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1일 토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신병교육대 (씨네21)

* <씨네21>(959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99회분. 아래는 내가 보낸 제목이고 실제 잡지에는 편집자가 'Shut up'을 제목으로 뽑았다. 뭐 괜찮긴 하지만 나는 원제를.



자원한 지옥세계





상. <풀 메탈 자켓> 1987년
중. <포레스트 검프> 1994년
하. 토마스 횝커의 미해병 신병훈련소 연작 사진 1970년


“흉하게 생겨먹은 꼬락서니를 보니, 네놈은 영락없는 현대미술작품이구나!”
부동자세로 사열을 받는 신병들에게 번갈아 모욕을 안기던 훈련 교관이 어느 신병의 면상에 대고 속사포처럼 쏟아낸 고함은 이랬다. 해병 신병훈련소의 분위기를 묘사한 이 화면은 <풀 메탈 자켓>의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이 장면이 긴 여운을 주는 이유는 전쟁터의 부조리를 절대복종만 존재하는 신병훈련소의 불합리한 속성으로 압축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저항 상태로 얼음처럼 굳은 신병들을 몰아붙이는 교관의 고압적인 자세는 놓치기 힘든 관전 포인트다. 신병훈련소가 여러 예술가 집단이 즐겨 재현한 소재인 까닭이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도 신병과 얼굴을 맞대고 빈정대듯 고함을 질러대는 교관이 익살스레 인용된다. 다큐멘터리 사진가 그룹 매그넘 포토스의 토마스 횝커도 미해병 신병훈련소를 자신의 주제로 정해 연작을 남겼다. 안절부절 못하는 신병 한명을 둘러싸고 교관 여럿이 윽박지르는 사진에서 보듯, 해병 신병훈련소의 교육방침은 훈련 낙오병을 구원하기는 고사하고 낙오자를 한껏 비웃는 것이다. 이처럼 비교육적인 훈육 장면에서 모순된 쾌감이 느껴진다는 건 부조리하고 아이러니하다.

군대는 자주 사회의 연장으로 비유되지만 엄연히 차원이 다른 세계다. 이 색다른 세계를 일반인이 접할 경로는 해병대 캠프 입소 프로그램 정도일 것이다. 입소 프로그램은 일상의 사이클을 벗어나 비일상적 자아 이탈을 체험하게 만든다. 극도의 긴장감 유지와 오감 자극의 최대치를 느끼는 이 잔혹한 시간을 장기간 견딜 순 없을 지라도 단기간의 체험으로 진부하게 반복되는 일상을 뒤흔드는 계기가 될 지도 모른다. 입소 프로그램이 아닌 한, 현실에 존재하는 비현실 세계인 신병훈련소를 울타리 바깥으로 연결하는 매개는 허구적인 영화나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영화와 사진이 담아낸 신병훈련소의 몰상식한 위계질서와 비현실적 의사소통 장면은 훔쳐보기의 쾌감을 안긴다.

신병훈련소에서 절대 다수의 훈련병과 이들을 통솔하는 극소수 정예요원 사이의 대조적 위계질서가 유지되는 비결은 계급이다. 계급은 일방적 명령과 절대 복종을 정당화 하는 헌법이다. 예술 비전문가 그룹과 전문가 사이의 비대칭 관계와 흡사하다. 미술관에 걸린 고압적인 현대미술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 일반인 관객과 닮았다. 한쪽은 요란하고 다른 한쪽은 고요하다는 점만 다를 뿐.


ps. <풀 메탈 자켓>에서 고함을 지르는 훈련 교관의 배우 로널드 리 어메이는 실제 해병 신병훈련소 교관 출신이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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