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86): 쌍둥이 (씨네21)

* <씨네21>(932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86회분.  지난주 실렸지만 신간 소개 포스팅 때문에 한주 늦게 포스팅한다.






다이안 아버스, <일란성 쌍생아>, 1967
스탠리 큐브릭, <샤이닝>(스틸컷), 1980
납치된 민항기와 충돌한 세계무역 센터 쌍둥이 빌딩, 2001


 동일 대상을 2배 반복한 거울 효과. 쌍둥이의 첫인상은 이렇게 요약된다. 그렇지만 쌍둥이는 균질성의 반복이 아니다. 동일한 대상의 단순 반복이 아니란 얘기이다. 아무리 닮아보여도 외형의 차이가 분명 존재한다. 이란성쌍둥이라면 DNA마저 다르다. 쌍둥이의 균질적인 외형에 균열을 만드는 건 둘 사이의 미세한 차이다. 작은 차이로 인해 쌍둥이는 동일 대상의 2배 반복이 아닌, 동일 대상을 대략 1.5배 증강시키는 효과를 발휘 한다.

똑같은 원피스를 차려 입은 쌍둥이 소녀가 복도에 나란히 선 정면샷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에서 명장면으로 기억되는데, 그 화면은 역사적 다큐멘터리 사진가 다이안 아버스의 대표작 <일란성 쌍생아>의 영화적 반복 내지 번역으로 해석된다. 큐브릭의 쌍둥이 소녀를 통해 아버스의 그것이 쉽게 연상되는 이유는 원본 사진의 잔상효과가 컸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아버스와 큐브릭이 선택한 쌍둥이 소녀 사이에도 차이는 존재한다. 

아버스의 사진을 본 쌍둥이 소녀의 아빠는 “이제까지 보아온 가장 닮지 않은 딸아이들의 사진”이라고 평할 만큼, 같은 복장에 같은 머리밴드를 한 쌍둥이지만, 두 소녀의 얼굴 표정에는 미묘한 질감 차이가 발견된다. 덕분에 아버스의 쌍둥이 사진은 쌍둥이 초상 사진의 일반성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고유성으로 탈주한다. 아버스의 사진에 영향을 받은 큐브릭의 쌍둥이 샷도 마찬가지. 나란히 손잡고 복도 정중앙을 차지한 큐브릭의 쌍둥이 효과는 쌍둥이 자체에 있지 않다. 쌍둥이 소녀의 개입은 이미 좌우 대칭인 공간 구성에 기괴함을 보태면서 스릴러물의 성격을 강화시킨다.

일상에 널린 동일성은 완고한 보편 법칙에 지배 받기에, 기계적이고 몰개성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동일성의 보편 법칙을 차용하되 몰개성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예술의 전략이다. 보편 법칙을 반복하되 차이점을 만들어 보편 법칙의 몰개성을 야유하는 게 예술의 역설적인 전략이다. 앤디 워홀은 산업사회가 만든 무한 생산의 몰개성을 차용하되, 미세한 차이의 반복을 만들어서 예술로 미끄러진 경우이다.

9.11 테러에 무너진 쌍둥이 빌딩은 어떨까. 상이한 건물 두 동이 붕괴한 것보다, 대칭을 이룬 거의 동일한 건물 두 동의 붕괴는 보는 사람에게 최소 1.5배 이상의 충격과 분노를 야기한다. 미국 시장경제의 상징하는 지표로 균일한 모양새로 높게 치솟은 무역센터 건물 두 동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설마하니 테러를 예술로 간주할 순 없으나, 온 세상을 균일화 시키려는 세계화의 상징적인 붕괴를 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의 붕괴에서 읽게 되는 건 서글픈 아이러니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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