장히 애먹더라고요(웃음). 청탁한 원고가 30매다, 그러면 하고 싶은 얘기는 이미 4매 정도로 압축되어 있거든요. 그래서 원치 않게 분량을 늘려야 하니까 이것도 곤혹이더라고요.
『사물 판독기』도 그렇고 다른 매체에 쓰시는 칼럼들을 보면, 어려운 말이나 비평 용어가 나오는 글이 아니라 쉽고 간명하게 글을 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아요. 이런 글쓰기 방식을 지향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어려운 글은 밀도가 높고 쉬운 글은 밀도가 낮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요. 정보량이 많고 깊이가 있더라도 읽히게끔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인 미술비평들 중에는 잘 안 읽히는, 구문론적으로 잘못된 글들이 많아요. 네다섯 줄이면 될 것을 한 페이지로 쓰는 글이죠. 그런데 저는, 어느 정도 교양이 있는 독자들이 읽고 이건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고 자신의 교양 수준을 의심하게 하는 글은 저자가 쓰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글이라고 생각해요. 잘 읽히지도 않은데 대충 유통되는 그런 글은 사실상 죽은 글이죠.
글쓰기의 지평을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논평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물이나 현상으로 연장시키고, 정보량을 밀집해 압축시켜 쓰되 알아듣기 쉽게 쓰는 것이 좋은 글쓰기라는 믿음은, 당분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아요.
10년 간 단행본 10권 내는 계획 외에, 올해 특별히 계획하고 있는 활동이 있으신가요?
3월부터 케이블TV에서 <아트 스타 코리아>라는 미술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시작해요. 그 프로그램에서 멘토 역할을 맡았어요.그 일이 상반기 가장 큰 일 중 하나고요. 다른 하나는 동시대 한국미술의 흐름을 따라가는 강좌인데요 1998년부터 2009년까지12년간을 총 8회의 강의로 압축해서 풀어가려고요.
우리나라나 외국이나 마찬가지일 것 같긴 한데요 현대 미술에 대해서는 작가론 중심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해당 작가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 말고는 관심을 끌기 어렵죠. 또 이런 이런 작가가 있다는 건 알아도 전체적인 것은 못 보게 되고요. 그래서 이 작가들이 어떤 배경에서 등장하게 되었는가 하는 전체 지형도를 그려보고 싶었어요. 어디까지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요.
| 박수진 (교보문고 북뉴스)
leftfield@kyobo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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