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03일(화) 14시. 왕십리CGV . 민병우 감독 <그 강아지 그 고양이>(2013) 시사회.
별점: ★
예상대로 영화가 끝나 크레딧이 모두 올라가자 관중석 일부에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특정 관객과에게 교감하기 쉬운 영화다.
영화를 보면서 촌평만 포스팅하고 별점은 누락시킬까를 고민했다. 별점의 상징성이 있을텐데, 이 영화가 동물보호의 맥락을 담고 있다고 시사회 시작 전 감독의 짧은 멘트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동물(특히 개)이 등장한 예술작품에 조건반사적으로 후한 점수를 주는 경향이 내게 있다. 그렇지만 시사회 중간에 자리를 뜰까 여러 차례 생각할 만큼 영화의 완성도는 수준을 논할 수 없을 만큼 낮다. 내가 시사회 관람 뒤 ★점을 매기기 시작한 후 별 1개를 준 영화가 이제껏 딱 한편 있었다. 올 5월 김규리 주연의 <어디로 갈까요>(엮인글)다. 한편이 더 추가되었다. <그 강아지 그 고양이>는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최초의 장편 영화라고 한다. 거기에 동물보호라는 선의까지 담고 있다. 이 두가지 미덕이 어째서 악용될 수 있는지 짧게 밝히자.
<그 강아지 그 고양이>는 두 남녀의 일과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는데, 시종일관 무한수의 우연의 남발이 시나리오를 견인한다. 고전 문학도 이 만큼 우연의 일치에 의존해서 이야기를 끌고가진 않는다. 남녀가 기르는 동물의 이름이 두 남녀의 실제 이름과 일치한다는 도입부의 설정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다. 그 이후 무한수의 우연의 남발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이 모든 수모를 동물사랑이라는 대의 때문에 눈감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주연 남녀의 연애 진행담도 초보 수준인데, 요즘 애들이 진짜 그렇게 느려 터지게 연애 한다고 믿는걸까? 시대 감성이 결여되어 있다. 허구물이니 그거야 연출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치자. 어색한 에피소드와 시시콜콜한 두 남녀의 갈등(피클 -방귀 싸움)이 너무 긴 시간 러닝타임을 차지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하게 늘어난 시간이 쌓이고 쌓여 한편의 '장편'을 만든다면, 설령 스마트폰으로 완성했다한들 칭찬할 덕목은 고사하고 감정요인이 된다. 배우들이 시종 과잉된 감정연기에 의존하는 건, 배우들의 연기력 탓이기보다 그런 연기를 유도하는 시나리오의 문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두 주연을 제외하고도 주변인물들의 전반적으로 부실한 연기력이 영화를 받쳐주지 못한다.
갈등 초래를 위해 빚어지는 신파조 대사와 걸핏하면 등장하는 조악한 애니메이션, 눈물로 대충 눙치려는 연기 따위는 보는 내내 답답한 심정에 젖게 한다. 동물보호라는 선의를 피상적으로 내세웠고, 예상대로 무수한 동물보호단체의 명단이 크레딧에 기재되고 있지만, 출연하는 개와 고양이는 영화 속에서 그저 주변부를 맴도는, 전적으로 인간의 삼류 로맨스에 가까운 영화다.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걸음마 단계인 동물보호라는 선의를 내세운들 작품에 대한 혹평을 유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선 고유의 순수함이 있다. 그 순수함 때문에 불완전성을 관대하게 봐줄 순 없다. 불완전한 스토리는 영화 자체나 이를 볼 관객이나 동물보호운동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연출자가 영화 제작 자체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유기동물 보호를 후원에 공감하는 관객이라면 차라리 동물보호단체에 기부금을 납부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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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03일(화) 1630. 왕십리CGV .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 Laurence Anyways> (2012) 시사회.
별점: ★★★★
시감각을 공략하는 화면 구성은 <로렌스 애니웨이>의 변별적인 장점이 될 수 있지만, 더 후한 점수를 유보시킬 수도 있다.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인상적인 첫화면 - 스크린 프레임에 딱맞춰서 실내의 정중앙 혹은 인물의 정중앙을 슬로우 모션으로 잡아내는 - 은 현대 사진계의 스테디셀러인 유형학적 사진이 취하는 프레임과 흡사하다. 이 같은 유형학적 프레임 외에도 인물의 바스트샷과 오브제의 클로즈업이 모두 안정적인 정중앙 배치와 좌우대칭을 계산에 넣고 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보수적이다. 시각예술 종사자라면 친숙한 공감을 느낄 게다. 시각예술종사자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는 일반적 평자라면 <로렌스 애니웨이>는 시종 참신해 보일 것이다. 그럼에도 감독의 미학적 프레임이 후한 점수를 유보할 감점 요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남발되기 때문이다.
80년대 팝송 '베티 데이비스 아이스'가 틀어진 차안에서 빨간 조명 아래 색깔론에 관해 대화하는 두 남녀를 광각 시점으로 핸드헬드 촬영하는 장면부터 <로렌스 애니웨이>의 탐미주의는 예고되고 있었다. 하지만 차츰 안정적 구도의 프레임이 반복되어 시각적 보수성이 쌓이고 급기야 옛애인으로부터 시집을 선물받은 프레드의 인체 위로 실내에서 거대한 낙수가 떨어지는 '정중앙 프레임'에 이르면 식상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감각 자극을 너무 자주 사용하면 둔감해진다.
이처럼 탐미주의적 시선의 잦은 반복에도 불구하고 가산점을 줄 요인이 기다리고 있다. 1987년부터 시작해서 1999년 Y2K까지를 연대기 순으로 다루면서, 이상한 성정체성을 지닌 주연이 시대 흐름에 따라 차츰 관대한 대우를 받는 과정을 잡아내는 것이 시의성을 지닌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 규정 불명의 두 남녀의 사랑을 담고 있으나, 미지의 영역일 수 밖에 없는 인간 관계 일반을, 특별한 두 남여를 통해 응집시킨 것으로 풀이할 만한데 그 점이 맘에 들었다. 결코 미인 반열에 놓을 수 없이 이상한 외모의 여성 배우 쉬잔느 클레멘트을 '여자로 살고 싶은' 주연 로렌스의 상대 배역으로 캐스팅한 것도 주제의 설득력과 관람의 집중력을 높인다.
* 영화를 3줄로 압축 요약하면...
- 사랑을 위한 관계 vs. 실존적 개인 구원. 이 둘 사이에서의 저울질.
- 국면 전환 때마다 정중앙의 탐미주의 프레임과 실험 음악의 제시.
- 그리고 슬로우 모션과 생각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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