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5일 목요일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영화 속 미술 (씨네21)

* <씨네21>(957호)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98회분.



영화 속 미술 배역



로버트 롱고의 그림이 나오는 <아메리칸 사이코> 2000년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나오는 <로보캅> 2014년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그림으로 이야기를 푸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년



가보로 물려받은 그림을 그녀의 연인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지배인에게 상속한다는 내용이 마담D의 유언장에 적혀있다. 르네상스 화풍 초상화 <사과를 든 소년>는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이야기가 갈등으로 전환될 때 촉매로 등장한다. 값을 따질 수 없는 명화로 묘사된 이 고전 회화는 미술사에 실존하지 않는 가상의 그림이지만 등장인물들 사이에 갈등을 빚는 빌미로 부족함 없이 활약한다. 그림의 실소유주 여하에 따라 비자금 조성의 단서가 될 뻔 했던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이 현실에서 행사한 비중과 유사한 역할을 한 것이다. 

종적을 감춘 <사과를 든 소년>이 걸린 벽에는 농염한 두 여성의 누드화가 대신 걸렸는데, 흡사 에곤 실레의 작품처럼 보이지만 이 그림 역시 실레의 화풍을 모사한, 미술사에는 실존하지 않는 그림이다. 영화에 찬조출연 하는 미술품은 대중이 미술에 관해 품고 있는 온갖 선입견을 충족시키는 배역을 수행한다. 어마어마한 금전적 가치와 장식적인 아우라를 보장하는 게 미술품이라는 믿음 말이다. 영화에서 소품으로 출연하는 미술의 고정 역할은 대개 그렇다.

<사과를 든 소년>만큼의 중요도는 아니어도 <아메리칸 사이코>에도 주인공의 성격을 보조하는 그림이 출연한다. 속물적인 금융인 패트릭 베이트가 홀로 사는 초호화 아파트 거실에 걸린 신표현주의 화가 로버트 롱고의 1980년대 <도시의 남자들> 연작 가운데 두 점이 그것이다. 흑백 색상으로 마감된 이 그림 속에 회사원이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서있다. 역동적인 인물의 자세는 그가 착용한 단아한 정장이나 단아한 흑백화면과 대비 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긴다. 그림 속 대비감은 월스트리트에서 큰돈을 만지는 주인공의 허세와 반인륜적 욕망을 나란히 투영한다.

로보캅 프로젝트를 설계하는 옴니코프사의 CEO 레이몬드 셀러스의 집무실을 묘사하는 <로보캅>(2014) 화면에도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 압도적으로 출연한다. 가족의 파탄을 상징한다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오레스테이아 삼부작>은 위기에 몰린 로보캅 가족의 붕괴와 겹친다. 더구나 네모진 큐브 안에 인물을 가두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인물 묘사는 실험실 큐브 안에 자기 존재감을 가둔 로보캅의 처지와 닮았다고 해석된다.

현대미술은 한정된 수의 관객과 교감하는 소수 취향 예술이다. 이렇듯 속세와 좁힐 수 없이 멀어진 미술도 영화에 소품으로 소환되면서 확장된다. 그렇지만 영화의 소품으로 출연할 때 미술은 현대미술의 본래 모습과는 어김없이 다른 얼굴로 분장한다. 미술에 대한 세속의 기대감과 선입관을 만족시키는 배역일 때 미술은 영화에서 생존한다.




반이정: 미술평론가(원래 꿈은 배우). <중앙일보> <한겨레21> <시사IN>에 미술비평을 <한겨레> <경향신문>에 시평을 연재. 자전거 7대를 타고 다니는 자전거광. 네이버 파워블로거로 선정된 그의 거처는 dogsty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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