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5일(수) 10시30분. 대한극장. <숙희>(2014) 시사회.
별점: ★
상영 초반부 10분 이내에 영화의 좋고 나쁨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경험칙이 내게 있다. 그 경험칙은 거의 8할 이상 적중한다. 이 영화도 그 경험칙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입부 10분 전후로 낭패감마저 가슴으로부터 밀려왔다.
근본주의적 금욕주의자와 (영화상으로는 도무지 해설되지 못한) 섹스를 통한 환자를 치유하는 어떤 여성 사이의 대비가 이 영화의 큰 틀인데, 이런 구도부터 도식적이다. 이 도식을 강화하려고 금욕주의자인 남성을 데카르트를 강의하는 어설픈 철학과 교수로 설정한 구성도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 금언을 인용할 때 특히 그렇다.
남성의 엄정한 금욕주의를 시험하려고, 교수에게 단도직입인 유혹을 감행하는 보기 드문 여학생을 도발이나, 부부 사이의 거리감을 멀찌감치 떨어진 식탁으로 암시한 점 등, 영화가 드러내는 식상한 구도와 도식은 이루 열거할 수 없이 많다.
비정상적인 간병인 숙희의 되바라진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또 얼마나 황당한 장치들이 동원되었던가! 애써 비유하자면 숙희는 90년대 외화 <미저리>에 등장하는 강박녀에 해당되어야 이야기가 풀리리라. 그래야 숙희의 비정상성이 납득될 수 있단 얘기다. 하지만 영화의 후반부까지 지켜보면 <미저리>의 캐릭터와는 다른 그저 괴짜인 여성이었던 거다. 대체 뭐람.
리비도를 연출하는 낡고 상투적인 해석으로 미루어 나는 이 영화의 연출자가 상상력이 빈약한 마초 남성일 거라고 믿었다. 더욱이 사태가 제멋대로 풀리지 않으면 일단 여성의 뺨부터 날리는 남성 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웬걸... 기자 간담회 때 입장한 감독은 여성이었다. 경악.
스토리 전개와 모든 갈등에 시발점인 숙희의 간병 능력은 무슨 수로건 납득시켰어야 한다. 뇌졸중을 단지 성관계만으로 속속 치유했다는 숙희의 알 수 없는 재능에 관해, 영화는 끝내 입을 닫는다. 이마저 허구적 스토리텔링의 면죄부라 우길 참인가 보다.
비록 질감과 스토리에서 전혀 비교될 순 없다해도, 근래 관람한 외화 <님포매니악>(엮인글)이 극단적인 성행동을 풀이하고도 남다른 깊이감을 준 점까지 감안할 때, 어떻게 이렇듯 황당한 전개와 정태적인 설정들로 풀타임을 채운 영화가 21세기에 제작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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